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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87] 아름다운 자연과 불교의 정서를 담은 남해 '보리암'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3-02-08 20:40:57
  • 수정 2024-04-02 04: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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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보리암은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원효대사께서 창건하고 수도하시던 절로서 금산(錦山)의 한복판에 관음봉을 기대고 위치한 유서 깊은 절이다.


바위의 장엄한 기운이 뭉쳐 의젓한 모습으로, 용을 타고 전후좌우 절을 하는 남순동자 바위와 관음조가 읊조리는 듯한 바위들을 거느리고 남쪽바다 용왕에 무슨 가르침을 내리는 듯하다. 보리암은 이런 바위들을 등지고 놓여 있다.


원래는 남해 보광산상 관세음보살 시현(示現)도량으로 그 옛날에 원효대사께서 이 산 이름을 보광산(普光山)이라 부르고, 동록(東麓)에 범우(梵宇)를 지어 보광사라 불렀다. 그 뒤에 조선태조 이성계가 기도해 왕위에 오른 일을 감안해 이씨왕조의 원당으로 또한 호국기원도량으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생긴 그대로 절이며, 바위머리마다 자연법당인 이곳은 그늘이 짙은 사부대중들의 기도 수도처라 할 수 있으니 뉘라서 이곳을 아니 그리워하랴.



보리암은 고대로부터 유래가 깊어왔으니 고대의 가락국 김수로왕도 이곳에서 기도하고 대업을 이뤘다고 하며 왕의 칠왕자도 외숙인 장유국사(長有國師) 옥보선인(玉寶仙人)을 따라 출가해 남해 낙가산 금산(錦山) 보리암에서 수도하다가 다시 가야산을 거쳐 지리산 반야봉에서 수도해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불교 남방전래설(南方傳來設)을 증명하는 것으로 북방전래설(고구려 소수림왕 2年.AD372)보다 292년 앞섰다. 그리하여 수많은 출세도인과 현인달사가 여기를 찾아와서 수도해 가피력을 얻은 이가 헤아릴 수 없다. 옛날에는 사명(寺名)이 상도솔암, 의상암으로 지명사전(地名事典)에는 기록돼 있다.


그동안 여러 번 고쳐짓고 손도 많이 보았고, 그 후 양소황스님이 주지로 부임해(1966~1985年) 보광전, 산신각을 중창(重創)하고, 간성각, 범종각, 보리암요사, 의상대 등을 신축했다. 그 후 명도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진입로 개설 극락전 창건, 해수관음상을 건립했고, 동욱(東郁)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탑대 가는 길의 돌계단 공사, 탑대 주위 돌담 축조공사, 극락전 지하 하중보강공사 등을 시공했다.



묘유(妙有)스님이 2000년 주지로 부임해 그간 보광전을 중수하고 의상대, 관음원 간성각, 산신각을 중건했고 설법전을 신축했다. 2010년 능원스님이 주지로 부임해 극락전 개금불사와 예성당 영단 및 굴법당을 조성하고 석불을 봉안해 기도 도량의 면모를 쇄신했다.


보리암의 창건주 원효대사 삼국간의 전쟁과 통일의 격변기였던 7세기에 살았으나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해방자였고 자유인이었고, 1백여부 2백 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요 대학자였다. 스님의 성은 설씨로 신라 26대 진평왕 39년(617) 현재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 당시 압량군 불지촌(押粱郡 佛地村)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요 담내(談奈)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날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송(宋) 고승전'의 기록에 의해서 15세쯤 출가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타고난 천재성을 간직하고 있던 스님은 특정한 스승에 의존하지 않았으나 학문범위는 불교학 전반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유가서(懦家書)와 도가서(道家書)에도 상당히 밝았음을 그의 저술에 나타나는 인용문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혜공과 대안 두 스님으로부터는 무애행을 통한 대중교화와 거리의 교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650년(진덕여왕 4년) 34세의 스님은 진리의 벗, 의상스님과 함께 당나라의 유학길에 올랐으나 실패했다. 45세(661년)때 다시 시도했으나 남양만이 멀지 않은 적산의 한 무덤 속에서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떻게 따로 구하겠는가"라고 깨달은 후 의상스님을 뒤로 한 채 돌아와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당시 사회에서 대중들로부터 왕실에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스님의 일생은 686년(신문왕 6년) 3월 30일 신혈사(神穴寺)에서 입적(入寂)했다.


# 보리암전 3층 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



보리암전 3층석탑은 가야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서 돌아올때 풍파를 만나 건너 오지를 못 하는 중 파사석을 싣고 무사히 건너왔다고 한다. 이 석탑은 원래 김해시 구지봉 산아래에 있는 호계사에 봉안돼 있던것을 그후 원효대사가 다시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74호로 지정됐다.


# 해수관세음보살상(海水觀世音菩薩像)



보리암에서 가장 기(氣)가 강한 곳으로 알려진 해수관세음보살상은 1991년 한 기업가의 원력으로 세워졌다. 당시 지형적 영향으로 육로로 운반 할 수 없었던 해수관세음보살상은 헬기를 이용해 탑대에 안치했다. 좌대는 연꽃문양으로 하좌대와 상좌대로 이뤄져 서로 마주 보게 포개져 있다. 왼손에는 보병을 들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밖으로 향한 채 가슴에 두었다. 의습은 양어깨를 감싸고 각각의 팔을 휘감으면서 아래로 흘러 내렸고, 흘러내린 옷깃은 그 끝이 살짝 들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형상이다. 한해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하고 가는 이 해수관세음보살상은 보리암의 제1명소로 알려져 있다.


# 보리암 보광전(菩提庵 普光殿)



보리암의 주법당으로 대웅전 역할을 하고 있는 보광전은 신라 신문왕 3년(683년) 초창이래 여러번의 중건 중수를 거쳤고 현 보광전은 1968年에 중건하고, 2000年에 중수했다. 보광전에 모신 주불은 서천축 아유타국 허공주가 모시고 왔다는 관세음보살(좌보처 남순동자, 우보처 해상용왕) 삼존상(三尊像)이며 목조관음보살좌상불감은 2015년 1월 15일 경남 유형문화재 제 575호로 지정됐다.


# 산신각(山神閣)




산신각의 현판은 '산령각'이라 되어 있고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단청은 모로단청으로 별지화로 매화가 그려져 있고, 좌우측에 신선도가 그려져 있다. 산신각의 내부에는 호랑이 위에 앉은 산신상이 모셔져 있다.


# 간성각(看星閣)



지금 종무소로 이용하고 있는 간성각은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별을 보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다른곳에서 보기 힘든 노인성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이 별은 12월 하순과 1월 사이에 볼 수 있다.


# 범종각(梵鐘閣)



종각은 1977년 사중에서 건립하고 범종은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신동관 선생이 시주했는데 크기나 무게 때문에 헬기로 공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일체 지옥중생과 만경창파 수륙고혼의 이고득락과 해탈을 염원하고 있다.


# 극락전(極樂殿)



극락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각지붕으로 보리암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크다. 좌.우에는 대세지보살과 관세음보살이 협시불로 모셔져 있고, 1996년부터 원불을 조성해 2000년에 완성했다. 많은 원불이 봉안되어 있다고 해 만불전(萬佛殿)이라고도 한다./사진-윤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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