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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6] 국어학자 '정인승' 박사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01 10:22:16
  • 수정 2023-02-07 08: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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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정인승 鄭寅承, 1897.05.19 ~1986.07.07. 전라북도 장수, 독립장 1962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에 대항하여 우리 고유 문화를 보호하는 방법으로 한글 연구를 택하고 이에 관심을 가지게 된 선생은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위당 정인보선생에게 영향을 받으며 본격적인 한글 연구에 힘을 쏟았다. 졸업 후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한글>지의 발행을 주관하고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등 우리 말 체계화를 위한 핵심적인 연구들에 참여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우리 말 [큰사전] 편찬 작업을 완수하고 평생을 한글 연구와 후진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 연희전문학교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 영향 받아


정인승(鄭寅承, 1897. 5. 19 ~ 1986. 7. 7) 선생은 대한제국이 성립되던 해인 1897년에 전라북도 장수군 계북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호는 건재(健齋)이다. 선생은 향리에서 한학자 한응수에게 한문을 익혔고 이후 전북 진안군에 위치한 용담공립보통학교 2학년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했다. 보통학교 졸업 후에는 서울에서 연정학원과 중동학교를 거쳐 내자동에 있는 종교예배당 영어 강습소에서 영어를 배우기도 했다. 그 무렵 일제의 정치적 압박과 경제적 수탈은 더욱 가혹해졌고, 특히 문화말살 정책을 피면서 억압의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이에 선생은 일제의 이러한 문화말살 정책에 대항해 우리 고유 문화의 파멸을 막는 방법은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을 지키고 연구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한글 연구에 진력했다. 1925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선생은 같은 해 4월부터 전북 고창고등보통학교의 교사로 임용됐다. 이 학교에서 1935년 8월까지 근무하면서 우리말과 글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는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다닐 때 받았던 위당 정인보 선생의 영향이기도 했다. 이후 선생은 국학의 연구, 그 중에서도 우리말과 글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온 힘을 쏟았다.


[한글]제6권 1호 (1938)선생은 ‘말은 민족의 단위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이고, 말의 단위가 곧 민족의 단위이므로 우리말이 곧 우리 겨레다.’라 하는 어문(語文) 민족주의적 인식을 갖고 있었고, 일제 식민지 시기 한글을 비롯한 국학의 연구는 단순히 학문적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교사로 재직하는 동안 일제에 의해 추진된 우리 글과 말의 사용 및 교육 금지 등의 황민화 정책에 위기를 느낀 선생은 교사로 재직 중이던 고창고등보통학교를 사직하고 1936년 4월 한징 선생과 함께 조선어학회에 가입해 활동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이윤재, 이중화, 한징 등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 위원으로 선발되어 민족적 대사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했다. 뿐만 아니라 1937년 6월부터는 이윤재 선생의 뒤를 이어 <한글> 잡지의 발행을 주관하면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에도 열정을 쏟아 갔다.


# 사전편찬 준비 작업 도중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옥고 치러


1940년 6월 선생은 이희승과 함께 ‘한글 맞춤법 통일안’ 개정안을 성안하여 발표했고 1941년 1월에는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결정에 참여함으로써 조선어사전 편찬의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생의 한글 사랑과 한글 연구와 보급을 통한 겨레사랑은 1930년대 후반부터 더욱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인 소위 ‘황민화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됐다. 일제는 1937년 3월 모든 관공서에서 일본어의 상용을 강요하더니 1938년 3월 ‘조선교육령’을 개정 반포해 각급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폐지하고 수업에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했다. 나아가 한글의 연구와 보급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조선 독립의 기초를 형성해 가던 조선어학회를 해산시키기 위한 공작을 벌이게 됐다. 그리하여 1942년 결국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일제는 식민지 동화정책의 최후단계인 민족 말살 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이른바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지배 정책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위해 ‘일본어의 보급과 우리 글, 우리말에 대한 사용 금지 및 말살’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조선어학회의 한글 연구와 사전 편찬 작업은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며 따라서 일제는 이들을 도전 세력으로 간주한 것이다.


한글문답(1950)1942년 10월 선생을 비롯한 조선어학회 주요 인사들이 대거 체포됐다. 일제는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을 중단시키고 조선어학회를 강제 해산시킨 후, ‘고유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운동의 형태다.’라는 함흥지방재판소의 예심종결 결정문에 따라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를 적용했다. 당시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일제 함흥지방법원 판결문 요지를 보면 조선어학회 활동이 민족정신을 유지 계승시키려는 근원적인 독립운동임을 확인할 수 있는 바,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첫째, 조선 민족의 문화와 경제력을 양성 향상시키는 동시, 민족의식을 환기 앙양하여 독립의 실력을 양성한 다음 정세를 보아 무장봉기, 그 밖의 적당한 방법으로 독립을 실현시키려는 운동이며


둘째, 이와 같은 취지에서 우선 선내(鮮內) 각 지방의 방언을 정리하여 표준적 조선어를 사정할 필요성을 느껴 훈민정음 반포기념 축하식에서 이를 발표 공표하였고


셋째, 외래어 즉 국어(日本語)와 외국어로 사용되는 언어의 표기 방법을 통일하여 그 통일(안)을 일반에 공포하였으며


판결문

넷째, 선내(鮮內) 각지에 언문강습회를 개최하여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을 환기 앙양시켰고


다섯째, 조선어와 문학의 보급과 조선 민족의식의 앙양을 위하여 훈민정음 반포기념 축하식을 거행하였으며


여섯째, 조선어와 문자보급 발달에 의하여 조선 고유 문화의 향상을 도모하는 동시에 조선 민중의 민족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하여 기관지 <한글>을 월간잡지로 발행하였고


일곱째, 조선어학회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을 계속하여 조선 독립 및 민족정신의 고취를 일관시킬 목적으로 활동하였으며


여덟째, 조선 독립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조선 민족의 고유 문화 향상과 민족의식의 앙양을 실행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으며


아홉째, 조선어학회를 조직하여 조선 독립의 목적 아래에 실력 양성운동으로 문화운동의 기초인 어문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에 의해 기소돼 조사를 받던 중에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순국했고, 선생은 1945년 1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으로 출옥했다. 광복 이후 선생은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사업을 계승해 진행된 한글학회의 [큰사전](전6권) 편찬을 1957년 10월까지 주재하여 완간함으로써 민족적 대사업을 완수했다. 이후 선생은 전북대학교, 중앙대학교, 건국대학교에서 한글 연구와 후진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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