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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5]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6대 국무령 '홍진'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01 10:00:42
  • 수정 2023-02-01 10:0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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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홍진 洪震, 1877.08.27 ~1946.09.09. 충청북도 영동, 독립장 1962


우리가 요구하는 바는 망령되게 공상을 꾀하여 오로지 타력(他力)에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5천년의 역사를 지니고, 문화가 발달하여 인심이 고상하고, 2천여만의 단일민족으로서 이루어졌다. 10여년을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왔음은 독립 자치의 능력이 있다고 하는 확신 때문이었다. 금일에 이르러 근본적 해결을 하지 않고 오직 지엽적 미봉에 그친다면 평화 실현의 날은 무(無)할 뿐만 아니라 침략자의 편리를 조장하는 결과에 이를 것이다. - 1921년 선생이 태평양회의의 각국 대표에게 보낸 독립요구서 중에서 -


# 가난한 편모 슬하에서 홀로 공부해 검사가 됐으나, 의병 처벌 거부. 국치를 맞자 사표 던져


홍진(洪震, 1877.8.27 ~ 1946.9.9) 선생은 개항 직후인 1877년 8월 27일 서울 차동(車洞 : 현재의 서소문)에서 풍산 홍씨(豊山洪氏) 재식(在植)과 청주 한씨(淸州韓氏) 사이 3형제 가운데 차남으로 출생했다. 처음 이름은 면희(冕熹), 호는 만오(晩悟) 또는 만호(晩湖)이다. 명문의 가난한 선비 집에서 출생한 선생은 불행하게도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게 됐으나 어머님으로부터 엄한 교육을 받았다. 특히,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 간에 우애가 돈독했을 뿐 아니라 남달리 시국의 혼란과 서구 열강의 침략에 일찍이 눈을 뜨고 새로운 학문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했다.


1898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선생은 한성평리원(漢城平理院) 주사를 거쳐 1899년 평리원 판사가 됐다. 1905년부터 충청북도 충주(忠州)재판소 검사로 전보돼 근무하던 선생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검사직을 사직했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 관리가 돼 우리 민족을 지배하고 수탈하는데 앞장설 수 없다고 하는 선생의 투철한 민족의식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것은 선생이 검사직에 있으면서도 일제에 저항한 의병에 대한 논고(論告)를 거부한 사실에서 잘 알 수 있다.


#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변호사, 13도 대표자 대회 열고 한성정부를 설립


이후 선생은 서울과 평양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들의 변호와 변론에 노력했고,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선생은 충북 청주군의 연락 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조직적인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국내에서 임시정부, 즉 한성정부(漢城政府)의 수립을 계획했다. 이는 요원(燎原)의 불길마냥 전국적으로 확대돼 가는 3.1운동을 지도하고, 또 일제 타도 이후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같은 원대한 구상에서 1919년 3월 17일 선생은 한성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모임을 서울의 한성오(韓聖五) 집에서 가졌다. 이 자리에서 선생은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김사국(金思國) 등과 한성정부의 수립을 논의한 뒤, 13도 대표자 대회를 열어 정부 조직과 조각(組閣)을 결정하기로 했는데, 그 소집 책임을 선생이 맡았다.


그리하여 4월 2일 선생의 주도로 인천(仁川) 만국공원(萬國公園)에서 13도 대표자 대회가 개최돼 여기에서 한성정부의 조직과 조각이 정비 확정됐다. 그리고 서울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한성정부의 수립을 대내외에 선포하기로 결의했다.


# 상해로 망명. 한성정부, 상해 임시정부, 러시아령 국민의회정부를 통합


선생은 이 같은 사실을 국외 각 지역에 알리기 위해 4월 8일 미리 정부 조직표와 조각 명단을 휴대하고 상해(上海)로 망명했다. 선생을 통해 국내의 임시정부 수립 사실을 알게 된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에 자극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같은 해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공포했고, 선생은 임시의정원의 의원으로 선임돼 활동하게 됐다. 5월 2일 제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선생은 당장 시급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독립공채(公債)의 발행·독립의연금의 수합.세금의 징수 등을 제안해 실시케 했다.


그리고 법조 경력이 풍부했던 선생은 7월부터 임시의정원의 법제위원장으로 선출돼 임시정부 초기의 불합리한 제도의 개선과 불비한 법률의 제정 등 근대적 법치의 틀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특히 서울에서 수립된 한성정부,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그리고 노령에서 수립된 국민의회정부를 통합해 통일 임시정부를 구성하도록 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선생은 13도 대표자 회의에서 조직과 조각이 이뤄지고, 또 국민대회를 통해 그 수립이 공포된 한성정부가 국민적 기반을 가지고 있음을 내세워 한성정부를 정통 정부로 해여 상해 임시정부와 노령 국민의회정부가 통합하는 형식을 취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리하여 9월 6일 임시의정원에서 임시헌법 개정안과 정부 개조안이 통과됨에 따라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임하고 한성정부를 그대로 승인함으로써 선생의 주장이 관철됐고, 3개 정부의 통합이 이뤄지게 됐다.


# 열강들의 태평양 회의 앞두고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 발송


홍진 선생 국무령 취임 기사(《독립신문》1926년 9월 3일자)이후 선생은 1921년 4월 상해 한인교민단(韓人僑民團) 단장으로 피선되어 활동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지위 향상과 권익보호에 힘썼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선생은 제3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출됐다. 이 때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 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 축소 문제와 극동 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1921년 11월 11일부터 워싱턴에서 태평양 회의를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 회의에 한국 문제를 상정시켜 파리 평화 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기 위해 이승만(李承晩)을 전권대사, 서재필(徐載弼)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대표단을 구성해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했다. 선생은 임정의 독립 외교 활동을 지원키 위해 1921년 8월 상해에서 대(對)태평양 회의 외교후원회를 조직해 간사장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우리 대표단의 외교 활동을 후원하는 선전과 모금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의원 25명의 서명을 받아 태평양 회의에 참석하는 각국 대표들에게 독립청원서를 발송했다. 여기에서 선생은 세계의 평화, 동아(東亞)의 행복과 정의 인도를 위해 한국 독립 및 자주의 완전한 해결을 요구함으로써 한국대표단의 독립 외교 활동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상해의 정국은 임시정부의 개편을 위한 국민대표회 개최 문제를 둘러싸고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國民代表會籌備委員會) 사이의 대립이 심화되고, 독립운동은 답보 상태를 거듭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은 1922년 7월 안창호(安昌浩).신익희(申翼熙).조소앙(趙素昻).이시영(李始榮).김구(金九) 등 50여 명과 함께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를 조직해 이를 타개하고자 했다. 이를 통해 임시의정원과 국민대표회주비위원회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대표회를 조기 개최해 임시정부를 명실 상부한 독립운동의 최고통괄 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하게 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그럼에도 1923년 1월부터 9월까지 개최된 국민대표회는 임정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첨예화되더니 결국 파국으로 끝나 임정은 더욱 왜소화되고 말았다. 이같은 독립운동계의 난맥상에 상심한 나머지 선생은 1924년 4월 임정의 법무총장직(1922년 9월 선임)을 사임하고, 한동안 강소성 진강(鎭江)에 은거하기도 했다.


# 임시정부 제4대 국무령이 되어 강령 발표. “비타협적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이 시기 그동안의 정국 혼란이 지속되자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30일에 내각책임제 정부 형태인 국무령제 개헌안을 의결해 임정의 재건을 모색해 갔으나 임시정부는 정상화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임시의정원은 1926년 7월 선생을 국무령에 추대해 정국 수습과 정부 정상화의 책임을 맡겼다. 이에 따라 제4대 국무령에 취임한 선생은, 최창식(崔昌植).조소앙.김응섭(金應燮).조상섭(趙商燮) 등을 국무위원으로 선임해 정부 조각을 마치는 한편 9월 27일 정국의 정상화와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위해 다음과 같은 <시정 방침 3대 강령>을 발표하였다.


시정 방침 3대 강령


1. 비타협적(非妥協的) 자주 독립운동을 진작한다.

2. 전민족(全民族) 대당체(大黨體)를 건립한다.

3. 각 피압박 민족과 대연맹을 체결하고, 기타 우의(友誼)의 국교(國交)를 증진한다.


임정 수반으로 선생이 천명한 이와 같은 시정 방침은 이후 독립운동 선상에서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여겨졌음은 물론 국내외에서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을 촉발시켰다. 특히 자치파 등 기회주의를 배격한 전민족 대당체 건립의 천명은, 국내에서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민족협동 전선체로 신간회(新幹會)를 탄생시킨 하나의 요인이 됐다. 그럼에도 독립운동 단체 사이의 분규가 계속되자 1926년 12월 국무위원들과 함께 국무령을 사퇴한 선생은 이후 각지에 산재한 민족의 혁명적 총역량을 하나로 뭉쳐 국내외에 유일한 대독당을 조직하자는 분위기와 여론을 조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 주도


홍진 선생의 유묵(1945)우선 1927년 4월 좌익을 대표한 홍남표(洪南杓)와 함께 <전민족적 독립당 결성의 선언문>을 발표해 좌우합작에 의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제창한 뒤, 이동녕(李東寧).조상섭.조완구(趙琬九).조봉암(曺奉岩) 등 40여 명과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했고 같은 해 9월 북경(北京).광동(廣東).무한(武漢).남경(南京) 등지의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와 연합해 한국유일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를 성립시켰다. 이 때 선생은 진덕삼(陳德三).김두봉(金枓奉).배천택(裵天澤).장건상(張建相) 등과 함께 상무위원으로 선출됐다. 뿐만 아니라 선생은 유일독립당 촉성을 종용하기 위한 대표로 선발돼 1928년 1월 만주로 갔다. 당시 선생은 중국 본토 각지에서 민족유일당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어느 지역보다도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절대다수인 중국 동북 지역에서의 유일당 운동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만주 지역은 우선 한국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곳으로 독립투쟁의 기지화가 이미 이뤄져 있고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과 그 동원 가능성에 있어서 절대적인 이점이 있고, 또한 독립전쟁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한 군자금 모금이 유리하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도 이 지역에서의 통합운동은 독립운동 선상에서 전력의 극대화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다. 선생은 신민부.정의부.참의부 및 교민단 등 만주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순방, 설득해 각 단체의 통일을 종용하면서 유일독립당 건설에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들도 이념상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고 민족유일당 건설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 길림성에서 한국독립당 창당. 일제 만주 침략에 한중 연합작전으로 대응


이렇게 되자 선생은 우선 뜻을 같이 하는 동지들과 독립운동 정당을 창당한 뒤 이를 확대해 민족대당을 결성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30년 7월 길림성에서 이청천(李靑天).황학수(黃學秀) 등과 함께 생육사(生育社)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함으로써 완벽하지는 못하나마 평소 염원했던 민족유일당을 창당하고 당 대표인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했다. 이같은 한국독립당은 이당치국을 목표로 하면서, ①민본(民本) 정치의 실현, ② 노본(勞本) 경제의 조직 ③ 인본(人本) 문화의 건설 등을 강령으로 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러한 한국독립당을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을 총망라한 만주 유일의 독립운동 정당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당군으로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고, 총사령으로 이청천을 선임해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의 설치는 선생에게 있어 그가 1926년 9월에 임정의 국무령으로 취임해 발표한 시정 방침 3대 강령 중 하나인 전민족대당체 건립의 숙원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지도부 구성은 아래와 같다.


중앙위원장(당수) 홍진(洪震), 총무위원장 신숙(申肅)

조직위원장 남대관(南大觀), 선전위원장 안훈(安勳)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 경리위원장 최호(崔灝)

감찰위원장 이장녕(李章寧)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이 본격적으로 감행되자 선생이 이끈 한국독립당은 군사 조직을 강화해 군구(軍區) 제도를 실시하면서 이청천으로 하여금 한국독립군을 지휘해 중국 항일구국군과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1932년 9월 쌍성보(雙城堡) 전투, 1933년 7월 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 동경성(東京省) 전투, 9월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 등에서 한.중 연합 작전으로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는 등 눈부신 활동을 전개했다. 대전자령 전투는 1920년대의 청산리 대첩에 못지 않은 독립전쟁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32년 만주국을 세워 만주 지역을 사실상 식민지화하면서 이 지역의 한국독립군과 중국 항일구국군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2월 김상덕(金尙德)과 신숙(申肅) 등을 임시정부와 남경(南京)의 국민당(國民黨) 정부에 보내 한중 연합 항일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면서 투쟁역량을 제고시켜 갔으나 일제의 대대적인 공세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한국독립당은 1933년 11월 본부를 남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홍진 선생 서거 기사(《동아일보》1946년 9월 10일자).한국독립당을 이끌고 남경으로 온 선생은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항전에 결집할 것을 역설하면서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의 통합을 이루어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도록 하는데 진력했다. 우선 선생은 1934년 2월 남경에서 윤기섭(尹琦燮).신익희 등이 주도하던 한국혁명당과 합당해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창당했다. 이 같은 양당의 통합은 본질적으로 두 정당 모두가 무장투쟁 노선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립운동 방략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는데, 이 때 선생은 새로 창당한 신한독립당의 대표인 중앙위원장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나아가 신한독립당을 이끌면서 선생은 1935년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 최동오(崔東旿)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조소앙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김규식(金奎植)의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 5당 통합에 참여해 민족혁명당을 창당함으로써 민족통일전선을 확대해 갔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에 참여한 선생은 당 내에서의 의열단계와 비의열단계 간의 주도권 쟁탈전과 파벌 싸움에 실망했고, 이로 인해 1935년 9월 민족혁명당을 탈당하고 말았다. 그 후 선생은 항주(杭州)에서 한국독립당을 재건하고 뜻을 함께 한 조소앙 등과 함께 정당을 주도하며 대일항전을 계속하여 갔다.

# 신한독립당, 민족혁명당에 이어 한국독립당 새로 세우고 광복군 편성을 실행


그러던 중 1937년 7월 7일 일제는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뤄지는 대륙 침략 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 같은 상황 변화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해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민족주의 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光復陣線.광복진선)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民族戰線.민족진선) 결성이었다. 선생은 이 시기에 한국독립당을 대표하여 남경에서 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 등과 범민족주의 세력의 민족단일전선 결성을 합의하고, 8월 17일에는 미주의 국민회.동지회.단합회.애국단.부인애국단 등 6개 단체와 합류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그 대표가 됐다.


이후 일본군의 침략으로 남경이 위기에 직면하자 임시정부를 따라 1937년 11월 남경을 떠나 한구(漢口).장사(長沙).광동(廣東).유주(柳州) 등을 거쳐 1939년 5월 사천성(四川省) 기강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임시의정원 의장에 재선됐다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내무장)으로 선임되자 의정원 의장직을 사임하고, 국무위원으로서 임정 강화에 노력했다. 그리고 1940년 5월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등 광복진선의 9개 단체가 합동해 한국독립당을 결성할 때, 선생은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됐고, 이어 중앙감찰위원장으로 선임돼 활동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에서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교섭해 이청천을 중심으로 하는 광복군의 편성을 추진하다가 이를 임시정부로 이양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중경으로 이동한 직후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사령부를 창설하고 광복군을 편성하게 됐는데, 여기에 또한 선생의 노력이 깃들여 있었다.


홍진 선생 묘비이후 김구(金九)와 김원봉의 협상으로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고, 유림(柳林)의 무정부주의자연맹 또한 임시정부에 참여해 이른바 통합의회를 형성한 임시의정원에서 선생은 1942년 10월 다시 의장으로 선출됐다. 이는 선생이 좌우 독립운동 세력 모두에게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임정의 확대 강화, 광복군의 전력 강화, 임정의 국제적 승인 획득, 재중한인의 권익 옹호 등을 위해 노력했다.

 

# 반탁운동 참여 건국 사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광복 후 선생은 1945년 12월 2일 임정 요인의 제2차 환국 때에 광복의 환희와 자주적 민족국가 건설의 희망을 안고 귀국했다. 하지만 귀국 직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선생은 민족 자주성의 수호를 위해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리하여 1946년 2월 전국적 반탁운동 단체인 비상국민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반탁운동과 건국 사업에 혼신의 노력을 경주하던 중 9월 9일 6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선생은 구한말부터 광복 이후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립을 위해 국내외에서 꾸준히 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920년대 이후 항일 독립운동 세력들이 해결해야 할 커다란 과제인 이념대립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을 전개해 독립운동계의 통합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제공-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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