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한국의 전통사찰 85] 아도화상에 의해 창건된 백제고찰 대원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2-02 07:51:25
  • 수정 2024-04-02 04:14:09

기사수정


[박광준 기자] 대원사는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천봉산(天鳳山)에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하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503년(무령왕 3) 아도(阿道)가 창건했고, 통일신라시대는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1260년(원종 1) 송광사의 제5대국사인 자진(慈眞)이 크게 중창하고 중봉산(中鳳山)을 천봉산으로, 죽원사(竹原寺)를 대원사로 개칭했다.



그 뒤 1731년(영조 7) 도갑사 주지로 있던 탁오(卓悟)가 해감(海鑑) 등과 함께 법당을 비롯해 성재암(聖齋庵)·문수전을 중창했고, 필한(弼閑)이 아미타삼존불상을 봉안했다. 1758년에는 태연(泰演) 등이 중건하였는데, 혹은 1759년에 현정(玄淨)이 중건했다고도 한다. 1766년에는 단청 불사와 함께 지장보살상을 개금하고 시왕탱화를 조성했다.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쳤고, 여순반란사건이 있기 전까지는 천불전(千佛殿)을 중심으로 한 수많은 당우와 상원암(上院庵).호적암(虎蹟庵) 등의 부속암자가 있었으나, 여순반란사건 때 대부분 소실되고 현재는 극락전과 요사채만이 남아 있었으나 1990년대 이후 현장(玄藏)이 선원.자인당.일주문.요사 등을 지었고, 1993년에는 태아(胎兒) 영가천도를 위해 태안(胎安)지장보살과 6지장보살 및 108 동자상을 봉안했다.



1996년에는 성모(聖母)산신을 모신 산신각인 만덕전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1981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또 1973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자진국사부도는 높이 3m로 극락전 옆에 건립돼 있다. 탑신은 팔각원당형(八角圓堂型)이고, 중석(中石)에는 쌍잎 연화문이 심도 있게 부각돼 있고, 상대석(上臺石)에는 앙련(仰蓮)이 8엽(葉)으로 두드러져 있고 맨 위에는 보주가 있는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부도이다.


대원사의 창건설화는 경상북도 선산군 모레네 집에 숨어 살면서 불법을 전파하던 아도화상은 하룻밤 꿈속에 봉황이 나타나 "아도! 아도! 사람들이 오늘밤 너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오는데 어찌 편안히 누워 있느냐. 어서 일어 나거라, 아도! 아도!” 하는 봉황의 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창밖에 봉황이 날개짓 하는 것을 보았다. 봉황의 인도를 받아 광주 무등산 봉황대까지 왔는데 그곳에서 봉황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됐다. 봉황의 인도로 목숨을 구한 아도화상은 3달 동안 봉황이 머문 곳을 찾아 호남의 산을 헤메다가 마침내 하늘의 봉황이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봉소형국(鳳巢形局)을 찾아내고 기뻐 춤추면서 산 이름을 천봉산이라 부르고 대원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 태아령천도 세상 빛을 보지 못한 어린 넋들을 위하여!...대원사의 빨간 모자 동자승



대원사는 빨간 모자 동자승으로 유명해진 절이다. 빨간모자 동자승은 낙태 유산된 아기들의 영혼을 상징하는 조형물로, 빨간모자 둘레에는 흰 띠가 둘러 있다.



사람은 부모의 결합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부정모혈(父情母血), 어머니의 혈은 붉은 색으로 표현하고 아버지의 정은 흰색으로 나타낸다. 부모의 사정에 의해서 햇빛도 보지 못하고 죽어간 핏덩이를 태아령이라고 부른다. 2017년 기준 출생아가 1년 40만명인데 낙태아는 50만건으로 추정된다. 공식집계에 드러나지 않는 낙태까지 포함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날 것이다. 



지금 이 땅의 산하는 온통 눈감지 못한 한맺힌 어린 영혼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 차 있다. 구만리장천을 중음신으로 떠도는 어리고 어린 영혼들의 슬픈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다. 한 생명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젖을 먹이고 보살펴 주듯이, 한 생명이 이 세상을 하직하면 내생의 몸을 받기까지 어둠에서 헤메지 않도록 보살펴 주어야 한다. 살생의 죄업을 참회하고 어린 영가들의 해탈을 기원하는 불경이 장수멸죄경이다.


# 김지장전 



2001년 역사 속에 실재했던 천년 고찰 대원사에 김지장전이 건립됐다. 이는 지장보살의 위업을 기리는 것 외에 신라 출신 지장보살의 법맥이 현세의 옛 백제땅에 이어졌다는 데에도 의미가 크다. 천년 고찰 전남 보성의 대원사에 신라왕자 김교각 스님의 기념 전각인 김지장전이 건립됐다, 김지장전 신축을 마친 대원사에서는 여러 문화계 인사와 재가불자들, 일반 시민들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성식을 봉행했다. 김지장전 건립을 기념해 한.중.일 삼국의 차문화 교류대회가 펼쳐져 삼국의 차인들이 김지장스님 전에 헌공다례를 올리기도 했다. 


이는 김지장스님의 거룩한 가르침과 차에 대한 업적을 기리고 우리 차문화의 오랜 전통과 역사를 되새기자는 의미에서 매우 뜻 깊은 행사였다. 대원사는 신라왕자로 태어나 중국의 4대 성인이자 육신불이 되신 김지장스님 전에 매월 지장재일 헌공다례를 올리고 있다. 또 신축한 김지장전 주변에 구화산의 금지차 씨앗을 다시 뿌리고 차시(茶詩) 비석을 세우고 다신초당을 지어서 지장스님의 진영을 봉안하고 한국의 다신(茶神)으로 받들 계획이다.


# 대원사 극락전(꽃잎 세월이 묻어있는 사찰)



대원사 극란전은 천봉산 봉우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둔 정남향을 하고 있는 사찰로서 6.25동란 이전까지만 해도 10여동의 건물들이 유존되고 있었으나 여순사건때 모두 불타버리고 거의 폐허가된 상태였다. 그러나 다행이도 당시 극락전 건물만 남아있게 됐다. 사찰의 연혁을 보면 오랜 전통을 갖고있어 조선사찰사료에 의하면 초창(初創)은 신라지증왕시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이뤄졌고 그 후로 고려시대에 와서는 조계 제오세 원오국사(圓悟國師)가 중건했고 조선조로 넘어와서는 영조 43년에 중건했다고 기록되고 있다.


건물의 규모를 보면 정면 3간, 측면 2간의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 형식의 건물로 기단(基壇)은 전면에 1m이상의 잡석축대(雜石築臺)를 쌓고 양면 및 배면은 얕은데 전면중앙에는 계단이 설치돼 있다. 초석은 자연석으로 덤벙 주초방식이며 기둥은 약간 배흘림이 있고 우주에는 미세한 귀솟음이 보인다. 공포의 형식은 평방위호부터 짜여진 다포형식으로 전후 각주간에는 공간포를 각각 2요씩 배열했고 출목(出目)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내사출목)으로 외칠포작(外七包作) 형식이다. 



외부쇠서는 삼앙일수설(三仰一垂舌)로서 앙설밑에는 연봉을 조출시켰다. 가구(架構)를 보면 대량(大梁)이 내고주(內高柱)에 끼워져 상부가구재 (上部架構材)를 받고 있으며 종량(宗梁은 대량(大梁)위에 놓여진 동자주(童子柱)가 받게 했다. 천정은 하중도리(下中道里) 위로부터 우물천정으로 처리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단천은 내외부 금모노단청(錦毛老丹靑)을 했다. 불단위로는 중앙에 아미타불이 본존불로 모셔져 있는데 좌우보처(左右補處)로 두 협시불(脇侍佛)이 있어야 하나 한불은 6·25후 분실했다 하면서 한불의 협시불만 우측에 남아있다.


# 자진국사부도탑


대원사(大原寺)에는 이기(二基)의 부도(浮屠)가 있는데 일기(一基)는 사찰(寺刹) 입구에 있는데 1982년 유실됐고, 자진국사(慈眞國師) 부도는 극락전 바로 오른편 원내에 유존(遺傳)되고 있다. 이중의 방형지대석(方形地臺石) 위에 소판팔엽(八葉)의 복연(伏蓮)이 덮여있고, 그 밑에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을 이룬 대석(臺石)에 두줄의 선각(線刻)을 돌리고 그 속에 안상(眠象)이 아닌 사각형의 띠를 돌렸다. 그 위로는 탑의 전체적인 균형때문인지 아니면 중간에 유실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중대석(中臺石)을 소실한 채 바로 앙연좌대석(仰蓮坐臺石)을 올렸다. 탑신 역시 팔각으로 전면에는 '慈眞圓悟國師淸照塔'이라 음각명기됐고 그 후면은 범자(梵字)가 새겨져 있다. 



통식(通式)의 탑신에 비해 높고 세장(細長) 한편으로 신라말기에 선보인 부도의 섬세함이나 특출한 조법(彫法)은 나타나지 않으며 또 석질이 달라 후보(候補)한 듯한 느낌이 든다. 실개석은 좁고 두꺼운 팔각으로 처마밑은 수평인데 그 안에 몇 줄의 원형음각의 띠를 돌렸다. 또한 옥상(屋上)은 기왓골이 있고 경사가 급하며 우동(隅棟)을 내려와 전각(轉角)에서 밋밋한 반전을 보였다. 상륜부에는 복발(覆鉢) 이 있고 그 위로 구형석재 두 개가 보주(寶珠)로 올려져 있는데 이는 뒤에 후보한 듯하다. 


이 부도(浮屠)는 보림사의 동부도 복연, 양연의 화변이 끝에서 넓적하게 퍼진데 반해 연변(蓮辯)의 첨단에서 뽀쭉하게 빠진 것이 특이하고, 후대로 내려오면서 보인 양식상의 변화임을 엿볼수 있겠다. 자진원오국사는 송광사 제5세 국사로서 서기 1215년에 태어나 충렬왕 12년(AD 1286년) 72세로 입적할 때까지 약 30여년 동안을 조계산 송광사에 머무르면서 종사를 크게 떨쳤고 한때 이곳 대원사에 주석(住錫)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부도의 조성도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 보성 대원사 극락전 관음보살 달마대사 벽화



보성 대원사 극락전의 내부 동.서측 벽에 큼직하게 그려진 관음보살 및 달마대사 벽화는 조선후기 주불전 내부에 조성된 벽화 중 동.서 측면에 관음보살도와 달마도가 각각 독립된 존상으로 대칭을 이루면서 배치됐다. 서벽에 그려진 관음보살 벽화는 기암괴석과 대나무를 배경으로 파도 위 연화대좌 위에 앉아있는 백의의 관음보살과 선재동자를 그렸는데,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의 뒤편에 서서 靑鳥를 안고 있는 특징 있는 도상을 보여준다. 또한 동쪽 벽에 그려진 달마대사 벽화는 선종에서 즐겨 도상화 됐던 달마대사와 혜가단비의 고사를 그렸는데, 큼직하게 그려진 달마대사와 달리 혜가를 작게 그려 달마의 모습을 더욱 부각시켜 묘사했다. 이 벽화는 대원사에 소장된 '寶城天鳳山大原寺大法堂十王殿與衆寮重刱及丹靑兼地藏改金畵各帖記文'(대원사 티벳박물관소장)이라는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1766년의 지장보살도와 시왕도 조성 및 1767년 대법당 중창 때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보성 대원사 지장보살도 및 시왕도 일괄



1766년(영조 42)에 화승 색민(色旻), 유심(有心), 계안(戒眼), 행종(行宗) 등 18명이 명부전 봉안용으로 조성한 탱화로 지장보살도 1점, 시왕도 10점, 사자도 2점 등 총 13점으로 구성돼 있다. 1946년에 대원사 지장전이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광주 덕림사 명부전에 봉안했다가, 2003년 4월 10일 다시 대원사로 옮겨왔으며 현재 대원사 티베트박물관에 봉안돼 있다.


지장보살도는 중앙의 대좌 위에 앉은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6대보살과 사천왕,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그렸고 하늘에는 오색구름을 배치했다. 지장보살의 왼쪽에는 문수보살과 관세음보살, 금강장보살, 동방천왕과 남방천왕, 도명존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보현보살과 대세지보살, 제장애보살, 북방천왕과 서방천왕, 무독귀왕을 대칭으로 배치했다. 그림의 화면구성과 색채 등이 18세기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왕도는 조선 후기 시왕도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상단에는 시왕의 심판장면, 하단에는 지옥장면을 배치했다. 그림의 좌우 상단에 각각의 대왕 명칭을 적고 화면 상단에는 거대한 대왕과 판관, 사자, 우두신중, 천녀 등을 묘사했다. 푸른 뭉게구름으로 나눠진 하단에는 지옥의 형벌 장면을 그렸는데, 제1대왕부터 10대왕까지 인간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기까지의 과정을 10단계로 묘사해놓았다.


사자도는 직부사자도(直符使者圖)'와 '감재사자도(監齋使者圖)' 2점을 좌우 끝에 배치해놓았다. 사자(使者)는 중생을 명부세계로 데려가는 임무를 맡고 있는데, 백마와 함께 있는 직부사자 뒤로 하원장군(下元將軍)을 묘사했다. 감재사자는 적마나 청마와 함께 표현되는데, 여기서는 청마가 상원장군(上元將軍)과 함께 표현돼 있다.


전체의 구성이 온전하게 보전돼 있고 제작연대와 작가를 알 수 있고, 화면의 구도나 색채가 18세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어 2004년 9월 20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됐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4월 29일 보물로 승격 지정됐다./사진-윤정숙 기자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