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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58] 잊혀진 혁명가 '정이형'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2-16 08:20:37
  • 수정 2023-04-24 05: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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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정이형 鄭伊衡, 1897.09.16 ~1956.12.10. 평안북도 의주, 독립장 1963


비로소 인정풍속이 다른 만리 타국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장탄일호(長嘆一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나는 이렇게 쓸쓸한 곳을 급급히 찾아 왔을까. 집에 있는 사랑하는 어머니와 처자들은 다 어찌 될까. 나의 앞날은 고생이 어떠할까. 망국 민족으로 태어난 것이 죄이런가 - 정이형 선생의 회고록 중에서 -


# 항일 무장투쟁에 몸 담을 독선생 밑에서 한학 공부. 친형도 독립 운동


정이형(鄭伊衡, 1897. 9. 16 ~ 1956. 12. 10) 선생은 1897년 9월 16일 평안북도 의주군(義州郡) 월화면(月華面) 화하리(化下里)에서 아버지 정효기(鄭孝基)와 어머니 수원 백씨(水原白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호는 쌍공(雙空)이며, 본명은 원흠(元欽)이나 이명인 이형(伊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재산이 넉넉하고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던 부친의 덕택으로 선생은 어려서부터 독선생(獨先生)을 모시고 한학을 배웠다. 특히 선생에게 한학을 가르쳐준 사람은 김평식(金平植)이었는데 그는 평북 의주 출신으로 후일 만주로 망명해 대동향약(大東鄕約)을 운영하다가 3.1운동 이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군부(義軍府) 등 복벽주의(復辟主義) 독립군 단체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선생은 그로부터 한학과 더불어 복벽적 항일의식을 전수받았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만 머무르지 않았고, 근대적 민족의식을 수용했다.


그것은 한말 계몽운동 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에는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했던 선생의 친형 정원익의 영향 때문이기도 했다. 


# 3.1운동 참여한 후에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 실시


이같이 항일 민족의식이 충만한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선생은 1919년 1월 전라남도 장성(長城)으로 이주했다. 이는 일경의 감시와 추적을 피하고, 또 조국의 독립을 초월적인 종교의 힘을 통해 달성해 볼 요량으로 금강산에 들어갔다가 장성에 온 독립운동가 김계순과 서상연을 만나 서로 의기 상통한 결과였다. 그런데 장성에 이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울에서 3.1운동이 발발했고, 장성에서도 만세 시위운동이 전개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이를 주도했다. 하지만 거족적이며 전국적인 3.1운동에도 선생이 바라던 조국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에 선생은 후세들을 조국 독립의 동량(棟梁)으로 육성키 위해 사립학교 설립을 추진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친형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1921년 7월 장성군 북하면(北下面) 대악리(大岳里)에 4년제 선룡(選龍) 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이 같은 선생의 행동은 민족운동가들의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던 일제 식민 통치 당국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에는 일경에 피체되는 신세가 됐다. 다행히 선생은 1922년 3월 29일 풀려나기는 했으나, 이로 인해 더 이상 장성에서 활동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 임정 연통제 의주 군감으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대한통의부 의용군으로 항일전쟁 참전


이 때 마침 형이 사망했으므로 선생은 1922년 10월 27일 장성을 떠나 고향인 의주로 귀향했다. 선생은 형의 장례를 치르면서 만주로 망명해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일제의 감시망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선생에게 근대적 민족의식을 심어주고 민족운동 자금도 지원해 준 형의 유지(遺志)를 따르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임시정부의 국내 통치 및 연락 조직인 연통제(聯通制)에 참여해 의주 군감으로 활동했고, 또 만주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과도 연고가 깊던 김경하(金景河)를 만나 망명 의사를 피력했다. 이에 그는 만주로 가는 길을 알려주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학무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언갑(申彦甲)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써 주었으므로, 만주에 산재한 우리 독립군의 상황을 파악하고,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침과 지도계획을 알아보고자 선생은 망명 길에 올랐다.


1922년 11월 선생은 신의주에서 압록강을 건넌 뒤,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대한통의부의 활동 근거지인 관전현(寬甸縣)에 도착해 신언갑을 찾아갔다. 그리하여 선생은 그의 소개로 대한통의부에 참여하게 됐고, 또 여기에서 민사부장 이웅해(李雄海)와 교통부장 오동진(吳東振), 그리고 의용군 사령관 김창환(金昌煥) 등을 만났다. 특히 선생은 진정으로 생사를 같이할 동지가 되어 다 거꾸러져 가는 이 민족을 살려내자고 하는 오동진과 평생의 동지가 되기로 맹세하고 다시금 항일의지를 되새겼다. 우선 선생은 국내에서의 활동경험에 따라 학무부에서 활동하다가 1923년 12월 대한통의부가 군사중심 체제로 개편되면서 본격적으로 군사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그리하여 선생은 대한통의부 의용군 사령관의 부관으로 활약했고, 1924년 가을에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으로 활용하면서 부하 병사 10여 명과 함께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 육도하자(六道河子)에서 반(反)통의부 분자를 처단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해 갔다.


# 정의부 의용군 중대장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 전개…일본 경찰 주재소 습격


이와 같이 군사 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대한통의부가 1924년 11월 25일 정의부(正義府)로 확대 개편되자 이에 참여했다. 이 시기 독립운동가들은 명실상부한 항일 독립운동의 대통일 기관을 조직하려고 상해에서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국민대표회를 개최했다. 대한통의부 대표인 김동삼(金東三)도 여기에 참석해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의 통괄 기관 성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국민대표회는 임정의 개편 문제를 둘러싸고 창조파와 개조파의 대립이 첨예화되더니 결국 파국으로 끝나고 말았다. 서간도에서도 이 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 조직인 대한통의부에서 복벽주의 계열이 이탈해 의군부(義軍府)를 조직하여 나가고, 또 참의부(參議府)가 분립되는 등 분열 양상이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김동삼을 비롯한 대한통의부 지도자들은 서간도 지역만이라도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뤄 항일역량을 결집하고자 정의부를 설립시킨 것이었다.


대한통의부의 조직에 관한 건(1924.4.18, 조선총독부경무국)특히 정의부는 대한통의부를 근간으로 길림주민회.서로군정서.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 및 서간도 각지의 자치 단체 등 10여 개 단체가 통합 발족한 군정 기관이었다. 그리하여 정의부는 하나의 독립된 정부형태를 갖추고 서간도 지역의 한인동포들을 통치하면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처음 정의부는 중앙 본부를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설치하고 참의부 세력권인 관전현.집안현(輯安縣).환인현.통화현(通化縣) 등 4개 현의 일부를 제외한 10개 지역에 지방총관서를 두고 한인들을 통치했다. 그리고 중앙행정위원회 산하에 군사부를 두고 그 예하에 각 중대와 소대를 편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 군사부는 일본 육사 출신의 이청천(李靑天)이 군사위원장, 오동진이 사령장을 맡아 지휘했고, 그리고 선생을 비롯한 문학빈(文學彬).양세봉(梁世鳳) 등 평안도 출신들이 주로 중대장과 소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같은 정의부의 군사부에서 활동하면서 선생은 국내 진공작전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1925년 3월 18일 선생은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제8중대장 김석하(金錫河), 제6중대 제3소대장 김정호(金正浩) 등과 함께 관전현 하루하(下漏河) 약수동(藥水洞)에 모여 압록강 대안의 경찰서 습격계획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김석하는 초산(楚山)경찰서 추목(楸木)경찰관출장소, 김정호는 초산경찰서 외연(外淵)경찰관주재소, 선생은 벽동(碧潼)경찰서 여해(如海)경찰관출장소를 각각 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선생은 부하 6명을 인솔하고 결빙된 압록강을 건너 3월 19일 여해경찰관출장소를 공격해 서천융길(西川隆吉).임무(林茂).신현택(申鉉澤) 등 3명의 순사를 사살하고, 다른 1명의 순사를 부상케 했다. 그리고 출장소 건물을 소각하는 한편 총기류와 방한외투 등 군수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밖에도 선생은 1925년 7월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 제1소대장으로 중대장 문학빈, 제2소대장 이성근(李成根), 제3소대장 김창호 등과 함께 항일 무장투쟁을 벌였다.


# 독립운동 군자금을 징수하고 친일 밀정배들에게 사형 선고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군자금 수합 활동을 전개했다. 선생은 1926년 3월 하순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소대장 김형명(金亨明) 및 부하 병사 20여 명을 이끌고 길림성에 잠입해 한인동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했다. 이와 함께 독립군 활동을 정탐하는 친일 밀정배에게 사형 선고를 한 다음 발각 즉시 사살하도록 명령했다. 이같은 선생의 활동을 당시 조선일보(1926년 5월 23일)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경무당국에 도착된 정보에 의하면 평안북도 대안을 중심으로 활동 중이던 정의부 제1중대 제1소대장 정이형 이하 여러 부하들은 다수한 귀갑형 폭발탄과 권총을 휴대하고, 4월 상순 이래 길림성 소공문 밖에 있는 ○○단원 최만영이 경영하는 삼풍 공사와 기독교 목사 손정도의 집에 머물고 있으면서 군자금을 모집 중이라는데 그들은 길림 일본총영사관경찰서 순사 홍건표.채영묵과 길림 거류민회장 김정원, 부회장 김병전, 동 촉탁 채규옥·홍순걸 등에게 대해 각각 사형 선고를 한 후 불원간 폭살코져 계획 중임으로 일본 경찰관헌은 엄중경계 중이라.


# ‘모든 이념과 정파를 떠나 오직 조국 독립만을 생각할 정당이 절실하구나’


그러나 선생이 참여한 정의부에서도 1925년 말부터 내분이 발생했는데, 그것은 정의부 지도자인 이상룡(李相龍)의 임시정부 국무령 취임 문제 때문이었다. 임시정부에서는 1925년 7월 4일 임시의정원에서 개정한 헌법에 따라 국무령제를 신설하고, 국무령에 이상룡을 선임했다. 이에 이상룡은 1925년 9월 24일 국무령에 취임했고 10월 오동진.김동삼.윤세용(尹世茸).김좌진(金佐鎭).현천묵(玄天黙).조성환(曺成煥) 등 만주지역 주요 독립운동 단체의 지도자들이 망라된 내각을 조직했다. 하지만 이상룡의 이러한 조각은 뜻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만주 독립운동계는 중.일 양국 경찰이 합작해 한인 독립운동을 방지하고, 한인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인도한다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삼시협정(三矢協定)'과 일.소 간의 국교 수립 등으로 말미암아 난관에 봉착했던 탓이었다.


정이형의 수형카드이러한 상황에서 1925년 12월 화전현(樺甸縣)에서 개최된 정의부의 제2회 중앙의회에서는 만주 지역 독립운동 단체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다. 이렇게 되자 군사 활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해 온 선생 등 군사부 세력은 비상의회로 개최된 군민대표회(軍民代表會)에서 중앙행정위원을 선거하고, 새로운 정의부 헌장 등을 제정하는 등 정국 안정을 주도해 갔다.


이와 같이 선생은 1922년 11월 만주 망명 이후 대한통의부.정의부 등 재만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특히 1925년 6월 중국 동북군벌과 조선총독부 사이에 체결된 '삼시협정'으로 더욱 어렵게 된 만주 지역 독립운동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도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때문에 선생은 이 시기 이제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독립운동 방략과 이념을 추구했고, 또 그 같은 공감대 위에서 동지적 결합을 공고히 할 독립운동 정당의 결성을 구상했는데, 그것이 바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의 조직 구상이었다.


이것은 당시 이당치국(以黨治國)론의 대두에 따라 국내외에서 전개되고 있던 민족단일당 운동론을 수용한 독립운동 방략이지만, 선생이 주도한 단체 조직의 특징은 그 범위가 중국 만주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국내 단체와도 연계된 독립운동 단체 통일론이었다. 그리고 이념적인 면에서도 이제까지의 북벽주의.공화주의 등을 기저(基底)로 한 독립운동 이념이 아니라 진보적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국내외를 포함하는 독립운동 단체 통일운동과 함께 과학적 이론에 바탕을 둔 진보적 민족주의를 이념으로 하는 혁명적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를 구상한 것이었다.


# “자유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조직을 확대하다


선생은 이 같은 원대한 구상 아래 만주에 산재해 있는 정의부원, 국내에 거주하는 천도교 교도와 형평사(衡平社) 사원을 규합해 고려혁명당을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우선 선생은 평소 가까이 지내던 양기탁(梁起鐸).오동진.현정경(玄正卿) 등 정의부 지도자들 가운데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자신의 계획을 밝히고 이들의 협조를 구했다. 그리고 1925년 2월 김광희(金光熙).주진수(朱鎭洙).이규풍(李奎豊) 등과 함께 소련으로부터 길림으로 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천도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아들인 최동희(崔東曦)를 만나 고려혁명당 결성에 동참을 권유했다. 최동희는 선생의 계획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천도교연합회의 중심 인물 이동구(李東求)를 통해 형평사의 참여를 주선했다. 당시 이동구는 천도교연합회뿐만 아니라 백정들의 신분향상 운동 단체인 형평사 중앙총본부의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 단체의 참여는 순조롭게 이뤄졌다.


선생의 노력으로 1926년 2월 15, 16일 양일 간의 발기회, 3월 29일 결당대회 등을 거쳐 드디어 4월 5일 길림성에서 고려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위원장 양기탁, 책임비서 이동구 및 정이형 선생 등 중앙집행위원들은, “① 물질계와 정신계를 통해서 자유평등의 이상적 신사회를 건설하자 ② 우리들에게 공명하는 각 피압박 민족과 결합해서 동일전선에서 일치된 보조를 취하자”고 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① 만주를 최선의 전지(戰地)로 삼는다 ② 최고 간부는 상해에 두고 동양의 피압박 민족과 연락을 취한다” 는 등의 당략을 채택했다.


1937년 10월 14일 경성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이 같은 강령과 당략에 따라 선생을 비롯한 고려혁명당 지도부는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공산당과 중국국민당의 원조를 요청하는 한편 당원 확보와 조직 확대를 위해 심혈을 경주하였다. 그 결과 1926년 8월경에는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약 100여 명의 당원을 확보하고, 길림·봉천성의 10여 곳에 세포를 조직하였다.


# 체포된 후 법정에서 일체 진술 거부하는 무언(無言)투쟁. 19년 옥고 끝에 광복과 함께 출옥


그러던 중 1926년 12월 28일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던 이동락(李東洛)이 장춘에서 당의 주요 문건을 지닌 채 피체됨에 따라 뒤이어 국내 형평사 내의 당원인 서광훈(徐光勳).장지필(張志弼).조귀용(趙貴用).오성환(吳成煥) 등이 피체됐다. 그리고 만주에서 홍병기(洪秉箕)와 송헌(宋憲).김봉국(金鳳國) 등 천도교 내의 당원들이 피체됨에 따라 당세는 크게 위축됐다. 이렇게 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하얼빈으로 이동해 조직 재건을 도모해 갔다. 그러다가 1927년 3월 11일 선생은 동지 6명과 함께 하얼빈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피체돼 신의주로 압송됐다.


선생 등 고려혁명당 주요 간부들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투쟁을 전개했고, 나아가 1927년 12월 19일부터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는 신문에 대해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법정 투쟁에 나섰다. 특히 선생은 1928년 2월 8일 공판에서 “나는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한 마디만을 하고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등 일제에 대해 무언의 항의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8년 3월 19일 공판에서 사형을 구형 받고, 4월 20일 무기 징역을 언도 받아 평양형무소에 수감됐다. 이후 선생은 서대문형무소를 거쳐 공주형무소로 이감돼 19년 여의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을 맞아 1945년 8월 17일 출옥했다.


광복 이후 선생은 최초의 좌우합작 단체로 8․15출옥 혁명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1946년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관선 의원으로 선임됐다. 그리하여 선생은 1946년 12월 30일 제6차 본회의에서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간상배(奸商輩) 조사위원회를 특별위원회의 하나로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따라 1947년 부일.반역.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률조례 제정을 위한 기초위원회가 성립됐고, 선생은 그 위원장으로 선임돼 특별법 제정을 주도하면서 친일파 척결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특히 광복 직후의 혼란기에 선생은 과거 만주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단체 통합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좌우합작운동 및 남북협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1956년 60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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