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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51] 종2품 이상의 관원이 있는 무덤이 있는 근처 큰길에 세우던 석비 '신도비'
  • 박광준
  • 등록 2023-01-23 19:46:02
  • 수정 2024-04-10 10:4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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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신도비는 옛날 종2품 이상의 관원이 있는 무덤이 있는 근처 큰길에 세우던 석비로, 이 석비는 그 비문의 내용이 알려주는 역사적 사료로서의 금석문의 가치나 서체가 보여주는 서예사적 가치, 그리고 석비 양식의 변천을 통해 미술사적 가치를 함께 보여주고 있어 주목돼 왔다. 


석비의 기본형을 살펴보면, 방형의 대석 위에 네 발을 힘차게 뻗은 귀부가 놓여 있고 귀부의 배면인 타원형의 등에는 6각형의 귀갑이 전체를 덮고 있다. 귀갑 중앙에는 장방형의 비좌를 조성하고 그 위에 다시 별석으로 된 장방형의 대형 비신석을 세웠고, 비신석 상단부에는 두 마리의 반룡이 서로 얽혀 비신을 올리는 듯 하거나 혹은 대칭으로 마주보고 싸우는 듯한 모습을 한 이수라는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양식을 갖춘 석비는 통일신라시대에서부터 시작돼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약간의 변화를 거치면서도 기본적인 형태를 유지하면서 전래되어 옴으로써 전통적인 석비형태로 고착됐다.    


# 사육신 신도비



동작구 노량진동 185-2에 있고, 단종을 섬기던 충신 성삼문.박팽년.이개.유웅부.유성원.하위지 등 사육신의 충절된 절개를 전하기 위해 세운 묘비이다. 숙종 7년(1681)에 사육신의 충성심과 장열한 의기를 추모해 민절서원을 세운 바 있고, 그 후 정조 6년(1782)에 신도비를 세웠다. 이 신도비는 당초 봉분 아래 큰길가 가까이에 있었으나, 사육시묘가 자리하고 있는 곳을 1978년 성역화하면서 옮겨 놓은 것이다. 그 비문 속에는 성삼문 등 6충신이 사형을 당하던 당시 서울은 형용할 수 없을 지경으로 혼란했고, 그들의 시체를 매장할 겨를조차 없었다. 다행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이 중의 차림으로 남몰래 이 산에 옮겨 묻었다.  그러하니 시체가 제대로 챙겨져 묻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서 사육신의 최후는  그야말로 비참했음을 실감케 한다.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에서 민절서원 구기에 6각의 사육신묘비를 세우고 영역을 수축해 여섯 충신의 영령을 받들게 했다. 비면 상단에는 감광섭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고, 비면 중.하단에는 손재형이 쓴 육신의 이름과 그들이 지은 시가 각각 1면씩 새겨져 있다.


신도비의 높이는 215cm, 폭은 80cm, 두께는 41cm로서 방형대석 위에 비신을 세웠고, 옥개형 개석을 얹은 조선후기의 평범한 양식을 그대로 따랐다. 비문은 대종백태학사 조관빈이 찬하고 글씨는 집당안진경서이다.  


# 임당정공신도비


동작구 사당동산 32-2의 관악산 기슭에 있는조선 선조 때의 문신 임당 정유길(1515-1588)의 묘비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로 지정돼 있다. 인조 24년(1646)에 건립됐고, 수죽정공신도비와 같은 지역에 세워져 있다.



이 묘비는 대석과 비신, 이수를 고루 갖추고 있다. 장방형 대석은 측면 네귀퉁이를 기둥모양으로 장식한 다음, 각 면에는 운문과 뿔이 달린 동물의 문양을 대칭으로 양각했고, 대석의 어깨부분에는 복판복연문이 정교하게 양각 되어 있다. 비 머리인 이수는 쌍룡을 뒤틀어서 조각했는데, 이것 또한 대석의 조각과 걸맞게 매우 정교하게 되어 있어서 조선조 석비로는 일품에 속한다. 


비의 총고는 247cm, 신고는 188cm, 신폭은  85cm, 신후는 26cm, 이수고는 59cm, 이수폭은 101cm, 이수후는 35cm, 대폭은 151cm, 대후는 91cm이다. 대석은 화강석이며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병자호란 때 청국과의 화의를 반대하다가 심양에 잡혀가서 3년간 옥고를 치뤘던 좌의정 김상헌이 지었고, 두전은 인조 대의 문신이며 형조판서.한성부윤.경기감사.우감찬 등을 역임한 김광욱의 솜씨이고, 글씨는 참찬 오준이 썼다. 


이처럼 이 비와 묘는 조선조 석비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인정돼 198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 수죽정공신도비


동작구 사당동 산 32-2에 있는 수죽 정창연의 신도비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 62호로 지정됐다. 효종 8년(1657)에 건립했다. 



이 묘비는 대석.비신.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리고 이수와 대석에는 운룡과 연화문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다. 비석의 신고는 180cm, 신폭은 64cm, 신후는 88cm, 이수고는 55cm, 이수폭은 80cm, 이수후는 38cm이다. 대석은 화강석이고, 비신은 백일석으로 되어 있다. 


비문은 효종 때의 문신으로 영돈녕부사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서 궤와 장을 하사받은 백헌 이경석이 짓고 글씨도 썼으며, 두전은 효종.숙종 때의 문신이고, 지돈녕부사와 지의금부사를 역임하고 기로소에 들었던 이정영이 썼다. 


제곡정공신도비는 1984년 11월 3일 서울특별시 유향문화재로 지정됐다. 


# 연령군신도비


조선숙종의 둘째 아들 연령군(1699-1720)의 신도비이다. 그는 숙종 25년에 출생해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그의 휘는 명이고 자는 문숙이다. 



이 석비의 원소재지는 금천현 번당리로 지금의 영등포구 대방초등학교 교정이었다. 그러다가 1940년 경성지구 구역정리로 인해 묘역이 충남 예산군 덕산으로 옮겨지고, 현지에는 신도비만 남게 됐다. 그 후 1967년 8월 3일 현 위치인 도봉구 공릉동 육군사관학교로 이전해 보존하고 있다. 


이 비는 '안국동별궁비'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연령군이 생시에 살던 집이 안국동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려진 듯 하다. 왕릉의 신도비는 문종대에 이미금지되었으므로, 세종대왕의 신도비가 왕릉의 신도비로서는 마지막이었음에 비해 연령군신도비는 숙종의 명으로 세워졌다는데에 그 특징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신도비는 그 보존상태가 비교적 좋은 편이고, 이수와 비신, 귀부가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비신은 잘 연마된 오석으로 제작됐고, 자경은 약 3-4cm의 해서로 이뤄졌다. 각부의 조각수법은 더욱 경직해지면서 시대의 하강을 보이고 있다. 다만 비신에 비해 귀부는 상당히 큰 편으로 형태는 안정감을 이루고 있다. 


비제는 비신의 상단에 횡서로 '왕자연령군증시효헌공신도비명'이라고 되어 있고, 거대한 귀부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옥개형개석을 얹었다. 비신의 높이는 245cm, 폭 115cm, 두께 49cm로 돼 있고, 귀부의 높이는 135cm, 길이 428cm로 뚜렷한 형태로 조각됐다. 


비문 말미에 '종정무진기원후구십삼년경자월일립'이라는 기록으로 보아 숙종 46년(1720)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숙종 대 좌의정을 지낸 이이명이 찬하였고, 글씨는 예조판서를 지낸 조태구가 썼다. 전액은 '세종실록' 등의 편찬에 참여했던 민진원이 썼고, 비문은 해서로 이뤄졌다. 연령군신도비는 1980년 6월 11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됐다. 


# 이정영의 묘


동작구 사당 4동 산 44-7에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이정영(1616-1686)의 묘로, 신도비 1기를 비롯해 묘갈 1기, 상석 1기, 문관석 2기, 망주석 2기, 그리고 묘를 포함한 1필지(11,530m)의 보호구역 등이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정영의 본관은 전주, 자는 자수, 호는 서곡으로, 아버지는 호조판서 경직이다. 인조 14년(163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한 뒤 1642년 예조좌랑, 효종 10년(1659) 병조참의 좌승지를 역임했다. 현종 1년(1660) 병조참판.대사간을 거쳐 1666년 예조참판, 이듬해 도스어지에 이어 판윤이 됐다. 1672년 한성부판윤으로 도어지부사가 되어 청나라를 다녀왔다. 1674년 이조판서가 되고 숙종 3년(1677) 형조판서로 시관이 되어 부정을 저지른 죄목으로 철원에 유배됐다가 풀려났다.  1685년 판의금을 거쳐 기로소에 들어갔다. 


전서와 주서에 뛰어났고, 글씨로는 '민기신도비' '이순신명량대첩비' '정여창비' 등 다수가 있다. 시호는 효간이다. 


이 신도비의 규모는 가로 90cm, 세로 30cm,높이 270cm이고, 재질은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이정영의 묘는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분묘 형식과 제도를 잘 보여주는 것으로 묘갈.상석 문관석 등이 당시의 석조미술 내지석조양식을 대표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1994년 5월 서울특별시유형문화재로 지정됐고, 전주이씨 함풍군파파종회에서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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