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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26] 전국적인 독립의군부 결성해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한 '임병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5 19: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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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임병찬 林炳瓚,1851.02.05 ~1916.05.23. 전라북도 옥구, 독립장 1962

선생은 1906년 전남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의 기치를 들었으며, 경술국치 후 광무황제의 밀칙(密勅)을 받고 전국적 규모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제에 체포되어 거문도에 유배되었으며 고초를 겪으시던 중 순국하셨다.


# 일찍이 학문을 배워 어려서 신동(神童)이라 불리다


임병찬(林炳瓚, 1851. 2. 5 ~ 1916. 5. 23) 선생은 1851년 2월 5일 전북 옥구군(沃溝郡) 서면(西面) 상평리(上坪里)에서 임용래(林榕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중옥(中玉), 호는 돈헌(遯軒). 세 살 때 천자문을 읽었고 한번 읽어 내려가면 바로 외어버려 부친이 재주가 지나칠까 두려워해 가르치기를 그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총명했다. 5살 때부터 동리 사숙(私塾)에서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때 이미 오언(五言), 고풍(古風), 수귀(數句)를 읽을 수 있을 만큼 뛰어나 모든 이들이 그를 신동이라 일컬었다 한다. 그 후 향시 백일장에 나가 ‘대고풍’(大古風)으로 수석을 차지하기도 햇다.


# 낙안군수에 부임하여 부정부패 척결에 앞장서다


15세가 되던 해에 전주부 감시(監試)에 응시해 합격했으나, 이때 가세가 빈궁할 대로 빈궁해 생계를 위해 사역(使役)에 종사했다. 이렇게 곤궁한 가운데서도 면학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1888년 호남에 대흉년이 들자 돈 4,000냥과 조 70석을 내어 구휼하고 1석에 25전의 저리를 받아 백성을 구했다. 그리하여 1889년 봄 도내 유림의 천거로 절충장군첨지중추부사(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의 직첩을 받았다. 그 뒤에도 휼민을 잘해 7월에 낙안군수(樂安郡守)(겸 순천진관병마동첨절제사(順天鎭管兵馬同僉節制使)에 임명됐다. 낙안군수에 부임해 탐관오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를 막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했다. 1890년 그동안의 관직생활을 청산하고 향리인 회문산(回門山) 북쪽 종송리(種松里, 현재의 종성리:宗聖里)에서 학문에 전념하던 중 1894년 무남영우영관(武南營右領官)에 제수됐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사양하고 향민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동민(洞民)을 거느리고 뒷산에 올라 궁궐 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기도 했다.


임병찬 상언

#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무성서원에서 창의(倡義)하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乙巳條約)이 늑결됐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 중 1906년 정월 경기도 포천에서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 선생이 호남으로 내려 왔다. 이때 정읍군 산내면(山內面) 종송리에서 거사를 준비 중이던 선생을 만나 뜻을 같이 하게 됐다. 선생은 최익현을 맞아 사제(師弟)의 의(義)를 맺고, 최익현에게 병권(兵權)을 위임했다. 이리하여 같은 해 6월 4일(음력 윤 4월 13일)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사방에 격문을 돌리고 그 날로 태인을 정복해 군량과 군기를 확보했다. 이어 정읍, 순창을 격파하고 8일에는 곡성을 점령하는 동안 근방 포수들이 모여 진영은 900명으로 늘어났다. 이와 같이 면암과 선생이 지휘하는 의병진 앞에 왜군은 도망하고 군수와 그 관속(官屬)은 엎드려 사죄했고 민중의 호응도 대단했다. 6월 12일 의병진이 순창에 진을 치고 있을 때 전주와 남원진위대 군사가 공격해 왔다. 여기서 일제의 침략문제를 놓고 동족끼리 살상을 해서는 안되겠다는 뜻에서 의병을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가운데서 관군의 공격을 받아 중군장 정시해(鄭詩海)가 전사했고, 선생을 비롯해 최익현 등 13명은 일본군 사령부로 붙잡혀가 같은 해 7월 9일에는 대마도(對馬島) 엄원군(嚴原郡) 위수영(衛守營)에 감금됐다. 그 후 면암이 단식항쟁(斷食抗爭)으로 순절(殉節)했고 선생은 이듬해 1907년 1월에 유배가 해제돼 귀국했다.


'해외일기'(1906) 사본# 광무황제의 밀명(密命)으로 독립의군부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이 되다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국권이 완전히 상실되자 향리에 재차 거의할 것을 도모하던 중 1912년 음력 9월 28일 공주(公州) 유생 이칙(李侙)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전라남북도 순무대장(全羅南北道巡撫大將)으로 임명한다는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밀명을 받았다. 광무황제는 열강들에 대해 국권을 만회할 원조를 구할 목적으로 독립의군부를 전국적으로 조직해 무력항쟁을 추진키 위해 1906년 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선생을 전라남북도 순무대장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의병활동을 경험한 선생은 이 막중한 임무를 감당하기에는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껴 수차에 걸쳐 이 책임을 면하기를 상소했으나 1913년 정월 전참판 이인순(李寅淳)이 다시 황제의 밀조(密詔)를 전하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선생은 의병 활동때부터 나름대로 구상했던 의병(義兵)전략과 당시 일제하에서의 독립운동방략을 분석하고 앞으로의 독립의군부 활동방법을 제시한 '관견'(管見)을 작성해여 상소했다. 


이 '관견'은 (1)論天下大勢(논천하대세) (2)論時局形便(논시국형편) (3)知己(지기) (4)知彼(지피) (5)天時(천시) (6)制勝(제승) (7)定籌(정주) (8)料人(료인) (9)料史(료사) (10)備禦(비어)로 구성돼 있고 누구나 쉽게 보고 행할 수 있도록 국한문의 문답형식으로 돼 있다. 일종의 독립의군부에 대한 종합활동계획서와 같은 것이다. 이 상소가 받아들여져 1913년 2월 광무황제로부터 사령총장(司令總將) 겸 전남북순무총장(全南北巡撫總將)에 임명됐다. 선생은 향약(鄕約)과 5가작통(五家作統)의 중요성에 착안해 독립의군부를 조직할 때 이 구상을 적용했다. 1913년 음력 정월에 아들 임응철(林應喆)을 서울에 보내 전참판 이인순.이명상(李明翔).곽한일(郭漢一) 및 전용규(田瑢圭) 등과 협의해 음력 2월 김태흥.임당.송재준 등과 함께 전라남북도의 조직을 완료했다. 1914년 2월에는 임병찬이 상경해 이명상.이인순 등과 상의해 독립의군부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해 대한독립의군부 편제를 구성했다. 중앙원수부에 병마도총장(兵馬都總將)과 참모총약장(參謀總約長)을 두고 서울, 강화, 개성, 수원, 광주(廣州)에 5영(營)을 두어 사령총장, 참모부약장(參謀副約長) 각 1명, 매 부(府)에 관찰사(觀察使) 1명과 도약장(道約長) 1명, 각 군(郡)에는 군수 1명과 군약장(郡約長) 1명을 그 밑에 향장(鄕長), 면장, 이장, 통장(統長)을 배치하여 조직적인 편제를 갖춘다는 것이었다.


'대마도 일기'

# 전국적인 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대규모 의병전쟁을 준비하다


1914년 3월 23일 이명상.이인순과 상의해 각도 각군 대표를 선정하여 편성했다. 그 내용을 보면


<총 대표)>


林炳瓚(임병찬), 閔正植(민정식), 李明翔(이명상), 李寅淳(이인순), 趙衡夏(조형하), 郭漢一(곽한일), 蔡相德(채상덕), 金鏞應(김용응), 田瑢圭(전용규), 曺在學(조재학), 崔萬植(최만식), 李承旭(이승욱), 高石鎭(고석진)


<각도 대표>


경기도 : 崔永卨(최영설)

충청도 : 柳濬根(유준근)

경상도 : 權鎭遠(권진원)

전라도 : 李重翼(이중익), 崔永灃(최영풍), 吳啓嘩(오계화), 朴在求(박재구), 李權濟(이권제)

강원도 : 徐相烈(서상렬)

함경도 : 金性文(김성문)

평안도 : 李道成(이도성)

황해도 : 柳應斗(유응두), 吳昌根(오창근), 宋洛善(송낙선)


'의병전'독립의군부의 활동목표는 일본의 내각총리 대신과 조선총독 및 주요 관리들에게 한국강점의 부당성을 깨우쳐 주고 대규모 의병전쟁(義兵戰爭)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14년 5월 일정한 날을 정해 첫째, 참모총약장 1명, 참모부약장 5명, 참모약장 8명 등 14명은 각국 공사(公使)에게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있음을 알리고, 이어 일정한 장소에 모여 연명 날인(捺印)하여 총독부(總督府)에 투서하며, 도약장은 각각 해당 부(府), 경무부(警務部)에 투서하고, 부.군약장은 각각 부, 군, 병참(兵站)에 투서하며, 투서 2일전 새벽이나 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거사 일이 지나면 곧바로 향약(鄕約)을 실시하려 했다. 1914년 5월 3일 선생은 함경남도 관찰사 겸 순무총장에 중임(重任)돼 조직을 북부지방까지 확대하던 중 5월 23일 동지 김창식(金昌植)이 일경에 붙잡힘으로써 독립의군부 활동이 일경에 발각됐다.


대한독립의군임병찬선생창의기념비# 거문도(巨文島)에 유배돼 순국하다


독립의군부의 계획에 대한 수사가 시작되자 총사령인 선생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에게 직접 면담을 요구하고, 윤 5월 23일자로 총독 및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에게 ‘국권반환요구서’(國權返還要求書)를 보냈다. 5월 29일 총독 대리로 온 경무총감(警務總監) 입화소일랑(立花小一郞)에게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국권반환 및 일군의 철병을 요구했고, 한국의 독립만이 동양평화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역설했다. 그 해 6월 1일 다시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총리 대신에게 서신을 보내 일제의 한국침략을 강력히 규탄했다. 이에 일경은 동월 3일 선생을 체포하고 독립의군부 간부들을 투옥시켰다. 선생은 자결을 시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6월 12일 1년 감금(監禁)의 선고를 받고 거문도에 유배(流配)되었다. 유배된 후 단식으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1916년 음력 5월 23일 유배지에서 향년 66세의 생애를 마감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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