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97] 유응부 묘비명 "간밤에 부던 바람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07 08:50:43
  • 수정 2024-03-14 06:51:14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간밤에 불던 바람 눈서리 치단 말가 // 낙락장송 다 기울어 지단 말가 // 하물며 못다 핀 꽃이야 일러 무삼하리오."


유응부(兪應孚)[?~1456]는 1448년(세종 30) 첨지충추원사(僉知中樞院事) 관직을 시작으로 단종 대에는 의주목사(義州牧使), 평안좌도절제사(平安左道都節制使), 강계도호부사(江界都護府事), 세조 즉위후에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올랐다.


숙종대 사육신의 신원이 회복되면서, 1681년(숙종 7) 사육신의 묘소로 알려진 노량진 언덕에 사당이 건립됐다. 1691년(숙종 17) 12월에는 ‘민절사(愍節祠)’로 사액됐다가, 이듬해 1월 ‘민절서원(愍節書院)’으로 고쳤고 신도비가 세워졌다. 민절사는 현재의 사육신공원 내에 위치했으나 터만 남아있다. 이밖에 홍주 노운서원(魯雲書院), 연산 충곡서원(忠谷書院), 영월 창절사(彰節祠), 대구 낙빈서원(洛濱書院), 의성 충렬사(忠烈祠) 등에 제향됐다. 유응부는 병조판서에 추증됐고,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유응부는 효성이 지극해 집이 가난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는 준비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생활은 지극히 청렴해 벼슬이 재상급의 2품 관직에 있으면서도 거적자리로 방문을 가리웠고 고기 반찬 없는 밥을 먹었다.  또 때로는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니 처자가 이를 원망했는데, 그가 죽던 날 그 아내가 울면서 길가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살아서도 남에게 의지함이 없었는데 죽을 때는 큰 화를 입었구나고 했다.



활을 잘 쏘고 학식이 깊이 세종, 문종의 사랑을 받았다.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했고 재상급인 종 2품에 이르러서도 끼니를 거를 정도로 청렴결백했다.  무장이면서 학문에 뛰어나 절의파 학자로 알려졌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등이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유응부와 성승 등을 별운검으로 선정해 그 자리에서 세조를 살해하고 단종을 다시 세우기로 계획을 세웠다.


때마침 왕이 운검을 세우지 말도록 명령했고, 세자도 질병 때문에 왕을 따라 연회장에 나오지 아니했다.  유응부는 그래도 거사하려고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이 굳이 말리기를 지금 세자가 경복궁에 있고, 공의 운검을 쓰지 못하게 한 것은 하늘의 뜻이다.  만약 이곳 창덕궁에서 거사하더라도, 혹시 세자가 변고를 듣고서 경복궁에서 군사를 동원해 온다면 일의 성패를 알 수가 없으니 뒷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런 일은 빨리 할 수록 좋은데 만약 늦춘다면 누설될까 염려가 되오.  지금 세자가 비록 이곳에 오지 않았지만, 왕의 우익이 모두 이곳에 있으니 오늘 이들을 모두 죽이고 단종을 호위하고서 호령한다면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니 이런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것이오 했으나, 성삼문과 박팽년은 만전의 계책이 아니라고 하면서 굳이 말려서 일이 마침내 중지됐다.  이때 동모자의 한 사람인 김질이 일이 성공되지 못함을 알고서 급히 달려가 장인인 정창손에게 알리고 함께 반역을 고발해 성삼문 이하 주모자 6인이 모두 죄인으로 끌려와서 국문을 받았다.  너는 무슨 일을 하려고 하였느냐는 세조의 국문에 그는 명나라 사신을 초청 연회하는 날에 내가 한 자루 칼로써 족하를 죽여 폐위시키고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고 했으나, 불행히 간사한 놈에게 고발당했으니 응부는 다시 무슨 일을 가겠소. 족하는 빨리 나를 죽여주오.  하니 세조가 노해 꾸짖었다.


1456년(세조 2) 단종복위운동 당시 유응부는 결국 김질의 고변으로 계획이 실패하자 유응부 등 주요 연루자는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거열형(車裂刑)[마차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형벌]을 당한 뒤 3일 동안 저자거리에 효수됐다.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사육신의 무덤이 사육신공원으로 조성 관리되고 있다. 언제 어떤 연유로 노량진에 무덤이 조영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노량진이 사육신의 거열형 집행 후 효시 장소라는 설이 있고, 남효온(南孝溫)의 '추강집(秋江集)' '육신전(六臣傳)'에서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이개(李塏), 하위지(河緯地), 유성원(柳誠源), 유응부(兪應孚) 등 육신의 시신을 무명의 스님 혹은 김시습(金時習)이 수습해 노량진 언덕에 가묘로 조성했다는 설도 있다. 사육신공원에는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 6인 외에도 김문기(金文起)의 가묘가 추가됐다. 원래 성삼문의 부친인 성승(成勝)의 무덤이 있었다고 전한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