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전통사찰 71] 영취산 자락에 자리한 아름다운 대표적인 사찰 '흥국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7 04:28:57
  • 수정 2024-04-02 04:02:56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흥국사는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 영취산(靈鷲山)에 있는 화엄사의 말사(末寺)로, 1984년 2월 29일 전라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흥국사는 고려시대인 1195년(명종 25)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이 창건했다고 한다. 그 뒤 조선시대인 1560년(명종 15)에 법수(法修)대사가 중창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동안 의승군의 주둔지와 승병 훈련소로서 호남 지방 의병.승병 항쟁의 중심 역할을 하면서 법당과 요사가 소실됐다. 1624년(인조 2)에 계특대사(戒特大師)가 건물을 중창했고, 1690년 법당을 증축하고 팔상전을 새로 지었다. 1780년 선당(禪堂)을, 1812년 심검당(尋劍堂)을 각각 중건했고 1925년 칠성각과 안양암을 새로 짓고 팔상탱화를 봉안했다.



가람의 배치는 대웅전(大雄殿)을 주축으로, 경사지 위에 사천왕문(四天王門)을 지나 봉황루(鳳凰樓), 법왕문(法王門), 대웅전, 팔상전(八相殿)이 순서대로 일축선상에 배치됐고 대웅전 전면 좌우에는 적묵당, 심검당이 있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해 팔상전.불조전.응진당 등 10여 동의 목조건물이 있고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보물), 여수 흥국사 홍교(보물), 괘불(掛佛), 경전(經典), 경서판각본(經書板刻本) 등 많은 문화재가 보존돼 있다.


흥국사에는 옛날부터 ‘나라가 흥(興)하면 절도 흥하고 이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할 것이다’ 라는 말이 전해 내려온다. 


# 흥국사 홍교 



여수 흥국사 홍교는 흥국사 입구에 있는 다리로, ‘홍교’는 무지개다리를 뜻한다. 전체 높이가 5.5m, 너비가 11.3m, 길이가 40m이며, 현재 남아 있는 무지개다리 중에 가장 규모가 크다.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인조 17년(1639)에 흥국사 주지인 계특 대사가 흥국사를 다시 지을 때 다리도 같이 놓은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에 폭우로 일부가 무너졌지만, 이듬해에 복구했다.


흥국사 홍교는 개울 양 기슭의 바위를 주춧돌로 삼아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석 86개를 서로 맞물리게 해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절묘하게 짜 올렸다. 다리 한복판에는 양쪽으로 마룻돌이 튀어나와 있고 그 끝에 용머리를 장식하였는데 마치 용이 다리 밑을 굽어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난간 부분에 조각된 도깨비 얼굴은 잡귀를 막는다는 의미와 더불어 이 다리를 건너 부처의 나라로 가는 모든 중생을 보호한다는 종교적인 의미를 함께 담고 있다.


# 흥국사 대웅전 




1963년 9월 2일 보물로 지정된 흥국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단층 팔작지붕이다. 조선 중기의 건축으로 갑석(甲石)이 있는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3칸은 기둥 사이를 같은 간격으로 분할하고 각각 4분합(四分閤)의 빗살문을 달아 전부 개방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빗살문은 상부를 구분해 교창(交窓) 모양으로 의장했기 때문에 문짝의 키가 높다. 따라서 주고(柱高)도 높이 잡았다. 공포(栱包)의 구성은 내외삼출목(三出目)으로 우설(牛舌)은 앙설(仰舌) 셋과, 수설(垂舌) 하나이다. 공간포(空間包)는 전면 주간(柱間)에 똑같이 3개씩 배치했다. 내부의 첨차(檐遮)는 원호곡선이 짧고 대들보 위에는 우물천장을 가설하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 흥국사 봉황루 



흥국사 봉황루는 1646년(인조 24) 창건돼 일반 대중의 집회 장소로 이용됐다. 임진왜란 기간에 불탄 것을 1729년(영조 5) 팔도도총섭인 승려 덕린(德燐), 승통대장(僧統大將) 찬민(贊敏), 팔도도총섭 자헌(慈憲) 등 300여 명의 승병이 중창했다. 1729년 제작된 '영취산 흥국사 봉황대루 중창 상량문(靈鷲山 興國寺 鳳凰大樓 重創 上樑文)'에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대루였다고 나와 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25년 지금과 같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축소됐다. 1750년(영조 26)에도 중수가 이뤄졌다고는 하나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사찰은 중문과 탑 그리고 금당을 일직선상에 배치하고 그 주위를 회랑으로 구획했다. 중앙의 탑과 금당을 가장 크게 하고 중정을 가장 넓게 조성했다. 이 중심원(中心院)의 뒤쪽 회랑에서 좀 더 떨어진 중앙 북쪽에 거대한 강당을 두고 좌우에 남북으로 승방지를 배치했다. 선종의 유행과 함께 가람이 산지에 건립되면서부터 강당과 승당이 금당의 전면에 배치됐다. 이 시기를 고려 시대로 추정한다. 산지의 가람들은 산기슭 아래쪽에 도량의 중심을 잡고 배산(背山)해 치올린 터전에 전각을 세우는 까닭에 낮고 평평한 하단에 강당과 승당을 배치하고, 예불 공간은 상단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봉황루는 부처님께 예불을 드리거나 제반 의식을 행하는 곳이다. 흥국사 봉황루 안에는 1718년(숙종 44) 박종해(朴宗海)가 정유재란 시기 노량해전에서 순절한 남유(南瑜)[?~1598] 장군을 기리면서 지은 '남장군 순절비 창건기(南將軍 殉節碑 創建記)'와 1873년(고종 10) 작성된 '만일회동참계원록' 외에도 공북루(拱北樓) 현판 등이 걸려 있었는데 2003년 4월 흥국사 의승수군유물전시관이 건립된 후 모두 이전했다.


# 흥국사 천왕문



일주문을 지나면 다음에 보이는 것이 천왕문이다. 이 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들이 모셔져 있다. 부릅뜬 눈과 크게 벌린 입, 발 밑에 마귀가 신음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 보는 이들을 두렵게 만든다.


사천왕들이 수미산 중턱에서 불법을 수호하고 있듯, 사찰에 악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이 신성한 사찰에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모신 것은 악귀의 범접을 막기 위해서이고, 또한 절을 찾아온 중생들의 마음속에 있는 잡념을 없애주는 역할도 한다. 사천왕은 수미산 중턱에 사는 신들로서 제석천을 모시고, 각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다. 부하들과 함께 천지를 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선악을 모두 알아와 제석천에게 보고한다고 한다. 사천왕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방위신으로 동쪽은 지국천왕이, 남쪽은 증장천왕이, 서쪽은 광목천왕이, 북쪽은 다문천왕이 지킨다.



지국천왕은 오른손에 칼을 들고, 왼손은 주먹을 쥐고 허리에 대고 있거나 보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다. 증장천왕은 오른손에 용을, 왼손에 여의주를 쥐고 있는 모습이며, 광목천왕은 오른손에 삼지창을, 왼손에 보탑을 들고 있다. 그리고 다문천왕은 환하게 웃으며 비파를 타고 있어서 쉽게 구분이 된다.경남 유형문화재 제250호로 지정돼 있다.


# 흥국사 법왕문


흥국사 법왕문은 보제루[법당 대신 설법을 하기 위해 지은 누각]의 기능을 했던 전각으로, 여기서부터 실질적인 법당으로 봐야 한다. 전면의 대웅전에 큰 괘불을 모셔 놓고 법회를 할 때도 이곳에 법단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흥국사 윗보제루라고도 한다.


흥국사 법왕문은 대웅전 전면과 봉황루 후면 사이에 있다.


흥국사 법왕문의 전면에 걸린 현판에는 1624년(인조 2) 계특 대사가 법왕문을 창건했다고 나와 있다. '선당수선상량기(禪堂修習上樑記)'에 “계특 대사가 흥국사를 복원한 후 승려 옥청(玉淸)이 법왕문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50년(효종 1)을 전후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1815년(순조 15) 응운 대사가 중수한 데 이어 1962년 응봉 대사가 다시 중수했다. 1991년 승려 명선이 보수하고 2014년 개축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주심포 양식이다. 원래는 전체가 마루로 돼 있었으나 현재는 좌우 양쪽 칸에 마루가 있고 가운데는 대웅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서로 통할 수 있게 했다.


법왕문은 법의 왕인 부처님께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사찰 배치 구조상 그리 흔한 형태는 아니다. 법왕문은 승병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보통 사찰에는 하나의 보제루가 존재하는데 흥국사는 법왕문과 봉황루 두 곳이 보제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흥국사에 법왕문을 추가로 더 뒀던 것은 의승의 계급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이 다른 건물들에 비해서 높은 편이라 안정감은 없지만 건물의 사용 목적상 보제루와의 격을 달리하기 위해서 높이 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 승병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전각이다.


# 팔상전



팔상전은 숙종 16년(1690)에 대웅전을 확장 불사하면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영조 17년(1741)에 그린 영산회상도가 모셔져 있다. 팔상 '八相'이란 '법화경'의 주존불인 석가모니의 일생을 크게 8가지로 구분해서 설명한 것이고 그 모습을 그림으로 조성해서 봉안한 곳을 팔상전이라고 한다. 안에는 주존으로서 석가모니를 모시고 문수.보현보살상을 협시로 봉안했다. 1970년대 후반까지 1917년에 조성한 팔상탱화가 있었으나 도난당했고 지금은 영산회상도만 남아 있다.


# 원통전



대자대비한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관음전 또는 원통전, 대비전이라고 한다. 관음전은 주불전이 아닌 부속 불전인 경우에 사용한다. 관음보살이 주불전인 경우에는 원통전이라고 부른다. 원통이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의미다.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두루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주원융통의 약자이다. 


원통전은 미륵불을 모시는 미륵전과 함께 민간신앙적인 성격이 강한 전각이다. 가람배치상 외진 곳에 지어진 독립 전각이다. 이러한 배치의 이유는 교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흥국사는 주불전인 대웅전과 부불전인 불조전, 팔상전, 응진전이 있다. 모두 법화사상에 기반한 가람배치이다. 더구나 흥국사가 영축산에 위치한다. 


철저한 법화신앙의 가람에 정토사상인 아미타신앙의 하위신앙인 관음신앙의 전각인 원통전이 있다. 다른 전각과 같은 곳에 위치하기에는 흥국사의 정통성에 큰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가람의 주축선상에서 많이 떨어진 외진 곳에 원통전을 건립한 것이다. 


# 후불탱화(後佛幀畵)


전라남도 여수시 중흥동의 여수 흥국사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 후불탱화이다. ‘화기’에 의하면 이 불화를 조성할 때 서민층도 많이 참가한 것으로 보아 당시 불교의 대중화를 짐작할 수 있다. 원만한 형태와 고상한 색채의 조화로 17세기 후반기를 대표할 만한 뛰어난 걸작이라 할 수 있다.후불탱화(後佛幀畵)는 대웅전(大雄殿), 영산전(靈山殿), 팔상전(八相殿), 응진전(應眞殿) 등의 주존(主尊)인 석가불상의 뒷벽에 봉안하는 불화이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은 석가여래가 인도에서 영지 법회를 주재할 당시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법화경'의 내용을 도설화한 불화로 이를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법화경 신앙이 유행하면서 영산회상도가 많이 그려졌다. 흥국사 대웅전 후불탱의 화기란(畵記欄)을 보면 1693년 4월 영산회를 조성하여 봉안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주상전하(主上殿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고 이와 함께 50여 명의 비구와 일반 신도의 시주로 이뤄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불화를 그린 화공(畵工)은 의천(義天), 천신(天信)이다. 그린 후에 이 불화를 증명(證明)한 승려의 기록이 나타난다. 조선시대 숙종 대에서 정조 대에 걸쳐 활발한 법당의 재건이 이뤄지면서 불상과 불화의 조성도 동시에 가져왔다. 법당이 재건됨으로써 법당 내부에 봉안할 불상의 조성과 불화의 제작이 뒤따른 것이다. 


이 시기 조선전기에 그려지던 벽화에서 이동 가능한 불화로 대치됐다. 다량의 불화가 제작됨에 따라 불화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사집단(畵師集團)이 생겨나게 된다. 


유물-여수흥국사-팔상전/석가모니후불탱불화가 보물로 지정된 것은 흔치 않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한 부처가 연꽃좌대에 앉아 법화경을 설법하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 위에 범천과 제석천이 위치하고 있다. 화면 하단에는 사천왕이 전방에서 호위하고 있다. 신광 좌우에는 6대제자를 두고, 두광 좌우에는 여섯분의 분신불이 도열하고 있다. 최상단에는 용왕과 용녀 그리고 팔부신중상(八部神衆)이 배치돼 있다. 설법모임에 운집해 법을 청해 듣고 있는 장엄한 광경이다. 


화면 윗부분에는 정교하고 화려하게 수놓아진다라니(多羅尼) 주머니를 매달아 치례장식을 했다. 몸 주위 키형 광배의 신광에서는 오색찬란한 빛이 뻗어나가고 있다. 머리는 나발로 두정에는 산처럼 뾰족한 육계가 표현되었다. 머리에는 반구형의 중간계주, 육계 위에는 작은 구형의 정상계주를 표현하였다. 정상계주에서는 검은색 서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얼굴은 넙적한 방형이나 턱선은 부드러운 모습이다. 머리와 이마의 경계선인 발제선의 중앙에는 W자형의 라인이 표현된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마는 넓으며 호형의 작은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표현됐다. 눈동자가 표현됐고 눈꼬리가 약간 올라간 반개한 눈으로 코는 콧등과 콧방울이 작아 이지적인 모습이다. 입술도 매우 작게 표현되고 콧수염과 턱수염이 짧고 가늘게 표현됐다. 


유물 여수흥국사 대웅전 백의관음벽화귀는 목 중간까지 내려와 있고 귓불이 약간 외반됐다. 큰 얼굴에 비해 이목구비는 작게 표현된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굵은 목과 살집이 넉넉한 어깨로 표현돼 건장하고 당당한 모습이다. 법의는 우견편단으로 금빛의 둥근 보상화문을 시문한 붉은 가사를 걸치고 있다. 대의는 밤색으로 단을 마무리해 정중한 자태이다. 


승각기는 수평으로 걸치고 대의에 표현된 채색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며 녹색과 밤색이 어우러졌다. 꽃무늬나 옷 주름선 등에 금색을 사용하고 있어서 한결 고상하고 품위 있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불화의 구도는 본존불을 중심으로 하단부에는 4천왕(天王)과 4대 보살을 모셨다. 


상단부에는 제석(帝釋), 범천(梵天), 6제자, 6여래와 용왕(龍王), 용녀(龍女) 및 6위의 신장상(神將像) 등을 배치하고 있다. 4보살상은 정중동(靜中動)의 자세와 두광과 천의에서 색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과 제화갈라보살의 상단 후열의 대각선상에 보살형인 대범천과 제석천이 배치되었다. 대범천과 제석천은 녹색의 두광이 표현되었으며, 대범천은 녹색 제석천은 붉은색 천의를 걸쳤다. 마(麻) 바탕에 채색한 가로 4.27m 세로 5.07m인 대족자로 돼 있다. 1974년 7월 9일 보물 제578호로 지정 됐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재지정됐다. 화면 상단에는 흑색으로 처리하여 무한한 천공(天空)을 표현하고 있다. 불화의 밑에는 화기가 적혀 있다. 화기는 ‘강희삼십이년계유4월일 영취산흥국사영산회필 공안우태위주상삼전하만세수만세국태민안 법륜상전(康熙三十二年癸酉四月日 靈鷲山興國寺靈山會畢 功安于泰爲主上三殿下萬歲壽萬歲國泰民安 法輪常轉)이라고 묵서돼 있다.


# 흥국사 중수사적비



여수 흥국사 중수사적비는 1703년(숙종 29)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을 지은 최창대는 당대의 명문장이었고, 비문을 쓴 이진휴 역시 숙종대에 '통도사사리탑비' '선암사중수비'(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 92호)등 많은 작품을 남긴 명필이었다.


비문의 내용에는, 창건자 지눌과 무의자 담당(無衣子)와의 관계, 송광사가 세워진 직후 흥국사가 창건됐다는 사실, 1560년(명종 15) 법수회상(法守和尙)에 의해 사찰건물 1천여간이 증축됐다는 것, 1624년(인조 2) 계특(戒特)의 대대적인 사찰중건의 사실, 그리고 통일(通日)의 법당 개축사실 등 흥국사의 사적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중수비 뒷면에는 정동호(鄭東虎)가 지은 발문을 문세욱(文世郁)이 썼다.  협조한 김덕항(金德恒)을 비롯한 약 140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중건과정에 도움을 준 지방관과 중앙정계의 인물, 관련 승려, 여성을 포함한 신도, 그리고 석공들의 명단까지 기록돼 있어서 당시 중수비의 건립과정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사진-윤정숙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