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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88] 예산 덕숭산 수덕사(1), 관음성지에서 일엽스님 다시 태어나다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2-15 06:33:12
  • 수정 2024-04-02 04: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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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덕숭산 남쪽에 자리한 수덕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이자 한국 33관음 성지의 한 곳으로 백제 위덕왕(544~597) 재위 시에 창건된 고찰로 추정되고, 석가 아미타 약사 삼존불을 모신 대웅전(국보49호)은 1937년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의 내용으로 1308년 (충렬왕 34년)에 건립돼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문



    ▲수덕여관


     ▲수덕사선미술관


     ▲충청남도 기념물 제103호 


수덕여관은 고암 이응노(1904~1989) 화백이 1944년 구입해 6.25전쟁 당시는 피난처로 사용했고, 1959년 프랑스 건너가기 전까지 머물면서 수덕사 일대의 아름다운 퐁경을 화폭에 담아 다수의 작품을 남긴 곳으로, 가운데 앞마당을 두고  ‘ㄷ’자 초가가 감싸고 있다. 


이응노 화백은 전통과 동양과 성양의 세계를 접목하는 시도를 한 근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예술가로 국내뿐만 아니라 유럽 화단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암각화




프랑스로 떠나기 전 바위에 2점의 문자적 추상화로 암각화를 남겼다. 둘레 17m, 높이 85cm, 또 하나는 둘레 7.6m, 높이 75cm의 바위에 문자체로 그림을 조각했다.  글자 같기도하고 사람 모양 같기도 한 것이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화강암 바위에 온갖 사물과 현상의 성(盛)과 쇠퇴함을 추상화로 표현한 작품이다.


고암화백은 무엇을 그리냐고 물으면 “사람 살아가는 모습이다. 여기에 네 모습도 있고 내 모습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복원기념비


2006년 1월 수덕사가 고암의 조카로부터 매입한 뒤 지방비를 투입해 복원 사업을 해 오늘에 이르게 됐다. 



     ▲수덕사선미술관 입구











고암 화백이 암각을 제작할 때 박귀히(부인)여사가 "당신 너무 고생하시고 이제 나이도 있으니 좀 쉬지않고 그 어려운 돌에 글자를 새긴다고 그러세요, 좀 쉬세요. 하니 고암화백께서 삼라만상의 성쇠를 만들고 있네" 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환희대 


     ▲원통보전(園通寶殿)



일엽스님(一葉.1896~1971)의 속세에서 이름은 김원주였다. 최초의 한국 근대 여성 화가였던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로, 구한말의 시대상에 맞서 자유연애 여성 운동가였다. 그는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최초의 여자 유학생이었으며, 귀국해 시인.수필가.평론가로 활동하다가, 1928년 33살에 수덕사 만공 스님을 만난 후 견성암에서 수계를 받고 일엽스님으로 다시 태어나서, 만공선사의 “글 또한 망상의 근원이다”라고 하여 붓을 꺾었고, 양자로 14살 먹은 아들이 찾아와 어머니를 외치면서 눈물을 쏟자, "울음을 그쳐라. 나에게 다시는 '어머니'라고 불러서는 안된다. 자신은 이미 불문에 들어섰다며 '스님'이라고 해야한다."며 모자의 인연을 끊는 말을 했다고 전한다.


견성암은 국내 첫 비구니 선원이다.  “일엽스님은 앉아서 주무실 때가 많았다. 꽤 오랫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잘 때도 눕지 않고 좌선함)를 하셨다”고 전해진다.


신여성 김일엽은 당대의 작가였으나 출가 후 펜을 꺾고, 거의 30년 만에 다시 글을 쓰면서 “내가 나로부터 시작되지만, 내가 남과도 연결돼 있다. 그 사람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이치를 전하기 위해 다시 글을 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세존이 예던 길’


세존이 계실 때에

세상 나지 못하였어도

세존이 예던 길이

내 앞에 놓였으니

예던 길 앞에 있으니

아니 예고 어이리.


'세존이 예던 길'이라는 제목으로 1932 년 10월 불교지에 발표했던 시다. 



'짝사랑’


1


못 안아 볼 님이라서

가슴 홀로 울고 있고

못 미칠 두 팔이라

빈 가슴만 비벼댈 제

네 혼은 철없는 아가 같아

울부짖어 마잖으니

님도 하마 응하옴 있사올듯

봉윗 구름 비 되어 나리듯이

단 위 '단상' 손길 한번만 드리소서.


2


짝사랑의 그 열도는

악마의 열병 같아

도를 넘는 그 고열이

이 몸을 다 사르고

혼자서 마구 태워

몸부림치다 못해

소리조차 높아질 제

창문을 차던지고

산으로 기어올라

어쩔까요, 어쩔까요?

이 일 장차 어찌해요!

터져 넘친 혼의 신음

마음놓고 울부짖으니

산천은 예삿일로

웃어웃어 버려 두고

타심통신 산령들은

눈물지어 동정을 하나마나

다만지 그 님이라

그리 덥지 않더래도

미온루 한 방울만

이 혼 위에 떨구소서.


세존에 대한 사모의 열도를 '짝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문인이요, 종교인이었던 일엽 스님은 한 세기를 화려하게 풍미하고 열반적정에 든 것이다고 전해진다.


환희대는 일엽스님이 출가하고 입적한 곳으로 견성암이 환희대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견성암은 다른 곳으로 옮겼다.



     ▲관음보살



     ▲관음바위




산신각 앞에 관음보살 조각상이 서있다. 


수덕사 관계자는 " 현재 산신각 자리에 전에는 관음전이 자리했었으나,  그 자리에 산신각을 새로 축조했다."고 말했다.


숭덕산 수덕사의 창건설화는 두가지로 흐르고 있다. 


 ‘덕산향토지’에 실린 수덕사의 창건설화 하나는 홍주마을에 훌륭한 가문의 ‘수덕’이라는 도령이 살고 있었는데, 도령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한 낭자를 보고  수소문 끝에 건너마을에 살고 있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도령의 끈질긴 청혼에 덕숭낭자는 조건을 걸고 청혼을 허락했다. 


조건은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달라는 것으로 도령은 기쁜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했으나 첫 번째 지은 절은 도령이 탐욕스러운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지어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다 타버렸다. 다시 목욕재계 예배후 절을 지었으나 자꾸 낭자 생각에 완성하지 못한 상태에서 역시 불이 나고 말았다. 세 번째는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지어 완공 후, 낭자와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참지못한 도령이 낭자를 강제로 끌어 앉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어나면서 낭자는 사라져버리고 도령의 손에는 한 쪽 버선만 쥐어져 있었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하얀 버선꽃(골담초)이 피었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현신(現身)이었던 것이다. 이후 절은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은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 수덕사'라고 했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두 번째 관음보살이 현신(現身)한 창건설화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수덕사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퇴락이 심해 대중창불사를 하게 됐으나 당시 스님들은 불사금을 조달하기에 어려움을 격던 어느날 묘령의 여인이 찾아와 불사를 돕기 위해 공양주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여인은 미모가 빼어나며, ‘수덕각시’라는 이름으로 소문이 퍼졌다. 


수덕사에 이 여인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그중 신라의 대부호요. 재상의 아들인 ‘정혜’라는 사람이 청혼을 했다. ‘이 불사가 성취되면 청혼을 받들겠다’고 하는 여인의 말을 듣고, 청년은 가산을 더해 10년 걸릴 불사를 3년만에 끝내고 낙성식을 보았다. 


낙성식에 대공덕주로서 참석한 청년이 수덕각시에게 같이 떠날 것을 독촉하자, ‘구정물 뭍은 옷을 갈아입을 말미를 주소서’하고 옆방으로 들어간뒤 기척이 없자, 그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하자 급히 다른방으로 사라져가는 여인의 모습에 청년이 여인을 잡으려는 순간 옆에 있던 바위가 갈라지며  버선 한 짝만 남기고 사람도 방문도 없어지고 틈이 벌어진 바위 하나만 나타났다. 


그 바위가 갈라진 사이에서 봄이면 버선모양의 꽃(골담초)이 지금까지 피고 있다. 그로부터 이름이 수덕여인 이었으므로 ‘수덕사’라고 불렀고,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하신 후 들어가신 바위를 사람들은 '관음바위', '수덕각시바위'라고도 불렀다는 전설이 흐르고 있다.


수덕사 관계자는 “관세음보살이 현신(現身)한 이곳에서 기도하면 소원성취된다는 소문이 각지에 퍼지자 소원을 비는 인적이 끊어지지 않았으나 수덕사는 부처님의 법맥이 이어오는 만공스님의 가풍을 진작하는 선찰로서 기복에 치우치는 우려가 있어 이를 더 이상 구전치 않았던 것이 었으나 이곳을 찾는 자들의 심원에 따라 이성역에 헌신했던 관음보살을 봉조하게 됐다.”면서, “신심으로 참배 기도하는 이는 관음의 신통 묘용의 가피를 모두 얻을 것이다.”고 전한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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