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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0] 독립문 세우고, 독립협회 세운 '서재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1 09: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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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서재필 徐載弼, 1864.01.07 ~1951.01.05. 전라남도 보성, 대한민국장 1977


“독립은 선전만으로 될 수 없고 허장성세만으로 될 수 없다. 독립의 가장 근본적 요소는 각성한 민중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민중교양에 총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2천만 민중이 총궐기하여 독립을 부르짖게 되면 한국의 독립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 1921년 독립운동의 진행방침을 건의한 선생의 장서(長書) 중에서 -


# 10대 때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와 알게 돼


서재필(徐載弼, 1864. 1. 7 ~ 1951. 1. 5)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부친 서광언(徐光彦)과 모친 서주(星州)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齊)이다. 당시 선생의 부친은 동복군(同福郡 : 보성군의 옛 지명)의 군수였고, 모친의 친정 또한 여기에 있었다. 때문에 선생은 외가가 있던 가천리에서 태어났지만, 곧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 본가로 보내져 성장했다. 그러다가 인근 대덕군에 살던 근친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됐다.


선생은 일곱 살 무렵 서울로 보내져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과거를 대비해 한학을 수학했다. 김성근은 1862년 문과에 급제한 뒤 당시 판서 직에 있었고, 그의 집에는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金玉均)이 일가로서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그 집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15세 연상인 김옥균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됐고, 또 그를 통해 박영효(朴泳孝)와도 알게 됐다.


이들과 함께 초기 개화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광범(徐光範)은 그의 5촌 당숙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서재필이 청년시절 일본에서 촬영한 사진특히 1882년 3월 선생이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해 서적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들과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심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문과에 급제한 양반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동경의 호산(戶山)육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에서 선생은 14명의 한국청년들과 함께 1년여 동안 근대식 군사교육과 지리학 등 신학문을 익혔다. 비록 짧은 기간의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했다.


# 나이 스물 한 살에 갑신정변 일으켜. 수구파 제거에 나섰으나…


1884년 7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했다. 고종도 이를 승낙해 선생은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에 임명됐으나, 일본세력의 침투를 우려한 청나라와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수구정책으로 회귀한 친청 정권의 반대로 사관학교 설립이 지지부진하게 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급진적인 개화와 개혁을 꿈꾸게 됐고, 이를 달성키 위해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洪英植)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거사에 돌입한 정변에서 선생은 청년 사관생도들을 지휘해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개화당 정부는 서정쇄신과 근대적 사회개혁 이념을 담은 14개조 개혁강령을 반포했지만,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3일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에 임명돼 군사분야의 개혁과 근대화 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후일을 기약하면서 1884년 12월 11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상선 천세환(千歲丸)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죄인으로서 정변 주모자의 인도를 집요하게 요구했고, 일본 정부 또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당초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냉대했다. 이 같은 태도변화는 교활한 일본인들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친청(親淸) 수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개화파를 지원하더니, 이제 한국 정부와의 관계개선에 이들이 걸림돌이 되니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 실패한 혁명의 여파로 부모 형제 처자식 모두 잃고, 미국으로 단신 망명


서재필의 컬럼비아 의대 졸업 사진낯선 이국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은 ‘내 생활은 내 힘과 내 손으로 개척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886년 9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이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역사.철학.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됐다. 이와 같은 서구 학문과의 만남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본식 문명 개화론을 극복하면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를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미국생활에 좀 더 적응하기 위해서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에 입적하게 된다. 이 같은 결정에는 ‘대역부도’의 죄인이었기 때문에 다시는 귀국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와 아울러 정변 참여로 말미암아 부모와 형, 부인은 음독자살하고, 친동생 재창(載昌)은 참형 당했고, 아들(2세)은 굶어 죽은 가족참변 또한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던 것 같다.


1889년 6월 해리힐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비 문제로 2년 만에 중도 퇴학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은 우선 학자금을 마련한 뒤 공부를 계속하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1890년 펜실베니아주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해 미 육군 군의(軍醫) 총감부 도서관의 번역원으로 취업했다. 여기에 근무하면서 1891년 조지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해 세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주경야독으로 1894년 6월 동 대학을 졸업하고 가필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모교인 조지 워싱턴대학에 출강하게 됐다. 그 후 워싱턴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1895년 6월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 S. Armstrong) 양과 결혼해 가정적인 면에서나 재정적인 면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구미위원부 위원장 임명장
# “한글로 민중을 계몽하자.”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 <독립신문> 창간


이즈음 국내에서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해 친청 수구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세워졌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고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서광범 등이 귀국해 복권됐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무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다. 하지만 당시 선생은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다. 그 후 1895년 7월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선생은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1896년 1월 귀국 직후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됐다. 그러나 선생의 주된 관심은 정치 참여보다는 국민계몽에 있었다. 그것은 당시 선생이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발간을 계획하였다.”고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같은 확신에서 국민계몽의 수단으로서, ‘벼슬을 하지 않고 민중교육의 의미로 신문을 발간하여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들이 알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주는 일(‘체미50년’ <동아일보> 1935. 1. 3)을 하기 위하여’ 우선 대중신문의 발간을 계획하고 추진했다. 그리하여 정부에 건의하여 보조금을 받고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영은문과 독립문<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평판 중형의 크기로 4면 발행됐는데, 1면과 2면은 논설.관보.잡보.외국통신, 3면은 광고를 순 한글로 실었고, 4면은 영문으로 논설을 비롯한 국내 정치활동을 소개했다. 당시 한문을 진서(眞書)로 생각하고 있던 때에 순 한글로 발행한 것은, ‘우리 신문이 한문을 아니 쓰고 다만 국문(한글)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고 독립신문 창간사에서 밝힌 바대로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같은 글에서 ‘한문만 늘 써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쓴 글을 조선 사람이 도리어 잘 알아 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오’라고 한 탄식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우리 말과 글을 범용하게 하려는 어문(語文) 민족주의적 의도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했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해 국민을 계몽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립신문 논설에서, ‘백성마다 얼마큼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라도 뺏지 못하는 권리요, 그 권리를 가지고 백성 노릇을 잘 하여야 그 나라 임금의 권리가 높아지고 전부 지체가 높아지는 법’이라고 하는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에 바탕을 둔 서구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지탱하는 것은 법률 하나 가지고 지탱하는 것이거늘 아무나 나라 백성을 임의로 잡아 가두고 재판 없이 형벌을 한다던지 연고 없이 무한하게 구류하는 것은 나라 법률을 멸시하고 임의로 천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무릇 나라의 모든 일은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실천을 강조했다.


이 밖에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여 주권 수호를 주장하면서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국민의 권리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논설을 자주 실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의 강연과 토론회에서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려주는 한편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하여 봉건 백성을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려고 했다. 나아가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을 가져야 열강의 침략을 막고 국민의 자유 민권도 신장된다고 주장했다.


# 중국 사신 맞이하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세우다


이와 같은 운동의 연계선상에서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그 고문이 됐다. 독립협회는 국민계몽 및 정치·사회운동 단체로서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우선 독립협회는 자주 독립의 국민적 상징물로서 독립문 건립사업을 전개했다. 그리하여 1897년 11월 국민성금을 모아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수해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케 하고,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꾸몄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는 1897년 10월에 있었던 ‘대한제국 선포 및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어우러져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한편 민족 자존의 기개를 한껏 분출시켰다.


안창호와 서재필이 찍은 사진(1925)그럼에도 이 시기 우리나라는 열강들의 각종 이권 침탈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형상이었다. 특히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친미 연립정권이 들어서자 우리나라의 각종 이권은 열강에게 무더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종성(鍾城) 일대의 광산채굴권, 두만강·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동해의 포경권(捕鯨權) 등을 빼앗아 갔다.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 채굴권 등을 차지했다. 그리고 1895년 3국 간섭 당시 러시아와 보조를 같이했던 프랑스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그밖에 일본.독일.영국 등도 우리의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 있었다.


# 조선 이권 노리는 열강들의 강압적인 요구, 서울 종로 메운 만민공동회로 꺾어


특히 러시아는 1897년 9월부터 석탄기지로 사용하겠다고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조차를 요구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1898년 1월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고 군대를 상륙시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압력에 굴복해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고 하자 선생은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중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했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주권수호 및 이권침탈 반대 민중대회로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했다. 여기에 모인 8,000여 명의 군중들은 열강의 한국 침략정책을 규탄하면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결사 반대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와 같은 선생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파 대신들과 한국에서의 이권획득에 혈안이 된 열강의 미움을 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 공사의 술책과 위협으로 정부는 선생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미국 공사에게 선생의 추방을 교섭했다. 미국 공사 또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국을 종용함에 따라 선생은 당초 의도했던 국민계몽을 통한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 기틀 마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8년 5월 14일 독립협회 회원들과 작별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 사실상 열강들에 의해 미국으로 추방 당해…3.1운동 계기로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


다시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곧바로 미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외과의사로서 미.스페인전쟁에 종군했다. 그리고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조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하게 된다. 국내의 거족적인 3.1운동 소식을 접한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재미동포들은 끝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참여할 것을 다짐하는 12개 항의 결의안과 3개 항의 실천사항을 채택했다. 그 결의안 가운데 하나는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할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가산을 정리해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와 선전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서재필의 부인인 뮤리얼 암스트롱의 중년기 사진# “대한민국은 독립국가임을 인정하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열다


그 같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미주에서의 한국 독립선언식을 계획 추진했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간 선생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의 한 극장에서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 : 일명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선생과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재미 한인대표들은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1919년 4월 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햇다.


한인자유대회 결의안


1. 재미 한인은 중국 상하이에 건설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후원하기로 결의한다.

2. 구미 각국에 대한민국 외교사무부를 설치하기로 한다.

3. 구미 각국 민중으로 하여금 우리 독립선언의 주장과 국내외 사정을 이해하게 하는데 노력하기로 한다.

4. 일본 정객에게 충고문을 보내어 일본의 실책을 각오하게 한다.

5.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리고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한 모두는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하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표출 선전한 뒤, 선생의 사회로 미국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 “미국인이여, 한국의 독립을 도와라.” 미국 유력인사들을 ‘한국친우회’에 가입시켜


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이와 같은 활동으로 선생은 임시정부의 대미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그에 따라 4월 25일 필라델피아의 대한인국민회 외교통신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민국 통신부로 변경됐다. 선생의 책임 아래 운영된 대한민국 통신부는, 한국의 소식을 구미 각국에 선전하며 한국 독립에 공감하는 친한미국인(親韓美國人)을 모아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고 그로 하여금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외교 사업을 협찬하게 하는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한국 문제를 강연하는 사람들의 연설문 작성과 재료를 공급하며 영문 출판과 선전문 제작에 협조하여 한국 선전에 노력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우선 1919년 5월 톰킨스(Tomkins) 목사와 협력해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 of Korea)를 조직하고, 여기에 미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들의 노력으로 미 상원과 하원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고, <한국 독립 찬조 결의안>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1919년 8월부터 1921년 12월 재정난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국평론(Korea Review)>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해 한국 독립을 위한 대중적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한국평론(Korea Review)>은 당시 미국민을 상대로 한 유일한 월간 잡지로서 다른 해외지역에서의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간행물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평가되며, 일본의 대미역선전(對美逆宣傳)을 막는데 힘쓴 잡지였다. 이 잡지의 주된 논점은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는 불법적으로 이뤄졌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개혁정책은 순전히 허구일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것,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려왔고, 현재 충분히 그러한 자치능력과 민족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 등 미국민에게 한국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서재필 사진# “한국이 일본에 대해 전쟁 개시하면 미국이 지원해달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에게 요구


1919년 9월 이승만은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발족시켜 구미에서의 정부행정을 대행하게 하면서 외교업무를 주관하게 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통신부도 여기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선생은 처음에는 구미위원부의 부위원장, 그리고 1920년 6월 초대 위원장(金奎植) 사임 이후에는 위원장으로 대미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921년 1월 선생은 오하이오주 메리온시에서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과 회견하고, ‘한·중 양국이 대일(對日) 개전을 하면 미국은 이를 후원할 것’을 요청하면서 한국 독립에 미국이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 직후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축소 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회의(혹은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시켜 파리평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의 목적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을 전권대사, 선생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 대표단을 구성해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했다. 이에 선생은 미 국무장관 휴즈를 방문해 일본이 한국 독립운동자를 학대 학살하는 진상을 폭로하고, 태평양회의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여 줄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 12월 28일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국내 13도 260군 대표 및 각 사회단체 대표 370여 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와 아울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요구서를 정식으로 접수시켰다. 선생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의 이러한 독립 외교활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민족의 독립열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각국 대표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서재필 집무실 사진# 일본 대표의 온갖 방해 물리치고 하와이 태평양문제조사회에 참가


이 같은 독립 외교활동은 1925년 열린 태평양회의에서도 이뤄졌다. 이 회의는 태평양지역 여러 국가와 국민의 상호관계개선을 목적으로 하여, 이들 국민의 국내 및 국제적 사정을 조사 연구하는 사설 단체인 태평양문제조사회가 처음으로 개최한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자 선생은 일본 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한국 대표로 참석했다. 여기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문제는 일본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양의 문제요, 전세계 인류의 문제다. 우리는 세계 어느 구석에서도 정의가 무시되고 인도가 유린됨을 묵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와 같이 1919년 3.1운동을 전후해 19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선생의 독립 외교활동은 3.1운동으로 표출된 국내 독립운동의 정신을 선전 외교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 사회뿐 아니라 국제사회에까지 지속시킴으로써 국제적으로 친한여론(親韓輿論)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이 당파(黨派)를 조성하지 않고 미주 한인사회의 단합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선생의 인품과 지도력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서재필 박사 사진# 미주 독립운동을 개인 돈으로……가난에 처했으나, 광복 후 대통령 추대마저도 뿌리쳐


3.1운동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선생의 독립 외교 및 선전활동은 거의 사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생은 드디어 무일푼의 처지가 됐다. 이렇게 되자 다시 의학수업과 의료활동에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됐고,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기가 어렵게 됐다. 그러나 1942년 3월 1일 선생은 워싱턴에서 미주 및 하와이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전쟁 전승기원 기념식에 참가하는 등 조국광복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선생은 1942년 8, 9월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천세헌(’95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에게 보낸 서한 내용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선 젊은 한인들의 활동이 중요하며 무엇보다 한인단결이 우선돼야 함을 지적했다. 또한 실질적인 한인대표를 통한 대미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선생은 노령에다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원로로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선생은 미군정 사령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83세 나이로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귀국해 이듬해 9월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다. 몇몇 인사들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의 생을 마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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