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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64]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 '송몽규.안창남.김필순'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4-24 06:07:18
  • 수정 2023-05-07 15: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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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 지사는 각각 인문학, 과학기술, 의학 분야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은 당대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이 습득한 지식을 개인의 부귀영달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송몽규 지사는 일본 제국주의 체제의 엘리트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해 오로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실력 양성에 매진했고, 일본 유학을 통해 뛰어난 비행가로 거듭났던 안창남 지사는, 자신이 받아들인 새로운 과학기술을 가지고 누릴 수 있었던 부귀영화를 버리고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다. 김필순 지사는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졸업한 뛰어난 의사로서 보장된 출세를 버리고 중국에서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의 교육정책은 이른바 일본 신민화(臣民化)의 토대가 되는 일본어를 보급하고 충량(忠良)한 제국 신민을 양성키 위한 보통교육과 저급한 수준의 실업교육을 위주로 이뤄졌고, 고등교육의 기회는 무척 제한적이었다. 일제는 교육을 통해 식민지 체제에 순응하는 식민지 노예를 만들고자 했고, 고등교육을 받은 극히 일부의 조선인들은 체제 내에 편입해 식민 통치에 활용했다. 


그러나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 지사는 일제 식민지의 앞잡이(走狗)가 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민족의식을 정립했다. 이들은 모두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마땅히 이루어져야 할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송몽규 지사는 28세, 안창남 지사는 29세, 김필순 지사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순국했다.


# 송몽규 지사(宋夢奎, 1917~1945)


송몽규(가운데 안경쓴 사람, 두번째 둘 오른쪽 윤동주)/독립기념관송몽규 지사는 1917년 9월 28일 중국 용정 명동촌의 윤동주 집에서 태어났다. 사촌 형제인 윤동주와는 삶과 죽음을 같이한 특별한 사이였다. 송몽규는 기독교 민족학교로 널리 알려진 명동학교와 은진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았으나, 그의 학창시절은 혼란스러웠다. 1920년 경신참변을 계기로 사회주의 세력이 독립운동의 수단으로 널리 퍼졌고, 이들은 반기독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1935년 3월 은진중학교를 자퇴하고 중국 남경의 학생훈련소에 입소했다. 학생훈련소는 김구 선생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시킬 청년들을 수용하기 위해 설립한 것이었다. 학생훈련소는 일제의 압력과 독립운동 진영의 내부적인 혼란으로 학생들의 군관학교 입학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1935년 10월 해산됐다. 


송몽규는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 가기 위해 제남의 이웅에게로 갔다. 하지만 독립운동 계열의 내부 혼란으로 인해 제대로 된 활동을 하지 못한 송몽규는, 1936년 4월 일제 경찰에 체포돼 조사를 받고 1936년 9월 풀려났다.


송몽규(맨오른쪽)이런 독립운동계열의 분화와 혼란의 모습을 본 송몽규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를 유지.향상시켜 민족의식을 함양해 독립기운을 조성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라고 확신했다. 문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서기로 결심한 송몽규는, 우리 민족의 문학을 깊이 연구해 문학자가 되기 위해 1938년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했다. 송몽규는 연희전문에서 윤동주, 강처중, 백인준 등과 함께 민족의식의 앙양과 민족문화의 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송몽규는 연희전문 문과 학생들의 자치단체인 문우회의 기관지 『문우』의 편집을 맡아, 일제의 조선어 사용금지 및 일본어 상용정책에도 한글로 윤동주와 송몽규 등의 시(詩)를 수록했다. 연희전문을 졸업한 송몽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42년 4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세계의 역사 및 문학을 연구함과 동시에 민족문화의 유지에 힘쓰기 위해 사학과를 선택한 것이었다. 


송몽규는 교토에서 윤동주, 고희욱, 백인준 등과 함께 민족의식 앙양을 위해 노력했다. 송몽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일제의 징병제도를 적극적으로 역이용(逆利用)하고자 했다. 일제의 징병제도를 통해 우리 민족이 군사 지식을 습득할 수 있고, 일본의 패전(敗戰)이 분명해질 때 무력 봉기를 결행(決行)하여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의 특별고등경찰은 1943년 7월 조선의 독립을 궁극적 목적으로 실력을 쌓고 있던 송몽규를 ‘재교토 조선인학생민족주의그룹 사건’의 주동인물로 윤동주와 함께 체포했다.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돼 옥고를 치루던 중 1945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송몽규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안창남 지사(安昌男, 1901-1930)


안창남(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자)안창남 지사는 1901년 1월 29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집안은 아니었으나 배움에 대한 열정과 의지는 남달랐다. 1913년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를 처음 목격한 안창남은 우리 조선 사람도 배우면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비행사의 꿈을 키워나갔다.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한 안창남은 비행사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안창남은 오사카의 자동차 학교와 도쿄의 비행기제작소를 거쳐 1920년 8월 오구리(小栗)비행학교에 입학하였다. 1921년 3월경 비행학교를 졸업한 안창남은 그해 8월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3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면허를 취득한 안창남은 귀국해 고국방문 비행 계획과 비행학교 설립의 포부를 밝혔다. 


1922년 6월.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행을 준비했다. 안창남은 금강호(金剛號)로 명명된 비행기에 탑승해, 1922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고국방문 비행에 나섰다. 안창남의 고국방문 비행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과, 우리 조선 사람도 할 수 있으며 하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 것이었다.


안창남(동아일보 1922년 12월 15일자)일본으로 돌아간 안창남은 1923년 6월 민간 비행가 경쟁대회에서 입상했고 7월에는 1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으나, 9월에 관동(關東) 대지진을 겪게 됐다.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행과 관동 대지진을 겪으면서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자각하게 됐다. 자신의 비행 기술을 민족을 위해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던 안창남은, 비행기를 이용한 항공 독립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임시정부와 연결됐다. 


안창남은 1924년 12월경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 역할을 수행하던 이륭양행의 도움으로 중국 상해에 도착했다. 안창남은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한국의 독립운동을 구상하고 있었던 여운형의 소개로 중국 군벌에 가담했다. 안창남은 국민혁명군의 반제국주의 이념에 동조하면서 반일(反日)항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했다. 


1926년에 안창남은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고 있던 산서성 군벌 염석산 군(軍)의 항공사령관으로 활동하게 됐다. 안창남은 자신의 지위와 자금력을 바탕으로 신덕영.최양옥.김정련 등과 함께 1928년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했다. 공명단은 군자금을 모집해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조선인 군대를 양성해, 국내 진공(進攻)작전을 구상했다. 


안창남은 600여 원의 자금을 지원해 최양옥.김정련.이선구를 국내에 파견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중국에서 조선인 비행사들이 항공 독립운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산서항공학교에서의 비행 훈련중에 기체 고장으로 추락해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안창남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김필순 지사(金弼淳, 1878-1919)


김필순 졸업 사진(왼쪽 첫번째)김필순 지사는 1878년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漢學)을 배웠던 김필순은, 1886년 언더우드를 만나서 기독교를 접한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한학(漢學)과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김필순은, 1899년 제중원에 들어가 교재로 사용되는 서양의 의학서적을 번역하는 등 에비슨의 통역 및 조수로 활동했다. 


1908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의술개업인허장(醫術開業認許狀)을 받은 김필순은, 모교와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 활동하면서 후진 양성에 앞장섰다. 김필순은 1907년 2월 귀국한 도산 안창호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그의 활동을 지원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에도 참여했다. 김필순은 1908년 4월 안창호가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등과 함께 설립한 신민회에 참여했고, 안창호가 형과 함께 운영했던 ‘김형제상회’에서 거주하며 신민회 업무를 볼 수 있도록 지원했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을 빌미로 일제가 조작했던 ‘105인 사건’에 연루된 김필순은, 일제의 검거를 피해 1911년 12월 31일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준비하고 있었던 신민회의 활동과 관련하여 독립운동 기지 개척을 목적으로 망명을 떠난 것이었다. 서울을 떠난 김필순은 조선인들의 집단 거주지였던 중국 통화현에 정착했다. 


근대적 시설을 갖춘 병원이 따로 없었던 통화현에서 김필순은 병원을 개설해 이주한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들의 치료에 앞장섰다. 김필순은 1916년 8월경 일제의 감시와 간섭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 통화현을 떠나 내몽고 치치하얼로 이주했다. 치치하얼에서 북제진료소를 개설하고 의료활동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던 김필순은, 1919년 9월 1일 갑작스럽게 순국했다. 


그의 순국 과정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매제(妹弟)였던 김규식과 연계해 국제사회에 임시정부 설립을 널리 알리고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매진하고 있는 김필순의 독립운동을 막고자 했던 일제에 의해 독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부에서는 김필순 지사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 청년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헌신과 희생


독립운동에 앞장서다가 젊은 나이에 순국하신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 지사들의 삶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보다 교육의 중요성과 배운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제는 식민지 노예교육을 통해 조선 사람들은 식민 통치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무능한 존재임을 각인(刻印)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분명히 자각했다. 우리도 할 수 있으며, 하면 된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고 끊임없이 노력했고 분명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주체적 자각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할 수 있는가? 하는 현실의 문제를 넘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인가? 하는 당위의 문제가 더욱 중요함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이들에게 조선의 독립은 현실적으로 가능한 과제는 분명히 아니었으나,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당위의 과제였다. 조선인으로서의 주체적인 자각을 통해 이들은 모두 조선의 독립은 필연적이라고 확신하고 헌신했다. 흔들리지 않는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족하더라도 자신을 긍정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노력하면서 미래를 일구려는 모습을 본인들의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들은 특히 공부와 배움을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실천하기위한 수단으로 삼고,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계속되는 좌절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꾸리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다./사진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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