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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79] 황보인-황보석-황보흠을 배향한 '광남서원'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07 08:3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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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단종을 보좌하다 1453년 계유정란 때 수양대군에게 살해된 황보인(皇甫仁)과 함께 살해당한 황보석(皇甫錫), 황보흠(皇甫欽)을 배양키 위해 1791년(정조 15)에 지방유림과 그 후손들이 세웠다. 세덕사라 하다가 1831년(순조 31)에 ‘광남서원’이라고 사액(賜額)됐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毁撤)됐다가 1900년에 복원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3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황보인(皇甫仁, ?~145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임(琳)이다.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다.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됐고, 1420년 좌헌납이 됐다.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돼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해 곧 장령이 됐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됐고,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됐다.



다음해에는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됐다. 1431년 강무행행(講武行幸)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죽거나 다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됐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형조참의로 복직됐고,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됐다. 그리고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 등을 역임했다. 같은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했고,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됐다. 1440년에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됐다. 그리고 그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돼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했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돼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했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49년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다가 그 해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됐다.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고, 이듬 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됐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했다. 다음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했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됐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됐으나 실행되지는 못했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 : 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됐다. 그러다가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됐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 장릉(莊陵 : 端宗陵) 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됐다. 그리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고, 1807년에는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구룡포읍의 경남서원(慶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됐다.

 


황보석(皇甫錫, ?~1453년)은 황보 인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고, 황보흠(皇甫欽, ~ 1453년)은 황보 인의 아들로서 아버지와 함께 화를 당했다.


광남서원은 복양문(復陽門), 강당, 내삼문, 사당까지 하나의 축에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배치를 보여준다. 강당 앞에 좌우로 동재와 서재를 배치해 비교적 온전한 서원의 모습을 갖추었다. 숭의당 뒷쪽으로 자연석 축대를 2단으로 쌓아 사당 영역을 형성했다. 사당 영역의 우측에 숭의당 옆쪽으로 계단을 통해 진입이 가능한 곳에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을 두었다. 복양문의 좌측에 비각이 있고 복양문의 외부로 담을 둘러 싼 것은 특이한 점이다. 서원의 우측에 고직사를 두었다.

 


사당인 충정묘(忠定廟)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 기단위에 콘크리트 마감을 하고 원형 초석과 원기둥을 얹었다. 사당의 주위는 기와를 얹은 돌각담으로 둘렀고 평삼문을 두어 신문으로 사용했고, 강당인 숭의당(崇義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이다.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한 단의 대리석 기단에 원형 초석과 원기둥을 얹었다. 평면은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측에 온돌방 1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이며 전면에 반 칸 규모의 튓간을 두었다. 방의 정면에는 세살문, 마루 쪽으로는 불발기문을 두었다.

 

동재와 서재는 3칸 규모의 ‘ㅡ’자형으로 된 홑처마 맞배지붕집이다. 공포는 초익공 구조이며 가구는 3량가이다. 평면은 세 칸 모두 방이며 전면에 쪽마루를 대었고, 복양문(復陽門)은 솟을삼문형식의 문간채로 문의 조우에 방이 있다. 고직사는 서원의 우측에 배치됐고 3칸 규모의 ‘ㅡ’자형 민도리집이다. 평면은 좌측에 부엌, 우측에 방 2칸을 두었다. 추원단(追遠壇)의 경우 입구를 낮게 만든 것이 특징이다. 유물로는 황보 인의 책판과 문집 외에 서적 30여 권이 소장돼 있다. 그리고 충비단양의 비석이 있으며, 황보인의 비가 비각과 함께있다.

 

# 충비단양의 비석



충비 단양은 조선조 세종과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보 인의 여종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1453년(단종 1)에 황보 인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됐다. 이에 화가 전 가문에 미칠 것을 예견한 단양은 황보 인의 손자인 황보 단을 물동이에 숨겨 이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100여리를 걸어 황보 인의 사위가 살고 있던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 까지 죽을 듯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진 못했다. 화가 곧 그곳에도 미칠 것을 우려한 단양은 노자를 얻어 무작정 남쪽으로 도망치다가 장기현 관할인 오늘날 포항시 남구 대보면 짚신골이란 곳에 머물게 된다. 그곳에서 단을 친자식처럼 키워 성인이 된 뒤에야 그에게 집안 내력을 일러 주게 된다.



단의 증손 황보 억은 현 성동리 뇌성산 자락으로 이거해 세거지를 이뤘다. 이처럼 황보 가문은 충비 단양의 도움으로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고 4대가 숨어 살다가 290년만인 숙종 때에 와서야 누명이 풀려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이(황보 석, 황보 흠)이 관적을 회복했다. 황보 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도 하사받았다. 단양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황보 가문의 후손들이 서원 뒤뜰에 비를 세웠다./사진제공-(사)한국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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