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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29] 수절한 여인’과 ‘직언한 충신‘의 ’박태보 설화’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7 08:20:11
  • 수정 2024-04-10 10: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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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예조좌랑, 호남의 암행어사 등의 관직을 역임한 박태보(朴泰輔, 1654~1689)의 묘역으로 장암동(長岩洞) 산1번지에 있다. 조선 숙종 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아버지 서계 박세당(朴世堂, 1629~1703)의 묘에서 약 100m 떨어져 있다. 좌향(坐向)은 서향으로 봉분의 지름은 5.5m이다.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2기의 망주석과 혼유석, 상석, 향로석 등이 조성되어 있다. 묘비는 비신 및 비좌, 비수를 갖추고 있는데, 비신의 높이는 150cm, 비좌의 높이는 77cm이다.[박광준 기자] ‘박태보 설화’는 조선숙종 때 충신인 박태보(朴泰輔)[1654~1689]가 노강서원에 모셔진 일과 관련해 전해오는 설화이다. 박태보를 흠모헤 사모하던 마음을 전한 여인이 평생 수절하다가 인현왕후 폐위를 반대해 유배 가던 중 죽음을 맞은 박태보의 임종을 지키고 사후 박태보를 기리기 위해 서원이 세워지던 날, 여인이 서원에서 자결했다는 이야기이다.


‘박태보 설화’는 지혜롭고 훌륭한 풍채를 지녔던 박태보에게 반한 참판 이종엽(李宗燁) 집의 심부름하던 여인이 박태보의 유모에게 마음을 비추었다. 유모가 박태보의 모친에게 여인의 마음을 전하고, 박태보 부친이 박태보에게 여인에게 원망을 얻지 말라 훈계하고 박태보는 이를 따른다. 이후 심부름하던 여인은 머리에 쪽을 진 채 주위에서 놀려도 혼인한 사람처럼 행세하면서 지냈다. 1689년(숙종 15)에 인현왕후가 폐위되자 박태보가 상소를 올렸다가 모진 형벌을 받지만 끝내 굴하지 않아 결국 진도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러나 도중에 형벌로 인한 상처가 심해져 노량진에서 차도가 있기를 기다리나 끝내 목숨이 위험하게 된다. 이때 박태보를 사모했던 여인이 찾아와 박태보의 임종을 지켜본다.이후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박태보를 기리는 노강서원(鷺江書院)이 건립되는데, 서까래에서 목을 맨 심부름하던 여인이 발견된다.


이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수절한 여인’과 ‘직언한 충신’이다. 조선 후기 문신으로, 박세당(朴世堂)의 아들인 박태보는 숙종의 인현왕후 폐위를 두고 상소를 올리고 고문 끝에 노량진에서 숨을 거둔 인물로, 박태보에 대한 이야기는 고소설 ‘박태보전’으로도 전해져 한문본, 국문본, 구활자본 등의 많은 이본으로 향유되면서 널리 읽혔다. 


서울특별시 동작구 본동에서 전해오는 ‘박태보 설화’는 백악산인(白岳山人)이 1955년 펴낸 ‘이조오백년 야사’에도 수록돼 있는 이야기로 박태보의 충성스러운 모습과 함께 박태보를 사모한 이웃집 심부름하던 여인의 마음을 결부해 흥미를 더하고 있다. 또한 박태보가 임종을 맞은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이 배경이 되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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