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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3] 도응유-도경유 형제를 봉향하고 있는 '병암서원(屛巖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6 12:4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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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1625년(인조 3) 도경유가 낙음정사(洛陰精舍)를 지어 수학.강도(講道)했다. 1675년(숙종 1) 병암서당을 창건헤 후손들의 종회당 겸 후학을 양성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를 1785년(정조 10)에는 도응유(都應兪)와 도경유(都慶兪) 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병암서원으로 승호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후 1868년(고종5)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을 1924년 지역유림과 후손들의 열의로 복원했다



2000년 대구광역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서원일대가 완전 재개발을 위한 구획정리가 됨에 따라 옛 서원을 헐고 2001년 8월 23일 재건축 기공식을 갖고 조감도와 같이 공사해 2003년 5월에 사당, 강당, 동서재 등 목조건물 10여동을 새로 중건했다. 1924년 중건한 서당은 그 한켠에 아직도 남아있다.


# 도응유(都應兪, 1574~1639)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해보(諧甫), 호는 취애(翠厓). 아버지는 원량(元亮)이다.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인이다. 선조대에 진사시에 합격했다. 최영경(崔永慶)을 구호하고 오현(五賢)의 문묘종사를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배척하자 그 잘못을 반박했고, 박이립(朴而立) 등이 정구를 모함하자 상소해 스승의 억울함을 해명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에 의병을 일으켰고, 1627년 정묘호란에는 소모장(召募將)이 돼 정경세(鄭經世)를 도왔다. 주리파(主理派) 성리학을 강조해 경험적 세계의 현실문제.사회문제보다 도덕적 원리에 대한 인식과 그 실천을 중시했다. ≪오현예설 五賢禮說≫을 편찬했다. 대구 병암서원(屛巖書院)에 봉향됐다.


# 도경유(都慶兪, 1596~163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내보(來甫), 호는 낙음(洛陰).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손처눌(孫處訥) 세분선생의 문인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시에 합격하고 정묘호란 때 호남으로 세자를 호종했고, 난이 끝난 뒤 금부도사.평양서윤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도관찰사 심연(沈演)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쌍령전투(雙嶺戰鬪)에서 쌓아놓은 화약의 폭발사고로 패전하였다.



그 죄로 유배갔다가 잠시 뒤에 잘못 집행됐음이 드러나 풀려나서 귀성도중에 원인(怨人)의 위해로 사했다. 뒤에 이 화약폭발사고가, 그의 비장 박충겸(朴忠謙)(전시의 군율에 의거 참수된 자) 아들이 화풀이로 한 소행임이 밝혀져 좌승지로 추증됐다. 대구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는 ≪낙음집 洛陰集≫ 6권 2책이 있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후 1924년 사당과 강당 등이 복원됐으나 2000년 대구광역시의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2003년 병암서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철거하고 현재와 같이 신축했다.



경내에는 사당인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인 양정당(養正堂), 동서재인 구인재(求仁齋)와 강의재(講義齋), 내외삼문인 쌍휘문(雙徽門), 소원문(紹源門)이 있다. 외삼문 정면에 강당이 자리잡고 좌우로 동서재가 있다. 내삼문을 거치면 사당이 있다. 서원입구에 현대식 건물로 병암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사당인 숭현사(崇贒祠)는 도응유(都應兪)와 도경유(都慶兪)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돼 있다. 배흘림기둥을 사용했고 5량가 맞배지붕이다.


강당인 양정당(養正堂)은 정면 7칸, 측면 3칸으로 구성됐고, 7량가 팔작지붕으로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있다.



동재인 구인재(求仁齋)와 서재인 강의재(講義齋)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됐다. 초익공식 맞배지붕으로 규모가 큰 편이다.


이 밖에 외삼문인 소원문(紹源門)은 솟을삼문으로 강당의 맞은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내삼문인 쌍휘문(雙徽門)에는 태극문양이 있다. 그 밖에 서원입구에 현대식 건물로 병암회관이 자리잡고 있다. 도응유(都應兪)와 도경유(都慶兪)형제의 문집목판(文集木板) 원본(原本) 300여 매가 지금도 보존돼, 국학진흥원에 기탁하고 처음 사용했던 기와 500여 매를 아직도 보관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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