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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서 태어나 갑신정변때 멸문지화한 서재필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2-04 12:43:14
  • 수정 2023-09-03 0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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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재필기념관


[박광준 기자] 서재필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전라도 보성군 문전면 가천리(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 있던 외가 성주 이씨 집안에서 동복 현감 아버지 서광효(徐光孝, 1830. 8. 22 ~ 1884. 11. 2)와 어머니 성주 이씨 이조이(李召史, 1830 ~ 1885. 1. 12) 사이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아버지 서광효의 6촌 형제인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가면서 충청도 공주목 진잠현(현 대전광역시 유성구)으로 이주했다.


양부 서광하의 처가는 신 안동 김씨로 문충공(文忠公) 김상용의 후손이었는데, 이 때문에 서광하는 세도가문에 발을 걸칠 수 있었다. 이 때 서재필은 양어머니의 오빠인 예조참판 김성근(金聲根, 1835. 3. 19 ~ 1919. 10. 3)의 집에 갔다가 김옥균[을 만나면서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된다.



그는 1879년 임금이 친히 주관하는 전강에서 1등을 하고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그 동안에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동대문 밖 절에 모여 일본 책들을 돌려보면서 서구화에 대한 꿈을 꿨다. 1882년(고종 19) 3월 22일 열린 별시 문과에 병과 3위로 급제했으나, 집안 배경이 약했던데다가 온건개화파가 급진개화파들을 견제하면서 10개월 가까이 보직을 받지 못하고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정7품), 부사정(副司正:종7품) 등으로 있었다.


이후 권지(權知:견습관원)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종9품), 훈련원 부봉사(訓練院副奉事:정9품) 등을 지내다가, 김옥균의 특명을 받고 일본으로 유학해 1884년 토야마 소년 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양어머니 안동 김씨의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러야 할 것을 고종이 나라의 명을 받으라 명해서 복상을 멈춘다. 곧바로 그는 신식 사관학교를 창설할 목적으로 설립된 병조 예하 신식 군대 훈련소인 조련국의 사관장(士官長)으로서 생도들을 양성하지만 얼마 안있어 온건개화파의 방해로 훈련소가 폐지되고 해방영이 설치되면서 그 역시 보직이 없어진다.


결국 그를 비롯한 급진개화파들은 견디다 못해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키는데, 그는 생도들을 데리고 무사로서 활약했다. 당시 20세였던 그는 갑신정변 실패 후 집안이 박살나는 멸문지화를 겪는데 아내 광산 김씨(1862 ~ 1885. 1. 12)는 자살하고 하나 있던 2살 난 아들은 돌봐주는 이가 없어 굶어 죽는다. 양가(養家)와 친가(親家) 가릴 것 없이, 양아버지 서광하는 갑신정변 직후 서재필을 파양했으나 결국 연좌제를 당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노비로 전락했고, 생부 서광효는 자결했다.




생가 형제들 중 맏형 서재춘(徐載春, 1859. 3. 4 ~ 1888. 8. 14)은 감옥에 갇혔다 독약을 먹고 자살했고 이복 형 서재형은 관군에 붙잡혀 참형을 당했다. 생모 성주 이씨는 노비로 끌려갔다가 1885년 1월에 자살했고 서모와 이복 동생들 역시 죽임을 당했다. 이미 족숙 서광래에 양자로 갔던 첫째 남동생 서재창 역시 도주하다 붙잡혀 처형당했고 여동생 서기석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함경도로 피신한다. 화를 피한 사람들은 아직 어렸던 둘째 남동생 서재우(徐載雨, 1869. 9. 5 ~ 1905. 1. 24)와 맏형 서재춘의 외아들 서영석(徐英錫, 1879. 2. 5 ~ 1966. 2. 29) 서재창의 유복자 서◯석 등이 있었고 결혼한 누나들도 출가외인이라 화를 피했다.


당시 급진개화파를 지원해 주던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당사자들은 몰라도 가족들까지 연좌제로 몰살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조선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들을 미개국이랍시고 경멸하게 됐다고 한다.


갑신정변 실패 후 서재필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제물포로 도망가 조선을 빠져나가려고 일본 상선에 오른다. 그들이 일본인 선장의 배에 탑승해 숨어있을 때 관리들과 당시 조선에서 근무 중이던 독일 출신 외교관 묄렌도르프가 제물포항으로 급습해 갑신정변의 역적들인 세 사람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서재필은 이 때 자결하려고 했으나 일본인 선장이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하게 할 수 없다"고 둘러대면서 그들을 돌려보내 서재필은 생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일본으로 망명하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진 그들은 일본에서도 찬밥 대우를 받는다. 도쿄에서 1년간 생활하면서 자신들이 토사구팽당한 것을 알게 된 서재필은 서광범, 박영효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망명했고 김옥균은 청나라로 건너갔다가 이후 암살당한다.



미국에 갔을 초기만 해도 서재필은 당연히 영어를 못하는 상태였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해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 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했다. 초반에는 영어 실력 때문에 일자리조차 제대로 구하기 힘들어 전단지를 붙히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흑인을 상대로 한 노예 제도가 폐지된지 고작 20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미국 사회에서의 인종차별도 그의 삶을 힘들게 하는 요인 중 하나였는데 심지어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 짐칸으로까지 밀려날 정도로 멸시당했다. 함께 미국에 건너온 박영효는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서광범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에서 지내다가 잠시 일본으로 돌아가버리면서 서재필은 홀로 미국 생활을 이어가야 했다. 조선에서는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 그를 감시하고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그는 항상 신변의 위협을 받아야 했다.


그러다가 1886년 행운이 따랐는지 존 홀렌벡(John Hollenback)이라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이니아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이 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으로 역사, 철학, 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됐다. 서재필은 마땅히 지낼 거처가 없어 교장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마침 교장의 장인이 갓 퇴임한 법관이었고 그와 같이 살면서 서재필은 미국의 민주주의, 역사, 사회 제도에 대해 학습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서재필은 수학, 헬라어, 라틴어 등에서 우등상을 받으며 졸업하게 된다. 해리힐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재필은 코크란 단과대학에서 물리학과를 다녔다. 그러던 중 홀렌벡은 서재필에게 라파에트 대학으로 옮겨 전공 공부를 마친 뒤 프린스턴 신학 대학을 졸업하고 조선에 기독교 선교사로 파송갈 것을 서면으로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홀렌벡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더이상 지원해주지 않겠다고 통첩을 했으나 서재필은 조선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홀렌벡과 결별하게 된 서재필은 라파에트 대학교의 한 교수와 인연이 닿아 계속 지원을 받으면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그는 워싱턴 D.C.로 이주하기 위해 라파에트 대학교를 자퇴했다.





컬럼비안 대학교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서재필은 1894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 시민권을 따게 된다. 조선에서는 이미 역적으로 낙인찍혀 있을뿐더러 부모형제, 부인, 갓난아들까지 모조리 죽었으니 미국으로 귀화하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주경야독으로 1894년 컬럼비아 대학교(현 조지 워싱턴 대학교의 전신) 부설 코크란 대학을 세균학 전공으로 졸업하고 병원에서도 잠깐 근무하다 이후 워싱턴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얼마 안가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uriel Armstrong)과 결혼한다. 이후 1896년 스테파니 제이슨(Stephanie Jaisohn Boyd)를, 1898년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을 낳았다.


서재필이 미국에서 의사 면허도 따고 결혼해 어느 정도 안정된 삶을 꾸리는 동안 조선에서는 외세의 힘에 밀리는 조정으로 인해 국가 체계 자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미국에서 10여년간 생활하면서 미국 사회와 민주주의적 정치 시스템에 큰 동경을 가지게 된 서재필은 조선의 상황을 보며 그나마 남아있던 조선과 조선 민중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되고, 점차 후진적으로 변하는 조선을 증오하게 된다.


이후 일본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졌던 갑오개혁 과정에서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 서광범 등이 귀국해 복권됐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부 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부 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했다. 그러나 당시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고 그 후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해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같은 해 12월 26일 갑신정변의 실패로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옛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당시 신변 문제 때문에 서재필은 미국에서부터 사설 경호원을 고용해 귀국길 내내 대동하도록 했다.



귀국 직후인 1896년 1월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 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 고문에 임명됐다. 여기서 서재필은 정부의 보조금으로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국내 최초의 민간 대중 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사회 전반에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해 국민을 계몽하려던 목적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당시 서재필은 한국어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면서 철저히 미국인으로서 영어만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서재필은 조선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조선인들을 "you, korean"이라고 표현하거나 왕 앞에서도 신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점점 정치화됐고, 초기에는 나름대로 양호했던 정부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서재필은 결국 미국으로 추방된다. 하지만 독립협회 내부에서는 여전히 입지가 남아 있어서, 독립협회 인사들이 참여한 중추원 최초 의제에서 서재필을 각료로 추천하는 인물도 있었다. 중추원에는 관료 추천권이 없었지만, 최초의 의제가 새로운 관료를 추천하는 것이었고 여기서 박영효, 서재필 등 당시 대한제국 정부가 학을 떼던 인물들이 여럿 선출된다. 그리고 이는 중추원과 독립협회가 해산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다시 미국에 도착한 후 곧바로 미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외과 의사로서 미국-스페인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가했다. 그리고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 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하지만 조선과 완전히 연을 끊은 것은 아니라 1919년 3.1 운동을 전후해선 다시 기고문 등을 실으면서 외교적 선전 활동을 하게 된다. 임시 정부의 대미 외교 고문을 한동안 맡기도 했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1925년엔 호놀룰루의 범태평양 회의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석해 일제의 한반도 침략을 규탄하기도 했다.


허나 독립 외교 및 선전 활동은 상당수가 사비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고, 그는 3.1운동 후 그 때까지의 독립운동의 경비로 자기의 병원과 문방구점 등 재산을 팔아서 사재(私財) 76,000불을 모두 독립운동에 쏟아 넣고, 1926년에는 완전히 움직일 수 없는 무일푼의 처지가 됐다. 이후 1942년 3월 1일엔 워싱턴에서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 전쟁 전승 기원 기념식에 참가했고, 1942~1945년까진 미군 징병 검사 의무관으로 자원 봉사 활동을 해 미 국회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주로 미국 정치의 중심지인 미국 동부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1919년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했고, 16일에는 필라델피아 리틀극장에서 미국 독립기념관까지 태극기를 들고 행진하면서 대한독립을 외쳤던 ‘한인독립대회(Korean Inpendence League)’를 주도했다. 당시 필라델피아시는 군악대를 지원했다. 1921년 3월 2일 미국 뉴욕 맨해튼에서 서재필 박사는 3.1운동 2주년을 기념하는 '한인연합대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기미 독립선언서'를 영문으로 낭독했다. 이 행사에는 미국 동부지역 한인들과 함께 현지 미국인들까지 무려 1,300명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윌리엄 E. 메이슨(일리노이) 당시 연방하원의원도 자리에 참석해 한국의 독립을 지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당시 미국의 주류 언론으로부터도 주목을 받았는데, 일간 뉴욕타임스는 이튿날 '메이슨 의원, 일본의 한국 침략을 맹비난하다'(Mason raps japan for piracy in Korea) 제하의 기사를 게재했다. 메이슨 의원이 일본의 침략행위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미국 연방정부에 대해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추진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미군정의 초청으로 고문 자격으로 입국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으나 당시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이였기 때문에 피선거권이 없었다. 본인도 대통령 자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정세와 고령[41] 문제로 인해서 출마할 생각도 없었다고 한다. 이때 라디오 방송 연설을 영어로 했다고 한다. 그래도 지지자가 없지는 않았는지, 국회에서 간선으로 실시한 제1회 대통령 선거에서 무효표가 되긴 했지만 1표를 얻긴 했다. 그러나 어쨌든 서재필의 고사로 인해 이승만과 서재필을 경쟁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은 틀어졌고, 이는 이승만이 이후 대통령에 한결 편하게 오르는 기회가 된다. 그래도 보은격으로 김규식에 이어 조선적십자사 2대 총재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곧 사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고 1951년 사망했다. 1977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됐다.



필라델피아 공동묘지 납골당에 안치된 서재필과 그의 아내 유골은 돌봐주는 이가 아무도 없어 묘지 관리인이 주인없는 유골인줄 알았다고 할 정도로 수십년째 방치됐다. 이를 1983년 현지 교민 장익태 씨와 서재필 친형의 증손자인 서동성 씨가 사비 2천 달러를 들여 좀 더 좋은 납골당으로 이장해 관리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은 독립운동으로 활동하느라 모아둔 재산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고, 독신으로 살았던 그의 둘째 딸도 한겨울에 난방도 못하고 살만큼 궁핍했다고 한다. 생전에 딸을 둘 두었으나 장녀와는 사이가 소원했는지 장녀에게서 난 손자(93년 당시 70세)는 아주 오래 전부터 연락이 두절됐고, 차녀는 독신으로 사망해 사실상 혈육이 없는 것과 같았다. 차녀 뮤리엘은 사망하기 전 서동성에게 “아버지의 유골을 한국으로 모셔달라”며 울면서 부탁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1994년에는 그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봉환돼 그해 4월 8일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됐다. 외증손 이상호 씨가 유해를 운구했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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