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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4] 허득량-허복량을 모신 대구 '용강서원(龍岡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8 21:45:18
  • 수정 2023-01-28 21:4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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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을 모신 재실로 1639년 용강서원으로 건립했으나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됐다, 1920년 중창해 용강사(龍岡祠)라 부르고 1986년에 복원해 허득량(許得良)과 허복량(許復良) 양위(兩位)를 배향하고, 9대조인 고려문하시중(高麗門下侍中) 시충목(諡忠穆) 허유전(許有全)을 정위(正位)에 추배했다.

    


# 허유전(許有全, 1243~1323)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해(金海). 초명은 안(安). 충주사록(忠州司錄) 연(延)의 아들이다. 원종 말기에 문과에 급제, 1295년(충렬왕 21) 감찰시사(監察侍使)로 있을 때 왕의 총신의 참소를 받아 순마소(巡馬所)에 감금돼 죽임을 당할 뻔했으나 당시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의 변호로 풀려났다. 


1298년 국학사예(國學司藝)로서 전라도안렴사가 되고, 1304년에 감찰대부 권수동지밀직사사(監察大夫權授同知密直司事)가 됐다. 1307년에 밀직사사로서 지공거가 돼 안분(安奮) 등 33인을 선발했다. 그 뒤 여러 차례 승진돼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지밀직사사를 역임했다. 1303년에 여러 대신들이 세자 충선을 폐할 것을 주청했으나 그는 박경량(朴景亮).유복화(劉福和)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해 세자의 위(位)를 보전했다. 


이에 충선왕이 즉위하자 교서를 내려 포상했다. 1314년(충숙왕 1)에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지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받았다. 1321년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에 이어 정승이 됐다. 이 해에 원나라 티베트〔土藩〕에 귀양간 상왕〔忠宣王〕의 환국을 위해 81세의 고령으로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나라에 갔으나 심양왕 고(瀋陽王 暠)와 그 일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 허득량(許得良, 1597~1637)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국필(國弼), 호는 상무헌(尙武軒). 할아버지는 직장 승립(承岦)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으로부터 배우다가 붓을 던지고 병서를 탐독하고 스스로 ‘상무헌’이라 일컬었다. 1620년(광해군 12) 무과에 급제하고, 오위도총부도사.겸훈련원부정이 됐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수문장 겸 금군별장이 돼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고, 절충장군에 올라 부호군이 됐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제(從弟) 복량(復良)과 함께 민병 수백명을 거느리고 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에 들어가 광주쌍령(廣州雙嶺)에서 많은 적병을 죽이고 전사했다. 


1652년(효종 3)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대구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상무헌유고≫가 있다.



# 허복량(許復良, ?~1636)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김해(金海). 아버지는 운로(雲老)이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의 문인이다. 관이 부총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종형 득량(得良)과 함께 광주(廣州) 쌍령(雙嶺)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민영(閔栐)의 진(陣)에 나아가 청군과 싸우다가 순절했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대구의 용강서원(龍岡書院)에 제향됐다.


경내에는 사우인 충렬사(忠烈祠)를 비롯해 강당인 숭현당(崇賢堂)이 전학후묘의 형식에 따라 배치돼 있고 재실인 용강재(龍岡齋)가 강당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경내에 충목공비(忠穆公碑), 원정비(院庭碑), 세거장비(世居庄碑) 등이 있다.



사당인 충열사(忠烈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단층 맞배지붕 건물로 처마는 겹차머이고 3량형식의 가구구조이다. 공포는 익공형식으로 매 칸마다 쌍여닫이문을 설치하고 내부는 우물마루로 마감했다.


강당인 숭현당(崇賢堂)은 중앙 2칸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동쪽의 수덕헌(修德軒)은 1칸, 서쪽의 사의실(思義室)은 2칸 규모이다.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단층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이며, 1고주5량 구조로 전면에 툇칸을 구성했다.


재실로 사용되는 용강재(龍岡齋)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중앙 1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시설했다. 간단한 3량 구조로 돼 있으면서도 전면에 툇칸을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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