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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7] 오방우 위패를 모신 '덕림서원(德林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01 09:09:21
  • 수정 2023-02-01 22:0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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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덕림서원은 1740년(영조 16)에 고려말의 문신인 오방우(吳邦祐)를 기리고자 영묘제사를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경덕제라 개칭했다가 덕림서원을 세워 배향했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년)에 훼철됐고, 그 뒤 복원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봄,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은 4변(籩) 4두(豆)이다. 재산으로는 전답 1,500여평이 있다.


오방우(吳邦祐, 1313년~1393년)은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동도(東道), 호(號)는 규헌(葵軒),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연총(延寵)의 증손으로 고려 충목왕 때 예부시에 급제하고 공민왕 때 오도안렴사를 지낸 해주오씨 장기 입향조이다. 당시 이성계 일파들이 집권해 많은 현량들을 축출함에 낙향해 강원도 평해에 숨어 살다가 경주 사방으로 옮겨왔다. 그 후에 다시 장기로 이거한 후 81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조선조 영조때에 후손들이 영묘제사를 창건하고, 다시 경덕사라 개칭했다가 덕림서원을 세워 배향했다. 시호는 정헌(貞獻)이다.



경내에 현존하는 건물은 사당인 정헌묘, 강당, 동재, 서재가 있다. 사당에는 오방우의 위패가 봉안돼 있고,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돼 있는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사림(士林)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신문은 향사 때 제관의 출입문으로 사용하고 있다.

 

사당인 정헌묘(貞獻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이익공 양식을 취하고 있다. 장여를 화반이 받치고 있는 모양으로 초가돼 있고, 겹처마에 풍판을 달았다. 잘 치석된 원형초석에 원기둥을 세웠고, 기단은 자연석을 쌓아 올렸다.

 


강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5량가 가구구조이다. 초익공 양식이며,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전면에 원기둥을 세웠고, 두께가 두꺼운 원형초석을 그 아래에 받쳤다. 기단은 장대석을 한줄만 쌓아 다른 강당보다 낮은 편이다. 방바닥 밑에는 붉은색 벽돌을 사용하여 보수 처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배치형태는 서측면에 방을 2개, 동측면에 1개를 두었고 방옆으로 툇마루를 설치했다.

 

동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처마는 홑처마이다. 3량가 가구구조이고, 민도리양식에 납도리를 사용했다. 전면에 각기둥을 사용했고, 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했다.



서재는 동재와 동일한 양식과 규모를 가지고 있고,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처마는 홑처마이다. 3량가 가구구조이고 민도리양식에 납도리를 사용했다. 전면에 각기둥을 사용했고, 문은 쌍여닫이문을 달았고,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했다.

 

외삼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이며 3량가 가구구조로 민도리양식이다. 맞배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에 망와를 사용해 마감했고, 전면에 각기둥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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