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3] 김하락, “영덕에서 전투에서 중상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순국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1-29 09:34:22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김하락 金河洛, 1846.12.14 ~1896.07.13. 경상북도 의성, 대통령장 1982


'우리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개나 양 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아! 우리 민족은 과연 이 참화를 면치 못할 것인가/내가 차라리 어복(魚腹)에 장사(葬事)할지라도/도적놈들에게 욕을 당할 수는 없다.' - 총상을 입고 강물 속으로 투신하기 전 선생이 남긴 말 -


# 국모가 시해 당하자, 나이 오십 되던 해 의로운 군사들을 일으키기로 맹세


김하락(金河洛, 1846.12.14 ~ 1896.7.14) 선생은 1846년 12월 14일 경북 의성(義城)에서 의성 김씨 운휘(運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자(字)는 계삼(季三), 호(號)는 해운당(海雲堂)이다. 출생 후 서울로 이주한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면서 천문.지리.병법.의학 등의 서적을 널리 탐독했다.


개항 이후 내정 간섭을 일삼으면서 우리나라를 침탈하고 있던 일제는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弑害)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나아가 일제는 친일내각으로 하여금 을미개혁을 시행케 하고, 그 일환으로 같은 해 11월 15일 단발령(斷髮令)을 강제 시행케 했다. 이는 밖으로 개혁의 모양새를 갖춰 침략의 독수를 드러나지 않게 하면서, 안으로 한국을 반(半)식민지 체제로 개편하려는 일제의 침략 책동이었다.


이 같은 민족적 수모와 국가적 위기에 당면해 선생은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몰아내고 국모(國母)의 복수를 이루고자 결심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 의기 투합했던 이종 동생 조성학(趙成學)과 구연영(具然英).김태원(金泰元).신용희(申龍熙) 등의 동지들과 경기도 이천(利川)에서 거의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을 빠져 나왔다.


# 서울의 코 앞 경기도 이천에서 포군들을 중심으로 900명을 모아 강력한 전투력 갖춰


1895년 11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선생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화포군(火砲軍) 도영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의해 포군(砲軍) 100여 명을 선발한 뒤 이들을 앞세워 의병 모집에 나섰다. 우선 구연영을 양근(陽根).지평(砥平), 조성학을 광주(廣州), 김태원을 안성(安城), 신용희를 음죽(陰竹)으로 파견해 각군(各郡) 소속 포군들을 의병으로 모집했다. 그리고 아성에서 창의한 민승천(閔承天) 의진(義陣)과 합세해 1896년 1월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라는 연합의진을 꾸렸다. 이때 선생이 천명한 거의 명분은 이렇다.


1. 소위 을미개혁에 의한 국정의 문란과 일제의 내정 간섭

2. 청일전쟁을 악용한 일제의 불법 무력 침략과 군대 주둔

3.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4. 단발령(斷髮令)의 강행


의진의 지휘부는 창의대장 민승천, 각 군(軍) 도지휘(都指揮) 김하락, 도총(都總) 조성학, 좌군장 김귀성(金龜性), 우군장 신용희, 선봉장 김태원, 중군장 구연영 등으로 조직했다. 병사들은 삼기구대법(三騎九隊法)으로 편성했는데, 병력은 900명 정도였다. 선생의 의진은 주로 포군들을 모집해 조직됐기 때문에 다른 의진보다 훨씬 전투력이 강한 것이 특징이었고, 그것은 이후 의병 활동 과정에서도 여실히 증명됐다.


# 백현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대파. 연합의진 병력 1600여 명으로 증강


의진 편성이 끝나자 선생은 곧 친일정권과 일본군 타도에 나섰다. 그리하여 같은 해 1월 18일 백현(魄峴)에 매복하고 있다가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을 사방에서 협공해 수십 명을 사살했고, 패주하는 잔여 병력을 광주 노루목[獐項] 장터까지 추격해 괴멸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벌인 대대적인 승리의 경험은 이천의진이 최후까지 항전할 수 있는 정신력의 기반이 됐고 이후 의병 봉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백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선생의 의진은 2월 12일 새벽 병력을 보충해 재차 이천으로 공격해 오는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을 맞아 이현(梨峴)에서 이틀 동안 대접전을 벌였다. 하지만 화력이 열세한 상태에서 눈보라까지 몰아쳐 눈을 뜰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선생은 후일을 기약하며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현 전투에서 패전한 선생은 의진을 재정비하고 전투력을 강화키 위해 2월 14일 여주에서 거의한 심상희(沈相禧) 의병장을 방문해 이천에서 함께 활동할 것을 요청했다. 그리하여 그의 승낙을 얻은 뒤, 잔여 병사들과 여주의진을 합쳐 제2차 이천수창의소를 조직했다. 이 의진은 민승천 대신 박주영(朴周英, 혹은 朴準英)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심상희를 여주대장으로 했다. 그밖에는 초기 지도부와 조직 편제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이렇게 의진을 재정비한 선생은 2월 28일 근거지를 이천에서 광주의 남한산성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던 심진원(沈鎭元)이 이끌던 광주의진과 이석용(李錫容)이 지휘하던 양근의진과 합세해 남한산성연합의진을 결성했다. 이때 병력은 1,600여 명이나 됐다고 하니 이 의진의 규모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기 국내 정국은 돌변하고 있었다. 1894년 6월 일본 군대가 경복궁에 난입해 친청(親淸) 민씨정권을 붕괴시킨 갑오변란 이후, 고종은 일제와 친일내각의 위협과 감시 속에서 그동안 마지못해 개혁을 재기해 왔었다. 그러던 가운데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1896년 2월 11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친일내각의 대신들을 역적으로 규정해 포살령을 내리는 한편, 민심 수습책의 일환으로 단발령을 폐지하고 의병 해산 조칙을 반포했다.


진중일기# 남한산성 전투에서 적군 500명 상대로 일방적 승리. 서울 진공을 계획


정국변화와 단발령 폐지라는 명분 상실에 따라 다수의 유생 의병장들이 자진해 의진을 해산해 갔지만, 선생은 왜적 구축(驅逐)과 국모 시해에 대한 복수를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의병 해산이란 있을 수 없음을 거듭 주장하면서 투쟁을 계속했다. 그리하여 이 연합의진은 3월 5일 남한산성을 침공하는 적 500여 명과 공방전을 벌여 일방적 승리를 거뒀다. 이에 고무된 선생 등 남한산성연합의진의 지도부는 3단계의 서울진공계획을 수립.추진했다.


제1단계로 먼저 수원 근방의 의진들이 연합하여 수원성을 점령하고,


제2단계로 남한산성의진과 춘천.분원(分院)·공주·청주 및 수원의진이 남한산성 주변에 주둔한 일본군을 협공으로 격파하고,


제3단계로 삼남 지방 의병까지 연합하여 서울로 진공하여 일본군을 구축하고 러시아 공사관에 있는 고종을 환궁시킨다.


하지만 300여 명의 강화지방대 병사를 증원한 적은 위력을 과시하는 한편, 일부 의병장을 벼슬자리로 회유해 지도부의 분열을 획책했다. 이와 함께 성으로 들어가는 양도(糧道)를 끊고 봉쇄하여 병사들의 전의를 상실케 한 뒤, 3월 22일 대규모의 공격을 감행해 남한산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따라 남한산성연합의진의 서울진공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생이 지휘하던 이천의진도 의병운동의 인적·물적 기반을 거의 상실했다. 그러나 이 같은 서울진공계획은 한말 의병투쟁사에 있어서 최초의 서울진공작전이었고, 대규모의 병력이 참여한 점에서 특별한 의의가 있다.


# 이천의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된 후 새로운 전투 배후지 영남으로 이동


이런 상황에서 구연영.김태원.신용희 등은 의진의 재건을 위해 선생이 표면에 나서서 직접 창의대장을 맡아 줄 것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이천의진의 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선생은, 효과적이며 지속적인 의병 활동의 전개를 위해 영남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했다. 이는 영남이 선생의 연고지라서 의병운동의 활동 기반을 확보 확충하는데 유리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영남과 그 인근 지역은 당시 의병부대의 활동이 가장 왕성한 곳이었던 까닭에 이들과 이합집산(離合集散)하면서 효과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도에 따라 4월 9일 이천을 출발한 선생의 의진은, 여주.흥원(興原).백운산(白雲山) 등지를 거쳐 4월 12일 충북 제천에 도착해 유인석(柳麟錫) 의진의 환대와 격려를 받았다. 그리고 유인석 휘하의 안승우(安承禹) 의진을 도와 장현(璋峴)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하여 유인석으로부터 의병 활동을 같이 할 것을 제의 받기도 했으나, 선생은 본래의 계획대로 영남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고자 사양했다. 그 뒤 선생의 의진은, 단양.풍기.영주 등지를 경유해 4월 20일 안동에 도착했다. 이 때 예천에 있던 서상렬(徐相烈) 의병장이 연합 활동을 요청함에 따라 이들과 합진(合陣)했고, 또 안동의진과도 합세해 연합의진을 구성한 뒤 달성(達城)을 공격했다. 그리고 곧 분산해 선생의 의진은 의성으로 이동하게 됐다.


# 장현, 의흥, 청송, 비봉산 등 곳곳에서 적군 격파. 각지에서 군수 물자 보충 받아


1896년 4월 28일 의성에 도착한 선생의 의진은 금성산(金城山)에 위치한 수정사(水淨寺)에 근거지를 정한 다음, 인근 지역에서 의병을 모집해 병력을 확충하는 한편 5월 9일 의흥(義興)을 공격해 화약.무기 등 군수품을 노획해 화력을 보강했다. 5월 13일에는 이곳에서 활동 중이던 김상종(金象鍾) 의진과 합세하고, 이어 청송의진도 가담시켜 선생은 이천.의성.청송 등 3의진으로 의성연합의진을 조직했다. 선생이 지휘하는 이 연합의진은 5월 14일 적 170여 명이 대구 방면에서 공격해 오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청송 성황산(城隍山) 주위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 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거뒀다.


이로 인해 사기가 올라간 의성연합의진은 각면(各面)에서 군수 물자를 보충 받고, 자발적인 호응 속에서 병사들을 추가 모집해 의진을 확대 개편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연합의진은 5월 20일 비봉산(飛鳳山)에서 적군 100여 명과 교전해 재차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적은 병력을 증원해 5월 25일 반격을 가해 왔다. 선생이 지휘하는 의성연합의진은 이들과 하루 종일 치열한 접전을 벌였고, 결국 화력의 열세로 인해 전세가 불리해지자 선생은 퇴각해 경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 경주연합의진 결성하고 경주성 함락


이에 따라 5월 26일 비봉산을 출발한 선생의 의진은, 황학산(黃鶴山).금학산(金鶴山).황산(黃山).청송(靑松).덕현(德峴).영천(永川) 등지를 거쳐 6월 15일 경주에 도착했다. 선생의 의진은 경주에서 김병문(金炳文).이시민(李時敏).서두표(徐斗杓).박승교(朴承敎) 등 이곳 유림 세력과 다시 연합해 경주연합의진을 결성했다. 이 의진은 조직을 정비한 후 먼저 적군 약 50여 명이 주둔해 있던 경주성 점령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6월 17일 조성학이 선봉이 돼 경주성 동문을 공격해 갔다. 이에 적군이 일제히 포를 쏘며 대항하자 선생은 “너희들이 의병(義兵)에 대항하니 이것은 역적을 돕는 큰 죄악이다. 만약 끝내 미혹을 고집한다면 옥석구분(玉石俱焚)의 경우를 면치 못할 것이다. 빨리 성문을 열어 후회가 없게 하라”고 호소해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진을 이끌고 성문을 공략했다. 이러한 강온 양면전략을 구사해 선생은 적의 전투의욕을 저하시켜 스스로 달아나게 함으로써 손쉽게 경주성을 함락할 수 있었다.


경주성을 점령한 선생은 각 면 유지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 활동에 적극 호응케 하는 한편, 병사들을 성내 곳곳에 배치하여 철통 같은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따라서 선생이 지휘하던 경주연합의진은 6월 22일 대구부에서 파견한 159명의 군사들과 안동진위대의 지원군이 합세한 적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퇴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차 공격에서 패퇴한 적은 총병(銃兵).궁수(弓手) 등 대구부의 정예 군사들로 병력을 보충하고, 나아가 대구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의 지원을 받아 6월 23일 다시 경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대항해 경주연합의진은 30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계속된 전투로 말미암아 탄약이 떨어지고 병사들 또한 동요함에 따라 결국 경주성을 적에게 내주고 말았다.


영덕 남천쑤 의병전투지# 영덕에서 전투 벌이다 2발 피격 당해 중상.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후 선생은, 잔여 병력을 이끌고 달성(達城).기계(杞溪).흥해(興海) 등지를 경유해 6월 29일 영덕에 도착했다. 이동 중에 선생은 기계에서 흩어졌던 병사들을 모으고, 흥해와 영덕에서 의병을 모집해 의진을 다시 정비 확충했다. 그리고 7월 5일 영해의진과 합세하고, 7월 9일 유시연(柳時淵)의 안동의진과도 합진함에 따라 선생의 의진은 대규모의 연합의진을 형성했다. 선생은 이 연합의진을 동원해 영덕 관아를 공격할 계획을 수립하고, 7월 14일 영덕에 도착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때 적군 수백 명이 일시에 기습해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연합의진을 이끌고 이들에 대항해 싸웠으나 병력과 화력의 열세로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선생은 이 와중에서도 전투를 계속 독려하다가 2발의 탄환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이에 선생은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고기 뱃속에 장사를 지내겠다”고 하면서 강물에 투신해 순국했다. 경기도에서 충청도로, 그리고 다시 영남으로 이동하면서 약 8개월 동안 줄기찬 투쟁을 벌였던 선생의 의병 활동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굵고 큰 이정표를 세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