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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119] 한강변 아름다운 마을 ‘흑석동’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1-23 20:33:29
  • 수정 2024-03-14 07: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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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흑석진[박광준 기자] 흑석동의 동명은 흑석 제1주민센터 남쪽 일대에서 나오는 돌의 빛이 검은색을 띠므로 ‘검은돌’ 마을이라 한 데서 유래했다.


흑석동의 연혁을 살펴보면,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에 속했던 곳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가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자의(資意)로 행정구역을 새로 조성하면서 이곳을 시흥군 북면 흑석리라 했다. 


서달산에서 바라본 흑석동그 후 1936년 4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로서 경성부의 관할구역을 대대적으로 확장할 때 흑석리는 경성부에 편입됐다. 경성부에 편입된 흑석리는 일본식 명칭인 흑석정으로 개창되어 영등포출장소 관내에 있다가, 1943년 6월 10일 경성부가 구제도를 실시함으로써 영등포구에 속하게 됐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일본식 명칭을 없애고 우리말로 동명을 고칠 대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흑석동으로 우리 동명을 되찾았다. 


수변도시 흑석동 표지석1973년 7월 1일에는 대통령령 제6548호에 의해 영등포구로부터 관악구가 분리 신설됐는데, 흑석동은 신설된 관악구로 이관됐고, 1980년 4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거해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될 때 흑석동은 현재를 이른다. 


현재 동작동의 동북쪽, 즉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 위치한 흑석동은 동쪽은 능선을 경계로 동작동, 서쪽도 능선을 경계로 본동과 인접해 있다. 남쪽 또한 능선을 따라 상도동과 나뉘어지고 북쪽은 한강에 닿아 있으며 최근에 개통된 올림픽대로의 노량대교가 놓여 있다. 


# 흑석동의 자연부락 명칭과 자연지명


옛 검은돌 시장 자리 

흑석 1동에는 흑석동 동명이 된 ‘검은돌 마을’로, 지금은 흑석 1동 232, 243번지 일대를 지칭했고 은로초등학교 운동장 자리에는 주민센터가 있었다. 또한 남부동에는 우리 전통 한옥들이 지금도 120여채가 밀집돼 있어 일명 ‘한옥촌’이라고도 불렀다.


‘명창굴’은 흑석 1동에서 상도동으로 넘어가는 중앙대학교 중문 부근의 마을 이름이고, ‘안말’은 흑석 1동 5통 일대의 마을 이름이고, ‘새말’은 흑석 1동 221번지 중앙대학교 앞 지역의 마을로, 새말의 유래는 을축년 큰 장마 때 안말이 침수되자 그곳 주민들이 좀더 높은 지대이던 지금의 중앙대학교 앞으로 옮겨서 새로 집을 짓고 살면서 붙여졌다. 


명창굴 일대그리고 흑석 1동 156번지 성모병원이 들어선 지역의 마을을 ‘웃말’이라고 칭했다. 


흑석동은 동.서.남쪽의 3면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는 관계로 산 이름이 적지 않다. 먼저 명수대가 있었던 ‘서달산’은 달마사가 있는 뒷산으로 돌이 많이 나며, ‘재강굴산’은 붉은 산이란 데서 붙여진 이름으로 중앙대학교 뒷산을 일컫는데, 중앙대학교를 창시한 임영신의 묘가 있다. ‘할떡거리’는 동양중학교 왼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 이곳 주민들이 이 산을 오르려면 숨이 가빠 헐떡거렸다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이 산마루에서는 동네 사람들이 연날리기를 했다고 한다. 


또 산이 많음에 따라 바위 이름도 많다. 바위 모양이 치마처럼 넓게 펼쳐져 있다 하여 ‘치마바위’라는 명칭이 붙은 바위가 학도의용병현충비에서 원불교 서울회관 밑으로 이어지는 한강변이 있었고, 바위가 집처럼 속이 비어 있어 ‘집바위’라는 명칭이 붙은 바위도 있다. 


도당칠성

그밖에도 5통 지역에 ‘큰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나 전일에는 이곳 안말 사람들이 이용했고, ‘대동우물’은 흑석 1동 1562번지 지금의 성모병원 자리에 있던 우물로 예부터 동리 주민 약 80호가 사용했던 큰 우물이었으나 병원이 들어서면서 메꾸어졌다. 또 ‘집박굴 우물’은 달마사 밑에서 나던 맑은 물로 약수터는 아니나 물맛이 썩 좋았다고 한다. 


지금의 학도의용병현충비가 세워진 곳 위쪽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바위 사이에 아름드리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전에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칠성님을 모시는 도당을 만들어 일년에 봄, 가을 두 번씩 마을에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고, 질병이 없기를 비는 제사를 지내기 때문에 ‘도당칠성’이라고 불렀다. 


한강신사원불교서울회관 옆 한강변에는 일제 때 ‘한강신사’가 있었다. 이 신사는 일본인들이 도당칠성 터에다 50여 평의 2층으로 된 목조건물을 지으면서 바위를 깨뜨리고 소나무도 베어버린 후에 지었다. 당시 은로초등학교 학생들과 경성부에 근무하는 일본인들이 이곳에 와서 신사참배를 했다고 한다. 광복 후 마을 사람들이 이 건물을 헐어버렸는데, 6.25 동란 때는 국군의 작전지로 사용되다 현재는 효사정이란 정자가 세워졌다. 


옛 연못시장 일대‘연못시장’과 주택은행이 위치한 일대의 연못이 있었는데, 이 연못은 일제 때 일본인 목하영이 이곳에 5,000평 정도의 커다란 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나무를 심어 섬을 만들어 놓은 까닭에 동리사람들의 휴식처와 낚시터로 이용됐다. 광복 후에 이곳을 메꾸고 시장이 생기자 연못자리에 있는 시장이라 하여 연못시장이라고 불려지게 됐다. 


그리고 이곳에 본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마루에는 일제 때 ‘한강장’이란 큰 요리집이 있었다. 이 요리집은 일본인 고바야시가 지은 것으로 기생들을 두고 각 기관장들과 부호들을 맞아들였다. 이 요정 앞으로 한강이 보인다고 한강장이라고 불렀으나 광복 후 화재로 전소됐다. 


흑석시장 한편 흑석 2동 시민아파트가 있었던 아래쪽 한강변에는 ‘범바위’가 있었는데,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이곳에는 많은 낚시꾼이 모여들어 고기잡이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한 낚시꾼이 큰 잉어 한 마리를 낚자 갑자기 눈보라와 모래가 휘날리더니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어슬렁거리며 손을 내밀자 질겁을 한 낚시꾼이 도망을 가자 호랑이가 그 뒤를 따라왔다. 낚시꾼은 더 이상 도망을 가지 못하고 마침 그곳에 구멍이 뚫린 큰 바위가 있어 그 속으로 들어가, 결국 그 바위 속에 갇혀 죽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호랑이가 손짓을 한 것은 잉어를 달라는 뜻이었다고 하는데, 낚시꾼은 자기를 잡아 먹으려는 것으로 오인해 결국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 흑석동의 사적


완성군의 묘'달마사'는 서달산 북쪽 흑석 1동 산 60번지 29호에 있는데 송만공대선사의 법통을 이은 구성당 변유심대사가 이곳을 호국기원과 중생제도의 도량으로 선정하고 1931년 7월 25일사찰을창건해 달마사로 했다. * 고려대장경 출판본 봉안한 장경도량 '달마사[達摩寺](본지 2021-05-30), '폰으로 만난 문화 & 역사 36' 참조


현재 중앙대학교 입구 한강변 언덕에 ‘육탄십용사현충비’와 ‘학도의용병현충비’가 있고, 서달산 꼭대기에는 ‘명수대’가 있다. 명수대는 1920년 일본인 부호 목하영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놀이터를 만든 다음, 이곳이 맑은 한강물이 유유히 흐르는 경치 좋은 곳이라 하여 명수대란 이름을 붙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광복 후 이 별장은 철거됐다.)


또 ‘완성군의 묘’가 있다. 완성군은 조선 정종의 증손이며 그의 할아버지는 정종의 열째 아들 덕천군이다. 이 묘지는 위에서 아래로 4개의 봉분이 각각 배위 합장돼 있다. 


교육기관으로 대학교는 중앙대학교가 있고, 고등학교로는 중대부속고등학교와 중대부속여자고등학교가 있고, 중학교로는 동양중학교, 중대부속중학교와 그리고 중대부속여자중학교가 있다. 또 초등학교로는 명수대초등학교와 은로초등학교, 그리고 중대부속초등학교가 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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