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서원 160] 이준민 등 4인 배향한 '임천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06 10:41:38
  • 수정 2023-01-07 20:46:41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임천서원은 진주 금산면 가방리에 있는 서원으로 세칭 진주 오현(五賢)서원 이라고 불린다.


1702년(肅宗 壬午)에 유림의 공의로 창건(創建)해 1719년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 ) 성재(誠齋) 강응태(姜應台),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창주(滄洲) 하징(河憕), 조은(釣隱) 한몽삼(韓夢參) 선생의 위패를 봉안했다. 1759년에 유림들이 상소를 올려 사액을 청했다. 이 상소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오현의 행장과 봉안 일시, 서원의 위치 등을 올리라고 명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사액을 받지는 못했다. 


그 후 1868년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돼 방치돼오다 1935년 서원이 있던 자리 우측에 임천서당을 다시 건립해 지금껏 전해오고 있다. 임천서원 편액 글씨는 부사 성여신 선생의 친필로 1623년 부사선생이 77세때 손수 쓴 '천자문'에서 집자한 것이다. 임천서원이란 편액 오른쪽 초서는 天啓(1623년) 癸亥 春 浮査 야老書라는 글자이다.



# 이준민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자수(子修), 호는 신암(新菴). 건(楗)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윤(貞胤)이고, 아버지는 참봉 공량(公亮)이며, 어머니는 조언형(曺彦亨)의 딸이다. 영남의 대학자인 조식(曺植)이 그의 외숙이다. 1549년(명종 4)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홍문관정자에 제수되고, 1554년 사간원정언 때 당시의 부허한 사장(詞章) 중심의 문풍을 경계하고, 경학을 장려해 덕행을 권장할 것을 상소했다. 


그 뒤 1556년 황해도사로서 중시에 병과로 급제, 홍문관수찬에 올랐다. 이듬해 사헌부지평이 되어서는 김진(金鎭)·이명(李銘) 등과 함께 당시의 권신인 이량(李樑)에 의부해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축출하니, 사람들이 휼목(譎目)이라 했다. 반대파의 미움을 사서 영월군수로 좌천됐고, 이어 1561년 강릉대도호부사가 됐다. 그러나 관할구역인 대창역(大昌驛)에서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하는 사건이 일어나 책임을 지고 면직됐다. 그 뒤 세자시강원문학으로서 세자 교육에 힘쓰다가 강계부사를 지냈다. 선조가 즉위하자 승정원으로 자리를 옮겨 좌승지를 역임하고, 1570년(선조 3)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오랫동안 국방을 담당했다. 


그 뒤 경기관찰사.공조참판을 거쳐 1575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가 북방을 잘 다스렸다. 그 뒤 내직으로 옮겨 병조판서.지의금부사.의정부좌참찬을 지냈다. 특히 국방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일을 잘 처리했다 한다. 이 때 조정의 공론이 분열해 동인.서인의 붕당이 일어나자 이를 매우 염려했고, 당론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를 존경했다. 1584년 이이가 사망하자, 당인들이 그를 탄핵해 공격하니, 이에 맞서 강경하게 불가함을 주장하는 의기를 보였다. 천품이 강직해 사리에 닿지 않으면 승복하지 않았다. 항상 검소했고, 자제 교육에도 매우 엄했다 한다. 붕당의 논쟁이 심해지자, 병을 핑계로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시호는 효익(孝翼)이다.

 


# 강응태(姜應台, 1495~155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대림(大臨), 호는 성재(誠齋). 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안중(安重)이고, 아버지는 현감 관(琯)이며, 어머니는 곡부공씨(曲阜孔氏)이다. 1532년(중종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그 이듬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541년부터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을 역임했고, 1544년 지평으로서 상계를 제때 잘하지 못한다 해 이조정랑으로 전직됐다. 


1546(명종 1) 승문원교리.사섬시첨정.한성부서윤.봉상시첨정을 거쳐, 1547년에 사간원헌납이 됐다. 그뒤 전적.소격서령.예빈시첨정.군기시부정을 역임한 뒤 순천도호부사로 전임됐다. 1549년 홍문관부수찬으로 다시 기용됐으나 병으로 부임하지 못했고, 1551년 밀양도호부사 겸 대구진병마첨절제사로 보임돼 이듬해 재직중에 죽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했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순후장자(醇厚長者)라는 칭송을 받았다.

 

# 성여신(成汝信, 1546~163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공실(公實), 호는 부사야로(浮査野老)·부사(浮査). 홍문관교리 안중(安重)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호조참판 일휴(日休)이고, 아버지는 경기전봉사(慶基殿奉事) 두년(斗年)이다. 어머니는 초계변씨(草溪卞氏)로 충순위(忠順衛) 원종(元宗)의 딸이다.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1553년 8세에 신점(申霑)에게 글을 배웠다. 일찍부터 문명을 떨치다가 1609년(광해군 1) 64세로 사마양시에 합격했다. 



그는 불세출의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는데, 스스로 호를 ‘부사야로(浮査野老)’라 했다. 그는 특히 불교배척에 힘썼고, 임진왜란 이후 투박하고 문란해져가는 풍속을 바로잡기 위해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동약(退溪洞約)을 본떠 이를 지방에 심는 데 힘썼다. 진주의 임천서원(臨川書院)과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부사집 浮査集'이 있다.

 


# 한몽삼(韓夢參, 1589~1662)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변(子變), 호는 조은(釣隱) 또는 적암은인(適巖隱人). 함안 출신. 아버지는 참봉 계(誡)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주(鑄)의 딸이다. 박제인(朴齊仁)·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형 몽룡(夢龍) 밑에서 학업에 정진했다.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급제했고, 1639년(인조 17) 학행으로 천거돼 자여도찰방(自如道察訪)에 임명됐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뒤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일으켜 활약했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관직을 멀리하고 산수가 수려한 파릉군(巴陵郡)의 서계(西溪)가에 은거했다. 1702년(숙종 28) 임천서원(臨川書院)에 배향되고, 1729년(영조 5) 사헌부집의에 증직됐다. 저서로는 '조은집' 4권이 있다.

 

# 하증(河憕, 1563~162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평(子平), 호는 창주(滄州)이다. 진주 내당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성균생원인 하위보(河魏寶)이고 어머니는 참의 이윤(李綸)의 딸이다. 숙부 하국보(河國寶)에게 입양했다. 진주 단지동에 살았다. 기질이 순후하고 지조가 독실해 자기를 다스리기를 매우 엄하게 했고 독서에 충실해 어려운 곳은 반드시 질의와 논란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양모(養母)인 강씨가 절개를 지켜 죽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하증 자신이 왜군에게 사로잡혀 끌려갔으나 21년만에 절개를 온전히 지키고 돌아왔다. 당시 부사(浮査) 성여신(成汝信), 겸재(謙齋) 하홍도(河弘度) 등 여러 현인들이 그를 중국 한나라 소무(蘇武)에 견주어 칭송했다. 


또한 조카 하지상이 6세의 나이로 적진 중에 끌려가자 힘써 구해냈고, 아우 하변(河忭)이 적진에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하자 부산을 세 번이나 왕복하면서 구해냈다. 그때 일이 항상 응어리져서 평생토록 일본이 있는 동쪽을 향해 앉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사진-윤정숙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