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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08] 선사시대 이후 우수한 민족문화 살펴볼 수 있는 ‘고고미술실(2)’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2-12-23 13:05:12
  • 수정 2024-03-14 07: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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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3-2), 호석(護石)-12지신상(十二支神像)-문.무인석(文 武人石) 등이 배치된 정형화된 능묘(陵墓) 양식 등장

# 통일신라문화


통일신라문화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전부터 다져지기 시작했다. 묘제에 있어서는 돌방무덤[石室墳]이 널리 확산되고 왕실무덤의 경우 호석(護石), 12지신상(十二支神像), 문.무인석(文 武人石) 등이 배치된 정형화된 능묘(陵墓) 양식이 등장했다. 그리고 불교의 영향으로 귀족사회에 화장(火葬)이 유행하기도 했다. 



토기에 있어서도 각종 무늬를 찍어 눌러 표현한 도장무늬토기[印花文土器]가 널리 쓰이고, 불교와 화장이 유행함에 따라 뼈항아리[骨壺]나 사리합(舍利盒) 등의 장골용기(藏骨容器)도 발달했다. 또 시유도기(施釉陶器)도 제작되는 한편 중국 수당시대(隋唐時代) 자기의 영향을 받아 병모양토기[甁形土器]가 널리 사용됐다.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더욱 발달하는 기와와 전돌은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자극으로 한층 세련돼 갔다.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신문왕대(神文王代)의 체제정비 이후 국가가 혼란기에 접어드는 8세기 후반까지 정치적으로 안정됐고, 중국 당(唐)과 일본 및 서역과의 교류 등을 통해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했다.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와 전돌 



신라에서 기와는 6세기 후반무렵에 독자적인 양식이 출현해 통일이후 성당문화(盛唐文化)의 자극으로 여러 복합과정을 거치면서 새롭고 다양한 형태가 제작됐다.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이전에 거의 제작되지 않던 암막새와 사래기와 및 마루기와가 만들어지며, 무늬도 이전에 유행한 연꽃무늬[蓮花文]에 국한되지 않고 여러가지 다채로운 무늬가 채용됐다. 


연꽃무늬수막새[蓮花文圓瓦當]의 꽃잎은 홑꽃잎[單瓣]에서 겹꽃잎[複辦]으로 변화했고, 막새 테두리에는 구슬무늬[連珠文]가 장식됐다. 연꽃무늬 외에 보상화(寶相花)·인동(忍冬).당초(唐草) 등의 서화무늬[瑞花文]나 봉황.기린.사자 등의 서수무늬[瑞獸文], 그리고 가릉빈가(迦陵頻伽).보살(菩薩) 등의 불교 관련 무늬가 다양하게 베풀어진다. 


한편 궁궐이나 격이 높은 사찰에서는 녹유(綠釉) 기와나 각종 전돌[塼]이 사용되기도 했다. 전돌은 연꽃무늬나 보상화무늬가 베풀어진 방형 혹은 장방형의 바닥전돌이 주로 사용됐다.


화장의 유행과 뼈항아리 



삼국시대 후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하고, 이에 따라 화장한 뒤에 남은 뼈를 그릇[藏骨容器]에 담아 땅속에 묻는 화장묘(火葬墓)가 유행했다. 화장묘는 뼈항아리를 그대로 땅 속에 묻는 방법, 지하에 돌로 작은 덧널[石槨]을 짜고 그 안에 뼈항아리를 넣는 방법, 뼈항아리가 들어 있는 다듬은 돌상자[石函]를 지하에 묻는 방법 등으로 다양하다. 여기에 사용되는 용기로는 토기나 금속기가 이용됐다. 


보통 토기로 만든 것을 뼈항아리[骨壺]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뼈항아리는 일상용 토기를 그대로 이용했으나 통일신라시대에 들어와 화장 전용 뼈항아리가 등장했다. 전용 뼈항아리는 크기도 커지고 각종 화려한 도장무늬[印花文]로 덮혔고며, 뚜껑과 그릇을 붙들어 매는 고리가 부착되기도 했다. 또한 연유(鉛釉)로 발현시켜 만든 황록색.황갈색의 아름다운 시유도기(施釉陶器)도 사용됐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부터 뼈항아리는 화려한 무늬가 점차 사라지고 고리가 빈약해지는 등 퇴화하기 시작했다. 이외에도 수정이나 유리를 사용해 만든 사리병(舍利甁)과 이를 보관하는 각종재질의 사리합(舍利盒)이 만들어져 탑속에 안치되기도 했다.


고려-조선문화



고려시대의 미술은 통일신라시대의 미술을 계승하고 송(宋)의 세련된 미술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발달했고, 국가적인 불교의 장려로 승려들과 문벌귀족들에 의해 주도됐다. 불교미술에 있어서 불화(佛畵)가 전시대를 통틀어 가장 발달했고, 불상.석탑 등은 이전 시기에 비해 소박하고 지방색이 강한 형태로 변화했다. 


특히 상감청자(象嵌靑瓷)를 비롯한 고려청자나 동경(銅鏡) 등에 표현된 화려한 무늬와 섬세한 공예기법에서 고려 귀족미술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무신집권 이후 귀족세력의 몰락과 함께 귀족미술은 쇠퇴하고, 여기에 원(元)을 통해 들어온 화법이나 건축의 영향 등 양식에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됐다. 



고려시대에는 불교의 장려로 불화를 비롯한 불교미술이 발달하고, 청자나 은입사(銀入絲) 공예 등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미술문화가 발달하였다면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의 정착으로 양반위주의 미술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일상생활과 관련된 공예 건축 등의 실용적인 미술이 발달했다. 이러한 흐름은 문화생활을 향유하는 이들이 이전 시기보다 훨씬 확대됐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백자와 같은 도자공예와 나전칠기 등의 목칠공예가 더욱 발달하고, 향교.서원을 비롯한 성곽.궁궐.관아 등 실생활과 관련된 건축이 발달한다는 점도 특징적인 면이다. 또한 양반생활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일상생활을 반영한 미술작품도 많이 만들어졌다.


고려동경 



우리나라에서 청동거울[銅鏡]의 사용은 청동기시대의 다뉴경(多鈕鏡)으로부터 비롯됐지만 원삼국시대 이후로는 중국 청동거울의 영향을 꾸준히 받게 된다. 중국에서 청동거울의 사용은 기원전 약 2000년경으로 소급되고 시대별로 독특한 무늬를 표현했는데 수당대(隋唐代) 이후에는 실생활과 관련된 세련된 무늬가 선호됐다. 이러한 중국의 청동거울은 우리나라에도 시대별로 유입돼 발달된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정교한 형태의 청동거울이 제작됐다. 


우리나라에서 청동거울의 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고려시대로서 그 종류와 수량이 압도적으로 많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당경(唐鏡) 계통의 거울이 보이고 있으나 그 수가 적어서 일본에서 다량으로 출토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하지만 고려 동경은 출토지나 출토상태 또는 제작지가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복잡한 양상을 띤다. 고려 동경은 제작지역에 따라 중국 수입품과 국내 제작품으로 크게 구분되고, 국내제작품은 다시 제작방법에 따라 도안이나 의장의 일부분을 본따거나 변화시켜서 다시 만든 방제경(倣製鏡)과 그대로 틀을 떼어내 다시 부어낸 재주경(再鑄鏡)으로 나눌 수 있다. 거울의 형태는 원형(圓形), 방형(方形), 화형(花形), 능형(菱形) 등으로 정형화됐으나 손잡이가 달린 병경(柄鏡), 매달아 늘이는 현경(懸鏡) 등과 같은 색다른 거울도 많이 보인다.


금속공예 



고려시대에는 주조(鑄造)기술과 함께 입사(入絲)기법 등 금속공예기술이 발달하면서 합금(合金)이나 도금(鍍金), 혹은 청동기나 철기에 무늬를 새긴 다음 금 또는 은을 감입해 화려하게 장식한 제품들이 많이 사용됐다. 이 가운데 가장 세련된 감각을 보여주는 불교공예는 각종 의식구로부터 사찰의 일상용품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게 발달했다. 대표적인 불교공예품으로는 범종(梵鐘) 등의 범음구(梵音具), 향로(香爐).정병(淨甁) 등의 공양구(供養具), 그리고 사리용기(舍利容器)를 포함하는 사리구(舍利具)가 있다. 특히 사리구는 당대 최고의 기술과 재료가 이용되므로 이를 통해 고려의 공예수준을 엿볼 수 있다.


도자기


① 고려시대의 자기 자기(瓷器)는 점토로 만든 토기와는 달리 고령토(高嶺土, Kaolin)로 만들고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돌가루인 사토(砂土)로 만들었다 해 사기(砂器)라고도 불러왔다. 자기가 가장 먼저 제작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부터 중국 자기가 수입, 사용됐으나 신라말-고려초부터는 중국 절강성 월주요(越州窯)계 청자의 영향으로 본격적인 자기생산이 이뤄지게 됐다. 고려시대의 청자는 12세기 전반까지 문양이 없는 푸른 비색(翡色)의 순청자(純靑瓷)로 만들어졌다. 그 청자 빛의 아름다움을 중국인들은 “고려비색(高麗秘色)”이라 불렀다고 한다. 


순청자에도 양각(陽刻).음각(陰刻)으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이후 철 또는 구리 성분으로 장식을 하기도 했는데, 12세기 후반부터는 그릇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백토(白土)나 자토(赭土)를 메꾸어 유약을 입혀 구워낸 상감청자(象嵌靑瓷)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상감청자는 금속기의 표면에 금실이나 은실을 박아 넣어 무늬를 내던 기법을 고려 사람들이 청자에 응용한 것으로 고려 청자의 우수성을 세계에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이후 몽고의 침입과 왜구의 약탈이 심해지면서 제작여건이 어렵게 되자 청자는 질이 떨어지고 쇠퇴하다가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粉靑沙器)로 옮아가게 됐다. 


② 조선시대의 자기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분청자(粉靑瓷) 혹은 분청(粉靑)이라고도 하는데, 그릇의 표면에 각종 방법으로 백토를 분장하고 청자유를 씌워 구워낸 것으로 고려 청자의 후신(後身)과도 같은 존재이다. 15세기 세종(世宗) 때에 가장 다양하게 발전했고, 백토를 분장하는 방식에 따라 상감분청(象嵌粉靑), 인화분청(印花粉靑), 박지분청(剝地粉靑), 철화분청(鐵畵粉靑), 담금분청, 귀얄분청으로 구분된다. 


백자(白瓷)는 고려시대에도 일부 제작됐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본격화됐고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에는 분청사기가 소멸하고 백자만이 남아 발달하게 된다. 무늬가 없거나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음각.양각.투각(透刻)으로 무늬를 새긴 순백자(純白瓷)와 안료를 사용해 무늬를 그린 상감백자(象嵌白瓷), 철화백자(鐵畵白瓷), 동화백자(銅畵白瓷), 청화백자(靑畵白瓷) 등으로 구분된다. 아무런 무늬없이 백자의 유태(釉胎)만으로 은은한 유백색(乳白色)을 띤 15.16세기의 순백자는 소박하면서도 고고한 기풍을 자랑하고, 푸른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청화백자는 조선 후기에 더욱 발달했다.


양반생활



조선의 양반생활 양반(兩班)이라는 명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원래 관제상의 문.무반(文.武班)을 지칭했으나, 점차 지배신분층을 이르는 용어로 고정됐다. 조선시대의 양반은 학인(學人) 신분인 선비이거나 관인(官人)인 사대부(士大夫)였기 때문에 유교적인 직업 관념에 따라 학문에 주력해야만 했다. 그래서 학문수행과 배치되는 언행이나 사치스런 치장은 삼가야 할 덕목이 됐고, 이러한 양반문화의 일면은 양반집 사랑방의 모습 등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임진(壬辰).병자(丙子)의 양란(兩亂) 이후 재력 등을 통해 양반이 되는 사람이 급격히 늘어나고, 양반층 내에서도 유교적 덕목을 실천하려는 의지가 약해지면서 그들의 권위는 점차 잃어가게 된다. 이에 따라 재력과 권력을 소유한 이들은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면서 여기에서 배제된 양반들은 서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됐다. 이러한 현상은 한말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는데 양반이라는 칭호가 심지어는 ‘이양반’, ‘저양반’ 하는 대인칭(對人稱)으로까지 격하되기에 이르렀다.


낙랑문화



낙랑군(樂浪郡)은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기원전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4군 중의 하나로 기원후 313년 고구려에 의해 축출되기까지 오랫동안 존속하면서 주변세력에게 많은 영향을 줬다. 평양과 그 부근에는 이와 관련된 유적이 분포하고 있는데 군현지배의 거점이 됐던 낙랑토성을 비롯해 나무곽무덤[單葬木槨墓, 異穴合葬木槨墓]과 귀틀무덤[同穴合葬木槨墓], 그리고 벽돌무덤[塼築墓]이 무덤떼를 이루고 있다. 


낙랑무덤은 기본적으로 방대형(方臺形)의 봉분을 지니면서 대체로 중원문화의 요소를 많이 지니고 있다. 하지만 초기의 나무곽무덤단계에는 고조선 이래의 전통적인 세형동검문화 요소를 많이 간직하고 있으며, 귀틀무덤단계에 들어와서야 중원문화의 강한 영향으로 독특한 낙랑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출토유물도 초기에는 재래의 화분형토기와 세형동검 등의 전통적 청동기나 특이한 수레부속의 형태 등에서 중원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다가 점차 청동용기, 철제무기, 칠기 등 중원계 유물의 부장이 늘어나게 된다. 기원후 2세기 이래의 벽돌무덤단계에는 새로이 횡혈식(橫穴式) 묘제가 도입되고 명기(明器)가 부장되고 합장(合葬)이 더욱 일반화됐다. 부장품으로 실생활에서 사용되던 물품들은 극히 제한되고 대부분 특별히 제작된 소형의 명기가 부장됐다.


한경


한경의 변천 중국에서 청동거울[銅鏡]은 상대(商代)에 처음 등장해 한대(漢代)에 들어와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유리거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청대(淸代) 이전까지 계속 사용된다. 중국 청동거울은 꼭지[鈕]가 하나이고 물상문양을 베푼 볼록거울이 기본적인 형태인데 한반도에서는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된 서북한지역에서 주로 발견되고, 영남지역의 무덤에서도 일부 출토되고 있다. 



한경(漢鏡)은 문양과 명문이 다양하고 시기적인 변화에 민감해 편년에 크게 활용되고 있는데, 크게 전한경(前漢鏡)과 후한경(後漢鏡)으로 나눠진다. 전한대에는 초엽문경(草葉文鏡), 성운문경(星雲文鏡), 훼룡문경(虺龍文鏡)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등이 발달했는데, 초엽문경, 성운문경, 훼룡문경은 장식무늬에 의해, 일광경·소명경은 ‘일광(日光)’이나 ‘소명(昭明)’이라는 명문구절에 의해 붙여진 이름이다. 


후한대에는 방격규구경(方格規矩鏡)과 연호문경(連弧文鏡)이 본격적으로 제작돼 낙랑지역으로 유입됐다. 또한 이때에는 수문경(獸文鏡), 반룡문경(盤龍文鏡), 신수문경(神獸文鏡) 등 새로운 문양의 동경이 등장해 위진대(魏晋代)까지 유행했는데. 문양이 선새김식[細線式]으로 표현된 것 이외에 돋을새김식[浮彫式]으로 표현된 것이 새로이 등장했다. 


한경에 들어있는 명문(銘文)에는 제작연대나 제작처를 비롯해서 사용자의 부귀나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구(吉祥句)가 많다. 화장도구로도 사용됐지만, 그 보다는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위신재(威信材, Prestige Goods)의 성격이 강했다. 이러한 한경은 중원과 변방지역 사이의 교역에서 중요한 정치적 사여물이나 경제적 교역물의 하나로 기능했다.


장신과 장식


낙랑의 장신구 낙랑지역에서 발견되는 장신구는 주로 무덤에서 출토되고 중국계통의 것이 많다. 금속제 장신구는 주로 팔찌와 반지에서 보이는데 이때부터 금속제 장신구의 착용습속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팔찌와 반지는 은제가 주종을 이루고 금제, 금동제 등도 출토되고 있다. 출토상황으로 보아 남녀구별없이 착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곡봉형(曲奉形)의 허리띠고리[帶鉤]도 확인된다. 비금속 장신구로는 귀걸이, 목걸이 등이 있는데 유리제가 대부분이다. 유리제 장신구의 제작 역시 이때부터 본격화됐고 수정, 마노, 호박 등도 재료로 이용됐다. 


귀걸이는 녹색과 청색을 띠는 것이 많고 장구모양의 장식에 실고리를 꿰어 드리개와 연결한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목걸이는 감청색과 주홍색을 띠는 납-바륨계의 유리제 환옥(丸玉)이 많지만 나중에는 수정제 다면옥(多面玉)이나 금박유리구슬(金箔琉璃玉)로 만든 것도 종종 나타나고 있다.


거여구



낙랑의 거여구 수레에 사용되는 부속구를 거여구(車輿具)라 하는데 한마리 혹은 두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의 부속구가 이에 해당된다, 중국에서는 수레 일체를 부장하는 예가 많이 있으나 서북한지역의 낙랑에서는 마차의 착장물로 보이는 청동제품이 주로 출토되고 있다. ‘T’자형의 수레채 양 끝에 붙어 고삐가 늘어지지 않게 하는 고리로 보이는 권총형동기[拳銃形銅器, 車衡頭], 수레난간이나 수레멍에의 끝을 장식하는 삿갓형동기[笠形銅器], 수레바퀴의 양축 끝에 끼워 바퀴를 고정시키는 역할을 하는 수레굴대끝[車軸頭], 일산(日傘) 살대의 끝을 장식하는 일산살꼭지[蓋弓帽], 정확한 용도를 모르지만 수레부속품으로 보이는 을자형동기(乙字形銅器) 등으로 구성된다. 


나무곽무덤 단계부터 위세품(威勢品)으로서 무덤속에 부장되다가 귀틀무덤단계에 빠르면 수레굴대끝이나 일산살꼭지 등의 몇몇 기종으로 부장이 제한되고, 이후 벽돌무덤 단계에 들어와 소형으로 명기화(明器化)된다. 권총형동기, 삿갓형동기, 을자형동기 등은 중국 중원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들이다.


토기와 기와 



① 낙랑토기 낙랑토기는 낙랑군(樂浪郡)이 설치됐던 시기에 그 지역에서 출토된 모든 토기를 일컫는 말이다. 낙랑토기는 크게 화분형토기(花盆形土器)와 목항아리[壺]로 나눌 수 있다. 화분형토기는 곱돌[滑石]가루가 많이 섞여있는 점토를 빚어 틀에 포(布)를 대고 찍어낸 깊은바리모양토기[深鉢形土器]인데 낙랑군 설치 이전부터 만들어진 일종의 변질무문토기이다. 이른 시기의 것은 바닥이 축약된 납작한 모양을 하고 있으나 귀틀무덤 단계를 지나면서 밖으로 살짝 벌어진 낮은 굽이 나타나는 점이 특징이다. 


목항아리는 분류 기준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붙여지고 있다. 보통 아가리가 완전히 벌어지고 목이 짧은 회색항아리를 말하며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소성돼 약간 무른 편이다. 둥근바닥[圓底] 혹은 납작바닥[平底]의 짧은목항아리[短頸壺]가 많고 이를 북한에서는 ‘배부른단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 짧은목항아리들 가운데 태토에 모래알갱이[沙粒]가 많이 섞이고 전체적으로 몸통의 크기가 커져 구형(球形)에 가까워진 백색항아리를 따로 옹(甕)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② 낙랑기와 막새기와나 전돌의 존재는 관청이나 궁궐과 같은 고급건축물의 축조를 암시하는 것으로 중국에서는 한대(漢代) 이후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낙랑 수막새는 이러한 한대 수막새의 직,간접적인 영향으로 만들어지는데 보통 막새 중앙을 중심으로 분할된 4개의 구역에 문자무늬[銘文]나 구름무늬[卷雲文]를 대칭되게 베풀어 놓은 수막새가 주종을 이룬다.


장옥


장옥(葬玉)은 사체(死體)에 대한 주술적인 풍습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죽은 이를 위해 무덤에 부장하던 옥제품을 일컫는다. 옥에 신비한 힘이 있다고 믿었던 중국인들은 옥을 특정한 모양으로 가공해 죽은이의 무덤에 부장하는 습속이 있었는데 이로부터 장옥이 비롯된 것이라 생각된다. 즉, 장옥으로 사체의 구멍을 막거나 여러 곳에 배치해 죽은 이의 영혼을 악귀로부터 지켜주는 동시에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다. 


장옥은 기능에 따라 여러가지로 분류되는데 옥매미[玉蟬]는 입을 막는 함옥(含玉)으로 부활을 상징하며, 눈에 덮는 안옥(眼玉)은 나뭇잎 모양을 끈으로 연결해 안경처럼 매었다. 또 입과 함께 신체의 구멍을 막는 색옥(塞玉)은 육체에서 생명의 근원인 정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는 역할을 했다. 손에 쥐는 옥돼지[玉豚]는 내세에 먹을 양식을 상징한다고도 하며, 가슴에 얹는 원반형의 옥벽(玉璧)은 죽은 이를 지켜주는 상징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한편 장옥과는 조금 다르지만 무덤에 부장했던 여러 옥제품들이 있었다. 이러한 옥기(玉器)들은 주로 경옥(硬玉)과 연옥(軟玉)으로 만들어 보석처럼 다뤄져 제사에 쓰이거나 치레거리로 사용되기도 했다. 각종 기물(器物)이나 새.용.호랑이.양.소.개.개구리.거북.물고기 등 신물(神物)로 여기던 동물 모양을 본뜬 것 등 많은 것이 알려져 있고, 그 형체에서 옥질(玉質)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천이 있었다.


수당도용 


고대로부터 중국에서 제사용, 부장용으로서 목제(木製), 도제(陶製), 금속제의 인형 혹은 동물형상을 만들어 ‘용(俑)’이라고 불렀다. ‘용’을 처음 만든 것은 신석기시대의 채도문화인(彩陶文化人)들인데 이들은 용을 완구(玩具)로 사용했다. 그후 은대(殷代)에 들어와 순장자(殉葬者)들 대신 부장품으로 사용되다가 전국시대(戰國時代) 이후부터는 그 의미가 바뀌어 사자(死者)의 생존시 생활을 재현하는 부장품으로 이용됐다. 수당시대(隋唐時代)에 들어와서는 문.무관, 부인, 무인(舞人), 시종(侍從), 동자(童子) 등 보다 다양하고 세련된 도용(陶俑)이 만들어졌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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