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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0] 백제왕도역사 공산성에 있는 ‘영은사’
  • 윤여금
  • 등록 2023-03-15 23:17:05
  • 수정 2023-03-15 23: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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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아름다운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는 공산성(公山城) 내에 있는 영은사(靈隱寺)는 마곡사의 말사이다. 목조관음보살상(유형문화재)이 모셔있고,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칠성탱화(문화재자료)가 있고,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용된 연지(기념물)와 비밀통로의 역할을 하는 암문,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만하루가 위치하고 있다.





     ▲ 영은사(靈隱寺)(전통사찰 제2호)


영은사(靈隱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 말사로 조선 세조 4년(1458)에 세워진 사찰로 묘은사로 불렀고, 이괄의 난 (1624년) 때 이 사찰에 피신한 인조가 ‘영은사’로 고쳤다. 

 

광해군 8년(1616)에는 이곳에 승장(僧將)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할 했고(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승병들이 모여 훈련을 받고,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됐고, 여기서 훈련된 승병은 영규대사의 인솔 아래 금산전투에 참여했다. 







영은사는 호국사찰로 승병이 계속 주둔 하고 있었고, 건물은 영은사, 원통전, 요사체 등이 있다. 


     ▲ 요사채


     ▲ 요사채


영은사 부근은 통일신라시대 불상 6구가 출토돼 조선시대 이전에도 이곳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짐작케한다. 



     ▲ 원통전(문화재자료 제51호)

 

원통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기둥위에는 보를 받치고 장식도 겸해 새 날개 형태의 부태를 까맞춘 익공계로 맞배지붕을 했다. 규모는 21m, 현 건물은 1933년 12월에 보수했다. 

원통전은 영은사의 중심법당으로 정면에 원통전이라는 현판이 걸려있고, 원통전이라는 이름은 ‘모든 곳에 빠짐없이 널리 두루통한다,’라는 의미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음을 뜻한다. 


원통전은 내부에 목조관음보살상(유형문화재 제160호)가 모셔져 있으며,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376호), 칠성탱화(문화재자료 제 377호), 신중탱화, 산신탱화 등의 불화가 걸려있다.

 

     ▲ 목조관음보살좌상(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원통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팔각대좌위에 앉아 있는데 약간 움츠린 듯안 자세를 하고 있다. 머리는 극락조가 새겨진 목조보관을 쓰고 있고, 자애로운 얼굴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은 자연스럽다. 


보살상이면서 불상과 같은 법의 표현과 자세를 해 원통전의 주존으로 불각을 나타내고자한 것으로 보인다.


아미타후불탱화(문화재자료 제376호) 연화좌위에 결가부좌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4대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들이 에워싸고 있다. 19세기 후반 충청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마곡사 화승 금호 약효가 금어로 참여해 제작했다. 아미타의 당당한 신체와 표정, 사천왕과 가섭, 아난의 상호표현과 채색에서 금호 약효의 화풍이 드러난다. 


전체적으로 붉은색을 주조색으로 했고, 불보살의 법의와 연화대좌, 광배 등에 보이는 짙은 청식인 코발트블루의 사용은 당시의 시대적 경향으로 본다. 화기를 통해 (고종 25년)1888년 조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칠성탱화(문화재자료 제 377호)


칠성탱화는 북극성을 불격화한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는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다. 머리에 쓴 보관에 해와 달을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양손에 해와 달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불보살이 주위로 위쪽에는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일곱명의 부처를 배치했고, 그 아래로 중앙은 삼태성을, 양쪽은 북두칠성의 도교신격인 일곱명의 칠원성군을 배치했다. 


붉은색과 황토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군데군데 보이는 코발트블루의 사용은 당시의 시대적 경향으로 본다. 화풍의 특징으로 전각 내 아미타후불탱화와 함께 금호약효가 조성한 것으로 본다. 




     ▲ 연지(蓮池)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 면적1,164㎡


연지(蓮池)는 공산성 내의 남쪽 영은사(靈隱寺) 앞에 자리하고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너비 15.3m,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이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금강을 향한 동·서벽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좋게 했다.


연지는 공산성 안에서 사용한 물을 저장했던 연못으로, 백제시대는 영은사 앞쪽에 연못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 자리로 옮겼다. '여지도서'에 공산성에 가믐과 물이 부족하여 해결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어 강물을 끌어다 썼고, 만하루라는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 암문


암문(暗門)은 ‘여지도서’에 기록 된 점으로  보아 지당 부근에 시설되어 있으리라는 추측만 해 왔다. 그러던 중 82년 지당조사에 이어 83년에 암문이 발견됐다. 


연지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계속 이용해 왔고, 공산성의 암문(누각이 없이 적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 세운 성문터)을 통해 연지에 닿을 수 있는 자취도 조사돼 공산성의 자취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암문(暗門)은 성벽에서 잘 보이지 않는 지점을 택해 몰래 출입하도록 만든 작은 문으로, 일종의 비밀통로의 역할이므로 밖에서 봤을 때는 찾기 어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 만하루


만하루(挽河樓)는 공산성을 방비하는 군사적 기능과 경승을 관람하는 누각 건물로 조선 후기 영조 때 건립했다. 


그간 홍수로 붕괴 매몰됐던 것을 1982년 건물터를 발견하면서 1984년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건물로 중건했다. 8각으로 다듬어진 초석과 디담돌 등은 원형대로 이용하고 건물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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