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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8] 홍성이 낳은 민족대표 '한용운'...1919.3.1 조선자유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선언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2-28 08:56:00
  • 수정 2023-03-02 11: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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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한용운은 홍성이 낳은 위대한 애국자이며 시인이다. 만해는 설악산에서 불문에 귀의하고 1913년 불교유심론을 부르짖었고, 1914년에 대장경을 열람해 불교대전을 엮었고, 1919년 3.1 만세 시위를 33인 민족대표와 같이 주도하면서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썼다.


1926년 현대시 사상기념비적인 시집 ‘님의 침묵’을 펴냈고, 그 뒤에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굳굳히 서서 일제로부터 해방을 앞두고 1944년 향년 66세에 세상을 떠났다. 언제나 선각자는 외로운 것이나 선생의 메아리는 천추에 빛나리로다.  


 



한용운은 1910년 7월 10일 경성지방법원 검사장의 요구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이란 글을 쓰게 됐다.


문: 피고는 금후도 조선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

답: 그렇다. 언제든지 그 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고 영세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


한용운은 이 글에서 조선이 독립되어야 하는 이유를 논리 정연하게 주장했다. 3.1운동 이후 한용운은 1927년 민족유일당 운동의 일환인 신간회 경성지회장을 역임했다. 1930년 불교계의 비밀 지하 항일운동 단체였던 만당(卍黨)의 당수로 취임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한용운은 스님이 되기 전에 배웠던 위정척사사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국의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용운은 입적(승려의 죽음)하는 날까지 조국과 민족에 대한 의리를 바탕으로 조국과 민족을 배신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지속하면서 일제에 대한 타협과 친일도 거부하고, 친일파를 배척하며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다. 한용운의 정신과 독립운동은 조국의 해방과 대한민국 건국에 밑바탕이 됐다. 



한용운은 1910년 기존 불교가 새롭게 바뀌어야 한다는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쓰고 1913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1911년 한용운은 친일 승려 이회광(李晦光) 일파가 한국의 원종(園宗)과 일본 조동종과의 합병을 발표하자, 박한영, 진진응, 김종래 등과 함께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원종에 대응하는 임제종을 창립하고 전국에 격문을 돌려 큰 호응을 받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한용운은 백용성 등 불교계 인사들의 참여를 주선하고, 독립선언서의 불교계측 배포를 담당했다. 





만해 한용운 생가지(萬海 韓龍雲 生家地)/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1989 12월 24 지정, 만해로 318번길 83 소재만해 한용운(1876~1944)은 일제 강잠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스님이자 시인으로 1879년 (고종16)에 태어난 곳이다. 만해는 1904년 강원도 인제 내설각 오세암(五歲庵)으로 출가해, 1905년 백담사(百潭寺)에서 득도했다. 계명(戒名)은 봉완(奉玩)이고, 법호는 만해(萬海), 법명은 용운(龍雲)이다. 


1919년 3.1운동을 이끈 33인으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공약(公約) 3장을 작성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간해 저항문학에 앞장서고 민족혼(民族魂)을 깨우려고 노력했다. 1944년 5월 9일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에서 66세 일기로 입적(入寂), 유해는 서울 망우리에 안정됐다. 


만해는 세상을 마칠 때까지 불교를 통한 애국청년운동과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사상을 복돋워 일으키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建國功勞勳章)이 추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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