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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2] 우배선 등 5분을 향사하는 '낙동서원(洛東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6 12: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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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본래 이 인근에는 우배선(禹拜善)을 제향키 위해 1708년(숙종 34)에 건립됐던 덕동서원이 있었는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건물도 없어졌다. 현재 낙동서원은 최근 1965년 단양우씨 판서공파 종인의 협조와 17대손인 종식, 종묵 형제가 상인동 885번지에 사비로 건립해 향내 유림에 헌납한 것이다. 이 서원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했던 우배선과 우탁(禹倬), 신현(申賢), 우길생(禹吉生), 우현보(禹玄寶) 5분을 모시고 향사를 매년 음력 3월에 봉행하고 있다.

    


# 우탁(禹倬, 1262~1342)


고려 말 정주학 수용 초기의 유학자.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천장(天章) 또는 탁보(卓甫.卓夫), 호는 백운(白雲).단암(丹巖). 세상에서 ‘역동선생(易東先生)’이라 일컬어졌다. 시조 현(玄)의 7대손으로, 남성전서문하시중(南省典書門下侍中)으로 증직된 천규(天珪)의 아들이다. 1278년(충렬왕 4) 향공진사(鄕貢進士)가 되고, 과거에 올라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됐다. 이 무렵 영해에는 팔령(八鈴)이라 이름하는 신사(神祠)가 있었다. 백성들이 그 영험을 믿고 팔령신(八鈴神)을 극진히 받들고 있었고, 자주 제사지내고 재물을 바쳐 폐해가 막심했는데, 팔령신을 요괴로 단정하고는 신사를 과감히 철폐했다.


1308년(충선왕 즉위년) 감찰규정(監察糾正)이 됐고,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통간하자 백의(白衣)차림에 도끼를 들고 거적자리를 짊어진 채 대궐로 들어가 극간을 했다. 곧 향리로 물러나 학문에 정진했으나 충의를 가상히 여긴 충숙왕의 여러 번에 걸친 소명으로 다시 벼슬길에 나서서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치사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는 안동 예안(禮安)에 은거하면서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당시 원나라를 통해 새로운 유학인 정주학 (程朱學)이 수용되고 있었는데, 이를 깊이 연구해 후학들에게 전해주었다.



정이(程頤)가 주석한 ≪역경≫의 <정전 程傳>은 처음 들어왔을 때 아는 이가 없었는데, 방문을 닫아걸고 연구하기를 달포만에 터득해 학생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경사(經史)에 통달했고, ≪고려사≫ 열전에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가 맞지 않음이 없다고 기록될 만큼 아주 뛰어난 역학자였다. 또한 시조 2수와 몇 편의 시가 전하고 있다.


조선조에 와서 이황(李滉)의 발의로 1570년(선조 3) 예안에 역동서원(易東書院)이 창건됐으나, 1871년(고종 8)에 훼철당했다가 1966년 복원됐다. 또 다른 서원인 구계서원(龜溪書院)은 영남대학교 구내로 옮겨졌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 신현(申賢, 1298~1377)



고려의 학자. 자는 신경(信敬),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숭겸(崇謙)의 후손. 좌대언공의 셋째 아들이요 고려국자진선(高麗國子進善)을 지냈다. 우탁(禹倬)의 문인이다. 충숙왕 때 文科(문과)에 급제한 후 원나라에 가서 朱公遷(주공천).許謙(허겸).錢唐(전당) 등 유명한 학자들과 交遊(교유)하면서 더욱 깊이 학문을 연구해 당시의 대학자로 추앙됐다. 명나라에 자주 초빙돼 明帝(명제)로부터 스승의 대우를 받고 諼齋(훤재)라는 호를 받았다. 또 이르기를 공민왕 때에 영해군(寧海君)으로 봉(封)하고 문정(文貞)으로 증시(贈諡)됐다고도 한다. 율리사(栗里祠) 경백사(景白祠)에 추배(追配), 화해사(華海祠)에 봉안(奉安)했었고 낙동서원(洛東書院)에 배향(配享), 사양서원(泗陽書院)에 봉안(奉安)했다.


# 우길생(禹吉生)


충숙왕 17년(1330)에 과거에 급제해 공민왕 10년에 안우(安祐) 정세운(鄭世雲) 김득배(金得培) 등과 함께 홍건적을 물리쳐 개성을 수복했고 그 다음해인 공민왕 11년(1362) 아들인 우현보(禹玄寶)와 함께 왕을 호종해 청주에 이르러 공북루(拱北樓)에 올라 응제시를 지어 화답했다. 공민왕 12년(1363)에 판운관사(判雲館事)로 단성익대보조공신(端誠翊戴補祚功臣) 2등에 녹훈되고 삼중대광숭록대부(三重大匡崇錄大夫)에 올랐고 적성군(赤城君)에 봉해졌고, 낙동서원(洛東書院)에 배향됐다.



# 우현보(禹玄寶, 1333~140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원공(原功). 아버지는 적성군(赤城君) 길생(吉生)이다.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고 춘추관검열이 됐다. 이어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를 역임했다. 우왕이 즉위하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고, 곧이어 제학으로 승진했다. 그 뒤 대사헌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오래 역임하면서 정사를 주관하고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고, 순충익대좌리공신(純忠翊戴佐理功臣)에 봉해졌다.


1388년(우왕 14)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자 우왕의 명령에 따라 좌시중에 임명돼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해 파직됐다. 그 뒤 공양왕이 즉위하자 인척인 관계로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졌다. 1390년(공양왕 2)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됐으나 이초(彛初 ; 尹彛와 李初)의 옥사에 연루돼 외방으로 유배됐다가 곧 석방됐다.


그러나 다음 해 대간의 탄핵을 받아 다시 철원으로 유배되고, 곧 풀려나 단산부원군(丹山府院君)으로 다시 봉해졌다. 1392년 이방원(李芳遠) 일파에 의해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되자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렀다. 그래서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의해 다시 탄핵을 받고 경주에 유배됐다가 곧 석방됐다.


조선이 건국되자 광주(光州)에 다시 유배됐다가 이듬 해 석방됐고, 1398년(태조 7) 정도전(鄭道傳) 일파가 제거된 뒤 복관됐고, 1399년 단양백(丹陽伯)에 봉해졌다. 1400년(정종 2)에 제2차 왕자의 난 때 문인 이래(李來)로부터 반란의 소식을 듣고 이를 이방원에게 알려준 공으로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에 봉해졌으나 곧 병사했다.



장손 성범(成範)이 공양왕의 부마로 왕의 재위시에는 탄핵을 받았으나 곧 풀려났고, 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 우배선(禹拜善, 1569~1621)


조선 중기의 의병장.문신. 본관은 단양(丹陽). 자는 사성(師聖), 호는 월곡(月谷). 할아버지는 현감 봉(鳳)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집안살림을 도맡아 하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 화원.달성.최정산(最頂山)에서 왜군과 싸워 연전연승해 그 위용을 떨쳤다.


이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천거로 예빈시참봉에 기용되고, 계속해서 용감히 싸웠고, 군기시판관이 됐다. 이어서 합천군수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관직을 버리고 귀향했다. 그의 거처를 모르는 조정에서는 수소문 끝에 그를 찾아 1600년 금산군수에 명했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정사를 전적으로 하리(下吏)에게 맡겨 부역이 고르지 못하고 백성들의 유망사태를 빚는다 해 파직시킬 것을 청하자 스스로 사직했다가, 1603년 다시 낙안군수(樂安郡守)를 지냈고, 1605년에는 선무원종공신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됐다.


서원 규모는 300여 평 규모의 정원에 정문의 입구인 進德門(진덕문)을 들어서면 이 서원의 강당인 정교당(正敎堂)이 높은 화강석 주춧돌로 樓閣(누각)처럼 떠있고 뒷편 계단따라 올라가면 사우인 계현사(啓賢祠)가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져 자리잡고 있다


사당인 계현사(啓賢祠)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단층 맞배지붕으로 처마는 겹처마이다. 이익공 형식의 건물로 매 칸마다 사분합문 형식의 문을 달았고,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돼 있다. 또 강당인 정교당(正敎堂)은 정면 8칸, 측면 2칸의 대규모 건물로 ‘ㄱ’자형으로 꺾여있고, 강당의 역할과 함께 동서재의 역할을 모두 담고 있는 성격의 건물이다. 이에 따라 3칸 마루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실에는 ‘처인헌(處仁軒)’이라는 당호를 걸었고, 서쪽으로는 ‘지경재(持敬齋)’라는 당호를 걸었다. 전면으로 돌출된 부분은 2칸은 누형식의 마루이고 나머지 2칸은 온돌방으로 시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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