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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구석 구석 145] 양녕대군의 사당과 묘소 ‘지덕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2-12-28 08:50:36
  • 수정 2024-04-10 10: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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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동작구 상도동 65-42의 국사봉 북쪽에 있는 조선 태종의 장자이자 세종의 맏형인 양녕대군(1394-1462)의 사당과 묘소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돼 있다. 


이 묘소는 양녕대군과 정경부인 광산 김씨를 합장한 것으로서 1만1888평의 규모로 이뤄져 있고, 사당의 건평은 9평이다.


앙녕대군의 이름은 재(禔)이고, 자는 후백, 시호는 강정으로, 세종과 함께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이다. 태종 3년(1403)에 왕세자로 책봉됐고, 태종 7년에 광산김씨를 맞아 혼인했다. 그리고(1418년 6월에 문무백관들이 세자의 실덕을 들어폐세자)를 주청하게 되자 세자는 폐위되어 양녕대군으로 강봉되고 빈은 수성부부인이 됐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됐다. 이때부터 양녕대군은 전국 방방곡곡을 유랑해 풍류를 즐기면서 일생을 마쳤고 세종과의 우애는 지극했다. 그는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썼다 한다. 




지덕사는 숙종 원년(1675)에 양녕대군의 외손이 되어 우의정 허목이 상감에게 아뢰어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등용토록 하니, 숙종이 봉사자를 하문하고 사손을 불러 벼슬을 제수한 후 유사에게 명하여 대군의 사당을 남대문 밖에 세우게 했다. 다음 해 사당집이 이룩되면서 지덕사로 명칭했고 허목이 지덕사에 대한 사적을 지어 현판에 써서 걸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양녕대군은 우리 임금님의 맏아들이니 처음에 세자로 책립되다. ‘야사’에 실려 있기를 태종 7년 정해해에 세자 제를 명나라 서울에 파견했더니 황제가 특별히 대우하며 용상 가까이 오르도록 해서 우리 세자의 손을 잡고 그대는 정말로 현명한 왕자라고 칭찬하였다. 귀국의 길에 곡부를 지나다가 공자 사당에 배알하다. 셋째 아우님 충녕대군의 타고난 성덕이 계셔 백성들의 마음이 쏠리는 것을 세자가 알아채시고 일부러 광인 행사를 부려 세자의 자리를 내놓으려 하였다. 급기야 태종 18년에 3공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세자 폐위할 것을 주청하므로 충녕대군으로 세자를 삼으니 이분이 바로 세종대왕이시다. 따라서 양녕대군으로 강봉된 제를 광주로 내보내니 그 당시 사람들이 주나라 태백으로 여겼다. 언제든지 사냥놀이와 주색에 빠졌을 뿐 딴 일을 저지르지 않더니, 세종께서 왕위에 오르신 후로 무척 존경하시와 대군의 뜻 두신 바를 모두 맞추어 드리고 그 아들을 순원군으로 봉하다. 대군께서 천수로 돌아가시다. 금상 원년에 우의정 허목이 상감께서 봉사자를 하문하시고 사손을 불러 벼슬을 제수하신 후 유사에게 명하사 대군의 사당을 남대문 밖에 세우게 하셨더니 다음 해에 사당집이 이룩되매 지덕사로 명칭하다. 금상 2년 병진해 7월 상순에 외후손 대광보국 승록대부의정부 우의정겸 경연사감 춘추관사 허목은 기록하노라.




이때 건축된 지덕사는 중구 도동 옛 남묘 건너편에 위치했던 바 현재의 남산 기슭 서울 지방 병무청 자리이다. 


‘지덕’이란 이름은 ‘논어’ 권8 태백편 ”선생님 말씀하시다. 태백(泰伯)은 지극한 덕(至德)을 갖추었다고 이를 만하더구나. 세 번씩이나 천하를 사양하였는데도, 백성들이 알지 못하여 칭송할 줄조차 몰랐으니“란 구절의 ‘태백은 지덕이다’ 칭한 공자의 말에서 연유됐다. 


이 고사는 고대 중국에 있어서 주나라 대왕 때에 상나라의 도가 쇠약해지고 주나라가 날로 강대해질 때의 일이다. 대왕의 아들이 셋 있는데, 대왕이 셋째인 계략에게 왕위를 계승시켜천하를 도모하고자 하매 장자인 태백과 차자인 우중이 형만의 땅으로 몸을 숨겨 계력으로 하여금 왕위를 이을 수 있게 했다. 이러한 고사와 양녕.효령대군이 충녕이 왕위에 오르게 하고자 방탕과 탁불을 칭한 일을 비교해 충녕의 행적을 태백의 지덕과 같이 명명한 것이다.





지덕사가 건립된 후 숙종 33년 및 사우의 중수 및 조용히 행해졌고 영조 13년에 어필 선액에 논의가 있었던 바 가묘에 사액함은 전례가 없었던 것으로 사액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런데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 때 양녕대군의 후손인 이지광이 사당을 지키고 있었는데 가세가 빈한해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사당 울타리 안에 큰 홰나무가 무성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지나가는 관상객이 이 홰나무를 베면 운이 트일 것이니 베어버리라고 권유했다. 이에 이지광은 이 홰나무를 베었다. 때는 영조 33년에 임금이 남관왕묘에 행차하였다가 맞은 편에 있는 사당을 보고 누구의 집인가를 물어 비로소 양녕대군의 사당임을 알고, 그 후손인 이지광을 그 자리에 불러 초임직을 내리는 동시에 퇴락한 사당을 보수케 했고, 궁에 돌아와 친히 지덕사의 제문을 짓고 치제했다. 그 후로도 영조 36년, 41년, 46년 등에 치체케 하고 자손들을 조용했다.




이후 1757년(영조 33) 양녕대군의 후손 이지광(李趾光)으로 하여 사당을 보수하게 했고, 영조(英祖)가 직접 지은 제문(祭文)과 제사에 필요한 제물(祭物)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1789년(정조 13)에는 정조가 사액(賜額)헸고, 직접 지은 ‘지덕사기(至德祠記)’를 하사했다. 양녕대군의 사당인 지덕사는 1912년 양녕대군 이제 묘역으로 이건됐다. 지덕사는 낮은 화강석 기단 위에 세운 전퇴를 가진 3간집의 사당과 제사당.제기고 등 3동의 건물과 소슬 3문으로 이뤄져 있고, 사당의 후면에는 묘소 앞에 묘비와 장명등이 있고, 4기의 문인석이 좌우에 2구씩 서 있다. 


묘비는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는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져버려 현재 묘소 옆에 놓여져 있고 1915년에 다시 비석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양녕대군은 유언으로 호화로운 예장을 받지 말고 묘비.상석도 만들지 말며 검소하게 하라 했는데, 7대손 만과 8재손 성황이 묘소 앞에 석물들을 세웠다. 그때 세운 묘비는 1910년 경술국치 전날인 8월 28일 밤 난데없는 벼락소리와 함께 갈라져버려 현재 묘소 옆에 놓여져 있고 1915년에 다시 비석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사당 내에는 세조 어제(御製)의 금자현액과 조선 후기의 문신인 허목(1595-1682)의 휘호로 된 지덕사기, 정조 어제 지덕사기, 양녕대군 친필로 쓴 소동파의 후적벽부.팔곡병풍.목각판 및 대군의 필적인 숭례문의 탑본 등이 보관돼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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