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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 홍성, 전국 두 번째 많은 순교자의 성지 땅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1-22 05:18:30
  • 수정 2023-03-02 11:2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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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홍주(지금의 홍성)는 바다와 인접해 외국 문물 수용의 창구역할을 했으며, 천주교를 받아들이는 시기와 전파속도가 빨라 1700년대 신도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우리나라의 순교자 수는 무명의 순교자(殉敎者)까지  총 1,200여명이다. 홍주는 순교자가 212명으로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많다.


고려 초에는 홍성 일대를 ‘운주라 ’불렀고, 현종 9년 1018년에 ‘홍주’로 개칭됐다. 1914년에는 행정구역이 재편되면서 홍주와 결성 지역을 합쳐 ‘홍성’이라 부르게 돼 올해 ‘홍주 1005년 째 해’, ‘홍성 109년’ 째 해를 맞았다.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옥졸들이 감옥에 가두어 놓았던 자들을 이 곳에 이끌고 와서 홍주아문에 들어가기 전에 돈을 갈취하기 위해 이 느티나무 (수령 약 300년)에 묶어 놓고 매질을 하였던 산증인의  상징이다.  

 

홍성洪城 홍주아문 (洪州衙門)1870년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이 외삼문도 함께 수리했고, 조선시대 행정 단위인 목사(牧使)(정 3품)가 목을 다스리며 근무하던 건물인 안회당(安懷堂)의 바깥문이다. 조선시대에 관청 출입문 중에 가장 크고 독특한 구조와 형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홍주아문이란 현판은 흥선대원군이 직접 써 주었는데 전하지 않고, 현재는 다른 사람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옛 신앙의 선조 순교자들은 이 곳 홍주아문(洪州衙門)문으로 들어가서 재판을 받았다. 

 




안회당 (安懷堂)

현 홍성 군청 뒤에 홍주목사(牧使) (정3품)가 공사를 처리하던 중심 건물이다. 홍주성의 동헌은 원래 근민당이라 불렀고 (1678) 8칸, 비좁아 (1870) 22칸으로 늘려지었다. 그 당시 흥선대원군이 (安懷堂)이라는 글씨를 직접 써 주어 '안회당'이라 지금까지 불리고 있고, 노인은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은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글씨는 해방이후 사라져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현판은 1991년 새로 제작됐다.


이 곳 동헌에서는 천주교박해 동안(1791~1869) 순교자 박취득(아우렌시오)외 천민계급의 무명 순교자 신앙인들에게 “배교하라”고 인간 이하의 동물취급을 받으면서 문초와 매질과 고문 등 형벌을 받으면서도 “사또 우리는 영달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니까 빨리 죽여주십시오.” 라고 해서 오히려 곤장과 주뢰형을 가해한 형리들이 혀를 내두르게한 장소이다. 


홍성의 한 관계자는(75세)은 “이곳에서 고문과 매질을 못 견디고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의 피를 흘린 곳으로 거룩한 땅”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홍주 동헌은 순교한 선조들의 신앙심이 깊이 담긴 곳이다.


여하정과 왕버들

여하정은 (1896) 홍주목사 (牧使) 이승우가 정자를 세웠고, 정자 주변에 300여년 된 왕버들과 어우러져 홍주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감옥터 

홍주옥은 범죄 혐의가 있는 사람을 가두는 시설로 담장을 둥그렇게 둘러 원옥이라고도 했고, 천주교 박해기간 동안(1791~1869) 홍주의 순교자 212명중 113명의 순교자가 많이 나왔으며, 교수형이 제일 많이 나왔다. 순교자들의 옥중생활은 굶주림 목마름 장독 전염병 포졸들의 괴롭힘으로 생명이 단축됐다. 


홍성의 관계자는 "박취득(1769~1799 라우엔 시오)은 다리를 부러뜨리고 곤장을 1천4백대나 맞았으며, 8일동안 물 한모금도 마시지 못하게 하였으나 나는 때려도 죽지않고 굶어도 죽지않으니, 나를 죽이려거든 교사를 해달라고 해서 2인이 목을 발로 밟고, 목을 새끼밧줄로 졸라 순교했다”고 전했다. 


특히 이곳은 프랑스 첫 번째 선교사 성 모방 신부, 두 번째 성  샤스뎅 신부가 기해박해(1839)때 홍주관아에 자수해  갇혀있던 곳이고, 성 다블뤼 조교, 성 위엥 신부, 성 오메트로 신부, 성 황석두 등 6명이 머물었던 현장이다. 


원시장 베드로(1732~1792)는 55세 때 때려도 죽지않고, 석달을 굶겨도 죽지않자, 네가 어떤 놈이냐? 했을 때, “내 옆에는 항상 예수님이 계십니다. 저를 위하여 온몸에 매를 맞고 제 구원을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얼고 있는 이몸을 받칩니다”라고 하며, 1792년 12월17일(음) 벌거벗겨서 초저녁부터 이 우물의 물을 퍼부어 얼려서 새벽에 동사 순교했다. 


홍성의 어떤 사람은 “성 위앵 신부는 27세 꽃같은 나이에 옥살이할 때 배가 너무 고파서 깔고 앉은 멍석을 손으로 쓸어서 먹고, 이 우물물로 연명을 했다고 비망록에 전해진다.”고 말했다.


                                                             ▲ 홍주읍성 우물

                                                         

이 우물은 1481년 (성종12년) 때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홍주읍성 안 3개 우물 중 하나로 추정되며, (1872년) 홍주지도에서도 확인 된다. 옛 홍성지원과 홍성지청이 홍성읍 월산리로 이전한 후에는 폐공되었다가, 2012년 홍주읍성 내 역사공원을 조성하면서 외형을 보수하였다.


# 대원군 부친 묘소를 훼손하다


독일 상인 오베르트가 흥선대원군 부친의 묘소를 파헤쳐 훼손하므로 인해 이 보고로 누가 훼손 했느냐? 서양사람입니다. 서양사람에게 이 묘소를 안내한 자가 누구냐? 천주교 신자임이 밝혀지자 천주교 신자는 무조건 잡는대로 죽이라는 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진영터

이곳은 조선시대 홍주 진영의 동헌(경사당)이 자리했던 곳이다. 당시 진영을 관장한 진영장(정3품)은 군사권과 죄인을 잡는 토포사의 직임을 겸했다. 진영터 앞에는 조양문이 자리하고 있다. 천주교 박해 후기에는 이곳으로 많은 신자들이 끌려와 질식사, 문초, 죽을때까지 때리는 형벌을 받아 뼈가 부서졌고, 살점이 찢어졌으며, 등뼈가 튀어나오는 등  많은 피를 흘린 곳이다. “배교한다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죽을지언정 배교할 수 없다”라며, “인간은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라고  증거했던 곳이다.

 

병인박해 때는 너무 많은 신앙의 선조들이 잡혀오자, 감옥에 수용할 곳이 부족해 진영에서 수용했다고 전했다.  


보통 때는 1년에서 6개월 정도는 옥살이를 시키다가 형을 집행했는데, 감옥이 꽉 차고 수용할 곳이 부족하여 진영 옆에 가둬놓고 3~ 4일 만에 형을 집행 해 백지사, 생매장 해서 빨리 많이 순교했다고 전했다.


조양문(朝陽門)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東門)으로 (1870년 고종7)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문루(樓門)를 축조했다. 홍주문의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이라 하여,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하였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북문은 역대 목사나 영장들이 사형수의 처영을 감시하기도 했으며, 1906년 항일 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일본인들에 의해 서문과 북문은 파괴되어 없어졌으나, 북문은 현재 복원 중이고, 조양문도 파괴하려 했으나 읍성민들이 지켜 보존되어 1975년 문루를 복원하여 제 모습을 찾았다.


                                                                                             ▲저작거리


저작거리터는 감옥에 갇혀있던 신앙의 선조들을 데려다 놓고 여기서 죽거나 크게 피를 흘린 곳은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장날 조리돌림으로 침뱉고 따귀도 때리는 등 조롱을 당한 곳이다.

 

홍성 한 관계자는 “옛날에 여기가 장터였었을 때 사람들이 모이면 먹거리 국수가 있었던 곳이다. 국수장사 할머니 한 분은 국수를 말아서 조리돌림이 끝나고나서 돌아갈 적에 한 줌이라도 먹고 가라고 목숨걸고 그렇게 먹게끔  해줬다. 만약 포졸이나 군인들이 알아차리면 그냥 두지 않았을 일인데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는 쉬운 일이 아닌 것을 베풀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조리돌림의 당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본 당시 어떤 사람은 “저렇게 고초를 당함에도 불구하고 눈이 초랑초랑 빛나며 평화스럽고 평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저들의 죄는 하나님을 믿는 죄뿐인데, 하늘의 있는 것의 형상이냐? 하나님을 고민하기 시작한 자리가 됐었다"고 말했다.    


홍성읍성 북문

홍주읍성 북문은 조선초기 축성부터 출입문 역할을 했고, 군인이 관리하던 문으로 참수하러 가는 신앙의 선조들이 이 문을 통과해서 나갔다고 전했다. 


1823년 문루가 설치된 것으로, 1870년 수리기록과 1872년 지도의 표기를 보면 거치식 팔각지붕 추정, 문루는 1894년 동학혁명 당시 서문과 함께 소실됐고, 주변성벽은 일제강점기와 공공기관의 읍성 내 입주 등 도시화 과정에서 훼손됐으며, 2017년 발굴 &조사결과 성벽, 옹성의 전체 현황 및 구조가 확인 됐고, 이 북문은 현재 복원 중이다.


                                                                                              ▲참수터 

진영의 참수터 

이 곳은 월계천이 흘러내리고 있는 곳으로 월계천 건너편 동네는 동문밖 백정들이 모여 살면서 소, 돼지를 잡았던 곳이다.  그 이후는 사람 잡는 형장 참수터가 돼 월개천에 핏불이 항상 흘러내려 촌락 형성이 안되어 인가가 없었다. 


여기서 천주교 신앙의 선조 4명이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중 한 분 복자 황일광 시몬(1757~1802)은  천한 백정의 출신으로 태어나서 어릴 적에 뛰어놀면서 성장하며 살던 곳이다. 성장해서는 백정 일을 하다가 여기를 벗어나서 5년을 더 살았고 45세에 그는 “나에게는 2개의 천국이 있다. 하나는 이 세상에 있고, 또 하나는 죽은 후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감옥 밖에 있으나 안에 있으나 항상 하나님은 함께 계시다”며  칼을 받아 순교했다.


또한 이 곳에서는 1894년 동학 때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참패를 한  전봉준을 잡아 서울로 가서 죽였고, 해당병 일부는 우리가  홍주성이라도 점령하자고 해서 와서 500명이 붙잡혀가서 한꺼번에 참수된 곳이다. 

                                                            

홥치머리

생매장터는 홍주성에서 오리쯤 떨어져있고, 지정학적으로 홍성천과 월계천이 만나는 합치머리다. 합치머리는 물과 모래가 많다.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 전국적으로 계속돼 1868년 신앙인 최법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아(마리아), 원아나타시아 등 순교한 장소다. 4분만이 이름이 남아있다. 무명순교자도 40위가 있다. 여기서 몇 명씩 또한 많으면 10명씩도 한꺼번에 순교해, 시신을 가족에게 인도하지 않고 임의로 묻어버렸다고 전했다. 이것은 유례없는 잔인한 형벌이다. 


박해시대 홍주성 안에서 옥사나 교수형으로 순교자들의 시신도 생매장터 인근에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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