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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1] 능선과 계곡따라 쌓은 백제왕궁유적 ‘세계유산 공산성’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3-18 08:46:36
  • 수정 2023-03-24 08: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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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공산성(사적)은 백제의 왕도(王都)와 연관된 왕성(475~538)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110m) 능선과 계곡따라 쌓은 (길이2,260m) 천연요새의 백제의 성곽이다. 금서루, 쌍수정(문화재자료), 쌍수정사적비(유형문화재), 임류각, 진남루(문화재자료), 명국삼장비(유형문화재), 공북루(유형문화재), 광복루(문화재자료), 공산정 등이 자리하고 있으며 백제역사유적지구 유네스코 세계유산(2015년)으로 등재됐다. 

 

      ▲  금서루 입구 비석군


공주와 관련된 인물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 백성을 바르고 어질게 다스린 행적을 기리기 위해 1828년 (순조 28)에 세운 비이다. 47기가 있다. 

 

     ▲ 공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였으나 조선시대에 ‘석축성(石築城)’으로 쌓았다. 백제 당시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았었고,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했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였고,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큰  유적이다.

 





    ▲  자동차가 갈 수 있는 출입구


     ▲ 금서루


금서루는 4개의 성문 중 서쪽에 위치한 성문으로 1859년 편찬된 공산지 문헌기록과 동문조사자료 및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해서 1993년 복원했다. 금서루는 앞면 3칸, 옆면 1칸으로 조선시대 문루의 양식으로 본다. 


서쪽 금서루는 금강교 바로옆에 위치하고 있어 정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출입구가 있다.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바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뿐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됐다.

 

송산리6호분 벽화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오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를 보여주고, 깃발의 바탕색은 황색으로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고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중히여겼다. 깃발의 테주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 그래로를 따랐다. 따라서 동쪽은 청룡, 서쪽은 백호, 남쪽은 주작, 북쪽은 현무를 각각 배치했다. 



     ▲ 쌍수정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항(1623~1649)이 163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다. 당시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아래 기대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두 그루의 나무(쌍수)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을 세웠다.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현재의 쌍수정은 1970년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참고로 이괄(1587~1624)의 난은 이괄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가 왕이 된 인조반정의 보상 과정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난이다.

 





     ▲ 쌍수정사적비(유형문화재 제 35호)


쌍수정사적비는 조선의 제16대 왕인 인조(재위1623~1649)가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해 세운 비이다. 비에는 이괄의 난과 인조가 공산성으로 피하게 된 사실,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 동안의 행적, 공산성의 모습 등이 적혀있다. 인조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비문을 짓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글씨를 썼다.

 

쌍수정 사적비는 1624년 인조가 공주를 떠난 직후 세우려고 했으나 84년이 지난 1708년 (숙종 34)에 지금의 비석을 세웠다. 비는 거북모양의 받침과 목조 지붕 모습의 머릿돌을 갖춘 조선시대의 양식으로 했다. 

 






     ▲ 진남루(문화재자료 제48호)


진남루는 공산성의 출입통로로 이용되는 성의 남문에 해당되고,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였다. 공산성은 사방에 문 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나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여 원래대로 복원한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삼남은 남족의 3도, 즉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500)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의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경 공산성 발굴 조사 과정에서 고층 누각의 모습으로 확인돼 1993년에 2층 누각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양식을 재현해 세웠고, 단청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했다. 

 

삼국사기에 ‘500년(동성왕 22)에 연못을 파고 기이한 금수를 길렀다’고 하고, ‘흐르는 금강 물을 내려 본다’는 뜻으로 ‘임류각’이란 이름을 붙였고 화려했다고 했다. 이곳에서 금강과 아름다운 산세도 감상할 수 있었다고 하니 종합적인 조경건축인 셈이다.

 

동성왕은 23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백제의 국력을 회복하고 기틀을 마련하는데 힘을 썼고, 공산성을 고치기도 했던 왕이다. 

 





     ▲명국삼장비(유형문화재 제36호) 


명국삼장비는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듬해 1598년(선조 31)에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가 왜군에게 피해를 많이 받은 공주에 들어와 머물면서 주민들을 보호한 업적을 기린 송덕비이다. 1599년 금강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돼, 1713년 (숙종 39)에 다시 세웠다. 

 

일제강점기는 일본인들이 비석에 쓰여 있던 왜구라는 글자를 지우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묻어버렸으나, 1945년 광복이 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 영동루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 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토성곽길이다. 

 



     ▲ 광복루(문화재자료)


광복루는 원래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었다. 그곳은 충청감영에 소속된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이자 높은 곳에서 바깥을 관찰하기도 했던 누각으로 본래 ‘해상루’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일본 데라우찌 총독이 공주를 방문한다는 기념으로 북문인 공북루 옆에 있던 ‘해상루’의 위치를 현 위치로 옮기고 이름을 ‘웅심각’이라 불렀다.

 

1946년에 백범 김구와 성재 이시영이 이곳에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다는 뜻을 기리고자 ‘광복루’라고 부르게 됐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누각으로 모든 면이 개방돼 있고, 왼쪽에는 오르내릴 수 있도록 층계를 만들어 놓았고,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공산성 백제 토성은 공산성의 성벽 중 흙으로 쌓은 토축 성벽 구간이다. 공산성 전체 둘레가 약 2.4km 된다. 대부분 돌로 쌓은 석축 성벽이나, 흙으로 쌓은 토축 성벽도 있다. 토축 성벽 구간은 광복루와 동문지 주변의 외성으로 불리는 부분이다. 

 

토축성벽은 돌로 바닥의 기초를 쌓은 후 벽체는 진흙과 모래흙을 교대로 다지면서 쌓아올렸다. 토성의 외벽은 성벽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수직방향으로 세운 기둥의 구멍, 즉 영정주공의 자리가 약 180cm 간격으로 일정하게 확인된다. 

 

 




     

     ▲ 공북루(유형문화재 제37호)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전한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돼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공북루는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다.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은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송시열이 기록 했고, 멋스러운 경치를 더해 주는 건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루이다.

 

▲  공산성 왕궁관련유적


남쪽의 넓은 골짜기에 자리잡은 백제시대 대규모 왕궁관련유적이다. 2011년~2017년까지 자연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현재 지표면에서 약 300~700cm 아래에서 백제가 웅진에 천도한 475년 이후부터 만들어진 약 70여동의 기와건물지와 도로, 축대, 배수로, 저수시설, 석축 연못, 철기 공방지 등 다양한 시설이 확인됐다. 

 

백제왕궁관련 건물지가 자리한 곳은 약 30,000제곱m의 넓은 평탄지를 이루고 있다. 원래 지형은 사방에서 모이는 골짜기에 해당한다. 그래서 나뭇가지와 흙 등을 켜켜이 쌓아서 다지는 부엽공법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통해 대지를 만들고, 그 위에 축대와 도로&배수로를 만들고 기와건물을 세웠다. 도로는 남북도로와 동서도로가 있다. 

 

건물지는 땅에 구멍을 판후 기둥을 세워만든 기와건물로 일정한 열을 이루어 자리하고 있고, 건물지 주변에서 ‘대통사’ 명 벼루와 사람얼굴이 있는 기대, 공작그림이 있는 기와를 비롯해 많은 양의 벼루가 촐토돼 백제시대 최고의 관청시설이 자리했음을 추론할 수 있다. 

 

645년 (의자왕 5)을 가르키는 ‘정관19년명’이 있는 화려한 옷칠갑옷과 철갑옷, 마갑, 큰 칼, 장식도 등이 출토돼 백제 중앙의 선진적인 공예기술을 살필 수 있다.

 

공산성에서 백제왕성으로 명확한 역사성을 갖춘 백제왕실의 생활문화를 살필 수 있는 화려한 유물이 출토된 왕궁관련유적이 조사됨으로, 백제 웅진기 백제문화를 살피는데 좋은자료가 됐다. 

 

▲  왕궁 중심 건물지


백제 왕궁관련유적의 중심건물지군에 해당하는 곳이다. 동향사면의 자연구릉을 4단으로 구획해 축대를 쌓고 건물을 배치했다. 중심건물지는 중앙에 길이 20cm, 너비10cm 내외의 넓은 마당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대형건물지가 지상의 배치를 이루고, 동쪽에 부속건물 3기가 있어 별도의 구획된 공간을 이루고 있다.


백제시대 건물지 가운데 중앙에 조정과 같은 마당지가 자리하는 것이 특징모습이다. 마당지 중앙의 바닥은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할 때 벽사와 기원 의례로 넣은 지진구로 판단되는 심발형기가 확인됐고, 건물지 주변에서는 많은 양의 기와편과 바닥에 깔았을 것으로 판단되는 전, 풍로형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됐다. 

 

중심건물지는 가장 입지가 좋은 동향의 대지에 자리하고 있고, 마당지를 중심으로 규모가 큰 건물이 배치돼 외부와 경계를 이루는 등, 다른 건물지에 비해 위계가 높은 왕궁관련 건물이 자리했던 곳으로 판단된다. 

 

▲  포로가 된 의자왕


660년 나당연합군에게 사비성이 함락되자,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몸을 피하고 다시 일어날 때를 준비했다. 웅진성은 천하의 요새이고, 충성스런 예식진 장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식진 장군이 배신을 하고, 그후 당나라에 건너가 높은 벼슬을 받았고, 의자왕은 5일만에 당나라에 항복을 하고 당나라에 끌려간지 얼마 안돼 고국을 그리며 운명을 달리했다. 

 



      

     ▲ 공산정


공산정은 서북쪽 산마루에 있는 누각으로 금강교(등록문화재 제 232호) 등 공주의 전경을 한 눈에 전망할 수 있다. 특히 금강의 낙조, 야경은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유신대, 전망대 등으로 불렀고, 2009년 시민들의 공모를 통해 ‘공산정’이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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