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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47] 김지대 위업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밀양 '남계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08 09:12:29
  • 수정 2022-12-08 09: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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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남계서원은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다.


남계서원은 쌍수당(雙修堂) 경내에 있고 1704년(숙종 30) 고려 중기에 평장사를 지낸 김지대(金之岱)의 위업을 기리기 위해 청도 고을 사림의 중론으로 창건했다. 처음에는 사당을 충효사(忠孝祠)라 하고 강당을 쌍수당이라 했다. 이것은 김지대가 그의 아버지를 대신해 종군하면서 지은 시에 ‘국환신지환 친우자소우 대친여보국 충효가쌍수(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고 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훼철됐으나 후손들이 강당을 보수하거나 중창해 사용해왔다. 1907년(순종 1) 강당을 새로 지었고 1954년 다시 후손들이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했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됐고 청도 김씨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김지대는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로, 첫 이름은 김중룡(金仲龍)이다. 1217년(고종 4) 3만 명의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했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했다.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김지대는 “나라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해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이를 보고 중요한 자리를 줬다. 1218년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돼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했다. 김지대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구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해, 이민(吏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다.



1240년(고종 27) 전라도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최만전(崔萬全)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를 보내 자신의 요구를 주장했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직접 최만전을 만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줬다.


또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통지를 묶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최만전은 원망했으나 김지대가 청렴하고 근엄해 감히 해치지를 못했다. 1243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최린(崔璘)과 함께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몽고에 사신으로 갔다. 1255년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돼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다.



1258년 몽고병이 침입하자,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를 대신해 김지대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했다. 이에 서북 40여 성이 안도했다 한다. 1260년(원종 1)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돼 과거를 주관했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郞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鰲山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에 봉해졌다. 김지대의 무덤은 청도에 있다. 시호는 영헌(英憲)이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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