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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의 여행이야기 14] 영조 부마가 된 월성위가 오석산 기슭에 중건한 ‘화암사’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4-21 08:43:43
  • 수정 2023-04-21 08: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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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금 기자] 화암사(전통사찰)는 추사 증조부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됐을 때 별사전으로 분급된 전토에 포함돼 있고, 영조 28년 월성위가 중건했고, 후 대웅전은 소실됐고 요사채가 남아 있다. 화암사 뒤편 오석산 암벽에 추사의 친필각자(충남도 기념물) 詩境, 天竺古先生宅 등의 유적이 있다. 현재 대웅전 약사전 종각 원통보전 요사채 등이 자리했다. 


     


    ▲ 전통사찰 제70호


화암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7교구 수덕사의 말사이다. 화암사의 창건 연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삼국시대의 고찰이라고 전한다. 이곳은 추사의 증조부 월성위 김한신이 조선 영조의 부마가 됐을 때 별사전(別賜田)으로 분급된 일대의 전토에 포함되어 있어 그 일문(一門)에 세습됐다. 영조 28년(1752) 월성위가 중건하였으나 그 후 대웅전은 소실되고 요사채만 남아 있다. 


추사는 이곳 오석산(烏石山) 화암사에서 불교에 정심(情深)했고, 헌종 12년(1846) 제주 적소(謫所)에서 문중에 서한을 보내어 화암사 중건을 지시한 사실이 전해진다. 이 곳 화암사에 추사의 친필인 무량수각(无量壽閣), 시경루(詩境樓), 편액(扁額)이 있고, 화암사 뒤편 오석산 암벽에 친필각자 시경(詩境),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 소봉래 등의 유적이 있다. 


화암사 관계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증조부가 영조의 부마가 되었을 때 봉토 받은 땅으로 경주김씨의 집안을 호위하는 원찰로 원래 절터에 절이 있었으므로 추사 김정희 증조부가 중건하셨고, 원래 절터의 근거는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나, 남은 흔적이 없다.”면서, “현재 대웅전, 약사전, 여래입상 등은 1988년에 그 당시 주지인 대처스님이 세우셨고, 그 후에 대처스님이 돌아가시면서, 화암사는 대한조계종 7교구 수덕사 말사로 지정됐다”고 전했다.







      

     ▲ 대웅전


격을 높여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고도 하며 사찰의 중심에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에 두고 문수보살(文殊菩薩)과 보현보살(普賢菩薩)을 협시(脇侍)로 봉안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할 때는 주불로 석가모니불, 좌우에 아미타불과 약사여래를 모시며, 각 여래상의 좌우에는 제각기 협시보살을 봉안하기도 한다.









     ▲ 약사전


약사여래를 봉안하고 있는 사찰은 당우 내에는 약사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日光菩薩)과 월광보살(月光菩薩)을 협시(脇侍:좌우에서 보좌함)로 봉안한다. 약사여래는 대의왕불(大醫王佛)이라고 하는데, 동방정유리세계(淨瑠璃世界)에 거주하면서 모든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고 재화를 소멸시키며 원만행(圓滿行)을 닦게끔 해 무상보리(無上菩提)의 묘과(妙果)를 증득하게 하는 부처이다. 그는 과거세에 약왕이라는 이름의 보살로 수행하면서 중생의 아픔과 슬픔을 소멸시킨다는 십이대원(十二大願)을 내어 그 공덕으로 부처가 됐으며, 중생의 한량없는 고통을 없애 준다고 한다. 


화암사 관계자는 “약사여래좌상은 전 화암사 주지인 대처스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땅 속에 뭍어놓았다. 그런데 주지인 대처스님이 돌아신 후 불교신도의 꿈에 땅에 뭍힌 부처님이 나타나 땅 속에서 꺼내달라고 현몽하셨다. 그러므로 인해 기존 조성된 부처님은 옆에 자리 해 놓고, 땅 속에서 파낸 하얀색인 석조약사여래좌상을 봉안했다”고 말했다.  




      ▲ 범종각


범종은 본래 대중을 모으고 때를 알리기 위해 쳤으나, 점차 조석예불이나 의식을 행할 때 치게 됐다. 치는 횟수에 따라서 의미가 다른데 28번은 부처로 부터 6조 혜능(638~713)까지 이어진 법맥이 28명란 뜻이고, 욕계의 6천과 색계의 18천과 무색계의 4천, 합쳐서 모든 하늘나라 대중에게 부처님의 도량으로 모이라는 뜻이다. 


종을 칠 때 종을 치는 스님은 고통받는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 종송을 하면서 종을 친다.



     ▲ 석등


불교에서의 석등은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형이상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에는 “불타(佛陀)의 진리인 광명은 암흑과도 같은 사바세계에서 헤매고 있는 중생들을 불신(佛身)의 광명이 비치는 등명(燈明)으로 지체 없이 선(善)한 경지로 인도하는 선봉이 된다.”고 했다. 


석등은 부처님 말씀인 진리의 빛으로 인간의 어두운 마음을 밝혀 인간의 어리석음을 없애주는 법을 구체적인 상징의 조형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진리의 등불 또는 법신(法身)이라 표현한다. 


석등은 등화(燈火)를 밝힐 수 있는 실용적 의미와 함께 등 공양의 상징적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 탑과 여래입상


화엄사 관계자는 "탑은 훼손되어서 새로운 돌을 넣어서 보수한 모습"이라며, 여래입상은 1988년에 조성해 주변을 깨끗하게 손질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원통보전


원통보전 전각의 이름은 ‘모든 일에 빠짐없이 널리 두루 통한다’는 의미로,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능력이 모든 곳에 통함을 나타낸다.


     ▲ 추사 김정희 친필 (사본)


     ▲ 추사 김정희 친필 (사본)



    ▲  天竺古先生宅(천축고선생댁)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김정희 선생 필적 암각문 '天竺古先生宅' (천축고선생댁)은 김정희 선생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 옹방강의 집 대문 양쪽에 ‘상견동파구거사 엄연천추고선생’ 이라는 대련이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대련에서 추사 김정희 선생은 '天竺古先生宅’ (천축고선생댁)이라는 문구를 떠올려 화암사 뒤편 병풍바위 위에 ‘행서’로 써서 새겨 놓았다. 


이는 조선후기 소동파를 흠모하던 선비들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대표적인 문구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소동파와 석가모니를 동일시한 것으로소동파를 얼마나 흠모했는지를 알 수 있다. 


화암사 관계자는 “추사 김정희 선생이 바위 위에 새겨 놓은 '천축고선생댁'은 천축은 인도이므로 오래된 옛 선생댁은 '부처님의 집'이란 뜻이라고 설명했다.



     ▲ 시경(詩境) (충청남도 기념물 제151호)


'詩境' (시경)은 시의 경계 또는 시흥을 불러일으키는 풍취라는 뜻으로 좋은 경치를 뜻하기도 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스승인 담계 옹방강으로부터 받은 글씨를 ‘예서’로 써서 새겨 놓은 것이다. 이 글씨는 송나라 시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던 인물인 육유의 글씨이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이 좋은 글씨를 후대에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서 병풍바위에 새겨 놓은 것이다. 


일각에서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친필이라는 견해가 있어 연구가 필요한 필적이라고 전한다./사진-윤여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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