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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16] 옛날 큰 사당이 있었던 전해지는 마을 ‘사당동’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15 08:01:21
  • 수정 2024-03-14 07: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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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루프탑 복합문화공간 '아트나인&잇나인'에서 바라본 사당동 전경 [박광준 기자] 사당동 동명의 유래는 옛날 큰 사당이 있었던 마을이라 해 붙여진 이름이다. 


사당동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사당리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경기도 구역획정에 따라 당시 자연부락이었던 농마을.동산마을.양짓말 등을 병합해 사당이 있던 마을의 이름을 따서 사당리라 하고 시흥군 신동면에 소속시켰다. 


그 후 변동없이 내려오다가 1963년 1월 1일 법률 제1172호에 의한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 사당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당동의 현 위치는 동은 관악구 봉천동과 접해 있고 서는 서초구 방배동과 연(連)해 있다. 남은 관악구 신림동과 접해 있고 북은 동작동과 이웃하고 있다. 


# 사당동의 자연부락 명칭과 자연지명


사당동 먹자골목‘안말’은 현재 예술인마을 부근인 사당동 1051-1050번지 일대로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붙여진 이름이고, ‘군산터’는 옛날 군산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들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 1동 삼성사우촌과 남성중학교 일대이다. 


옛날 작은 동산이 있다 하여 붙여진 ‘동산말’은 나씨가 5-6가구 정착해 살았다고 하는데 현재 사당동 1038번지 관악시장 일대이고, ‘양지마을’은 현재 사당 3동 219번지 일대로 서해가 잘드는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양지마을이라 부른다. 또 ‘양춘말’은 옛날에 논이 있었다는 마을로 현재 사당 3동주민센터 일대이고, ‘거늠말’은 현재 사당 3동 219-7호 일대이다. 


‘능내’는 현 사당동 239-241번지 묘가 있는 지역으로 조선시대 수죽 정창연, 임당 정유길, 재곡 정광성의 묘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고, ‘가마니촌’은 가마니를 덮어 놓고 어렵게 살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 사당동 산 22번지 일대로 대부분 무허가 거주민들이었다. 현재는 1980년 재개발사업을 시행해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동래정씨 문중의 묘또 ‘벌명당’은 사당동 동래정씨 문중의 묘가 있는 지역으로, 옛날 나라에서 묘자리를 정하려고 지관을 시켜 지형을 살피게 했는데, 지관이 이 지역이 명당임을 알고 임금에게 고하려 하자, 당시 영의정이었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이를 알아차리고 그에게 다른 곳을 찾도록 했다. 지관은 영의정에게 자기가 동재기나루를 건널 무렵 이곳을 파보라고 했다. 그가 말한대로 땅을 파보니, 커다란 벌들이 수없이 나와 지관에게 날아가 그를 쏘려 하자 독을 뒤집어썼다. 벌들이 독에다 침을 놓으니 독이 깨지면서 벌이 죽었다 한다. 그 뒤 영의정이 죽어 그 자리에 묘를 쓴 뒤 9대로 정승이 나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고개이름으로 ‘까치고개’는 옛날 이곳에 수목이 우거져 까치가 많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고, ‘원당고개’는 조선시대 동래정씨 문중과 전주이씨 문중이 사당 고을을 서로 자기 땅이라 하여 소송이 붙자 당시 이 고을 원님이 고개에 앉아서 각각 고개의 반씩을 소유토록 판결을 내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당동 사거리 지하철 사당역 일대 '도당터'‘도당터’는 사당동 사거리 지하철 사당역 일대에 있었던 느티나무를 동신으로 받들고 해마다 도당할아버지.도당할머니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도당제를 지냈던 곳으로 도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70년대 초까지도 도당제를 지냈으나 도로가 생기면서 느티나무도 뽑히고,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화상은 남현동의 관음사로 옮겼다. 해마다 음력 10월 초순에 원주민들이 이 화상에 치제했다고 한다. 


남사초등학교 위쪽에 있는 ‘구루물 빨래터’는 구름만 끼어도 물이 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1960년대 초까지 빨래터로 이용했고, ‘소댓물’은 이곳에 300여 평 가까운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물은 겨울이 되어도 얼지 않아 목욕과 빨래터로 이용됐다고 한다.


조선 시대 때 사당동 주민들은 농업을 주업으로 했으나, 현재는 대부분 회사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 동래정씨 문중이 세거하고 있었다. 현재도 정씨 문중의 고실을 비롯해 임당.수죽.제곡 등 삼대의 신도비가 이 마을에 세워져 있다.


서울 동래정씨 임당공파 묘역 중 임당정 신도비 비각 우측면

임당 정유길(1515-1588)의 신도비는 사당동 산 32의 2에 위치하고 있다. 이 비는 조선시대 석비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돼 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에 지정됐다. 이 비문은 청음 김상헌이 찬(撰)했고, 두전은 인조 때 한성부윤.우참찬 등을 역임한 죽소 김광욱의 솜씨이고, 글씨는 참찬을 지낸 죽남 오준이 썼다.


수죽 정창연(1552-1636)의 신도비는 시당동 산32-2번지에 있다. 이 비는 17세기경 고비의 전형적인 작품으로 뛰어난 대표작에 속해 1984년 11월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됐다. 비문은 인조때의 명신 백강 이경여가 찬했고, 머리글자인 두전은 한성부윤을 지낸 바 있는 동강 여이징의 솜씨이고, 글씨는 효종 때 영의정이었던 만사 심지원이 썼다. 


제곡 정광성(1576-1655)의 신도비도 이곳에 있고, 198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3호로 지정됐다. 효종 8년(1657)에 건립된 이 비의 비문은 효종 때 문신인 백헌 이경석이 찬하고 글씨도 썼고, 두전은 효종.숙종 때 문신인 서곡 이정영이 썼다. 


총신대학교 정문이밖에도 정광성의 아들인 익헌공 정태화의 묘소가 있다. 양파 정태화는 현종 대 대동법을 실시한 바 있고, 영의정에 재직 중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하지 않다가 37번의 청원 끝에 겨우 허락을 얻어 1671년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는 현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현재 사당동 229-6번지에는 재실이 있는데, 이 재실은 1967년에 정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정면 중앙기둥에는 ‘동래정씨 임당공파재각’이라는 낡은 나무간판이 걸려 있다.


한편, 사당동 180-1에는 관우의 사당인 ‘남묘’가 있다. 이 남묘는 원래 용산구 도동 1가 9번지에 있었는데 1913년에 총독부에서 중국인.일본인.한국인에게 개인 경매를 붙여 자금의 관성묘유지재단이사장인 서동진의 아버지 서태성이 사들여 개인소유로 관리하게 됐다.


사당동에 있는 교육기관으로 대학은 사당동 산 31-3번지에 있는 총신대학이 있다. 1965년에 현재의 이곳은 1만8천평의 교지를 확보하고 884평의 교사를 신축한 다음, 1967년 6월 2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인가를 얻고 예과 2년을 대학부 4년제로 개정했다.


중.고등학교로는 동작고등학교, 신동신정보산업고등학교, 상도중학교, 남성중학교, 사당중학교, 신동신중학교가 있고, 초등학교로는 심일초등학교, 남성초등학교, 행림초등학교, 동작초등학교가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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