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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66] 송준필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원계서원(遠溪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18 09: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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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원계서원은 경상북도 김천시 부곡동에 송준필(宋浚弼)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서원이다.


송준필은 파리장서사건으로 인해 옥고를 치룬 뒤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 1933년 부곡동 음지마을로 은거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원호재’라 이름 짓고, 문 앞에 ‘황학동천백운산방(黃鶴洞天白雲山房)’이라는 글을 써 붙였다. 이곳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키 위해 1942년 원계정사를 세웠다.



이채진(왜관), 윤한오(예천])같은 제자들이 경상도 심지어 전라도.충청도에서 공부하러 옴에 따라, 건물 4칸을 증축했다. 그가 75세의 일기로 별세한 이후 그의 제자들과 유림들이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68년 원계서원을 낙성했다. 강당의 이름을 정학당(政學堂)이라 불렀다. 이듬해 서원 뒤편에 사당을 낙성하고 숭덕사(崇德祠)라 이름했다. 사당은 옛 원계정사 터에 세워졌다. 그 뒤 1971년에 이곳에 송준필의 위패를 봉안했다. 또 그 해 동재(일성재)와 서재(제양당), 문루(직방문)가 낙성됐다.

    

송준필은 이진상(李震相)의 강학에 참석했고, 18세 때부터 장복추(張福樞)의 문하에서 배웠다. 뒤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배우기도 해, 당시 영남의 석학들과 폭넓게 교제하면서 수학했다. 그는 이황의 '성학십도(聖學十圖)' 제6도를 심화시킨 '심통성정삼도발휘(心統性情三圖發揮)'(1928)에서 송의 성리설과 퇴계 학통의 성리설을 정연하게 체계화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성리설을 정립했다.


따라서 이 저술은 20세기 초에 정리된 성리학설의 일대 집약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에 관한 저서로 '대산서절요(大山書節要)' '사물잠집설(四勿箴集說)' 등이 있고, 예학에 관한 책으로 '육례수략(六禮修略)'이 있다. 또한 수양론 및 윤리서로 '오선생미언(五先生微言)' '정학입문(正學入門)'이 있고, 역사서로 '속속자치통감강목(續續資治通鑑綱目)'이 있다. 



문집으로는 '공산집(恭山集)' 등 비중 높은 역작을 많이 남겼다. 1919년 유림의 독립 청원 운동인 파리 장서 사건에서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 등과 함께 활동함으로써 의리와 민족의식을 발휘했다.

    

원계서원은 약 300평의 땅에 전학후묘(前學後廟)라는 전형적인 서원 건축 양식으로 세워졌다. 정학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일성재와 제양당, 숭덕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설립됐다. 숭덕사의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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