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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66] 치악산 강림 전투에서 순국한 '민긍호'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07 10:17:08
  • 수정 2023-05-07 15: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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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민긍호, (1865) ~1908, 대통령장 (1962)


국권을 빼앗기고 국민이 도탄에 빠져있는 때에 내가 일본에 투항하면 일본 치하에서 지위가 높아지고 부귀가 8역적(逆賊)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나의 뜻은 나라를 찾는데 있으므로 강한 도적 왜(倭)와 싸워서 설혹 이기지 못하여 흙 속에 묻히지 못하고 영혼이 망망대해(茫茫大海)를 떠돌게 될지라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 강원도 관찰사의 귀순 권유에 대한 선생의 거부 답신 중에서 -


전투력과 화력이 뛰어난 부대로 정평

치악산 강림 전투에서 순국


# 1897년 입대, 군인의 길을 걷다


민긍호(閔肯鎬, 미상 ∼ 1908. 2. 29) 선생은 명성황후를 배출한 여흥 민씨의 일족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1897년 선생은 진위대에 입대하여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군인의 길에 들어섰으며 이후 강원도 원주 진위대 산하의 고성분견대에 배속되었다가 춘천분견대로 옮겨 근무하였다. 이 때인 1900년 선생은 정교(오늘날 상사)로 진급하였고, 1901년에는 특무정교(특무상사)로 발탁되어 원주진위대 본부로 전근하였다. 그리하여 여기에서 선생은 1907년 8월 일제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될 때까지 군무에 충실하고 있었다. 이 시기 일제의 식민지화는 본격화되어 1904년 ‘한일의정서’, 1905년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자주적인 외교권과 재정권이 장악되기에 이르렀다. 나아가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을 강행하였다. 이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국방력을 말살하여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 완전한 식민지화를 꾀하기 위한 조치였다.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 해산이 감행되자 서울 시위대와 지방 진위대 장병들은 이를 거부하며 반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일제의 한국 군대해산에 항의하여 권총으로 자결, 순국한 것을 신호탄으로 하여 제1대 장병들이 봉기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시위대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도 견습 참위 남상덕의 지휘 아래 봉기하여 반일 무장투쟁을 벌여 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병영을 포위하고 있던 일본군과 격렬한 총격전을 벌인 다음, 시가로 나와 남대문과 서소문 사이에서 탄환이 바닥날 때까지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탄환이 떨어져 더 싸울 수 없게 되자 이들은 백병전을 벌이며 시민들의 지원 아래 서울을 빠져 나가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이어 일제가 서울 시위대에 이어 지방 진위대의 해산을 강행하자 해산 군인들의 봉기는 지방으로 파급되어 전국적으로 폭발하여 갔다. 이에 따라 의병부대의 전투력은 해산 군인들의 참여로 급격히 증강되었고, 또 유림과 양반 관료 중심의 의병운동은 이제 해산 군인은 물론 평민들까지 대거 동참함으로써 전국적인 국민전쟁으로 확대 발전하여 갔다.


#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의병부대 조직


선생 또한 서울 시위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조국과 민족을 위해 무장 봉기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원주진위대의 대대장 홍유형이 군부의 전보 명령에 의해 상경 길에 오르자 해산명령을 받으러 가는 것으로 판단한 선생은 병사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봉기 준비에 착수하였다. 우선 선생은 대대장 홍유형의 지휘 아래 서울로 진격할 것을 구상하고, 8월 3일 소대 병력을 급파하여 상경 길에 있던 그를 본대로 데려와 부대를 지휘하여 서울로 진군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유형이 그날 밤 여주로 도망하자 선생은 자신이 몸소 원주진위대 병사들을 지휘하여 봉기하기로 하고, 거사일을 8월 5일로 결정하였다. 이 날은 원주읍 장날이어서 많은 농민들과 포수들이 장터에 모이기 때문에 다수의 동조자들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8월 5일 드디어 선생의 지휘 아래 원주진위대 병사들이 봉기하였다. 선생은 이 날 비상나팔을 불게 하여 장병들을 모두 집합시킨 뒤, “나라에 병사가 없으면 무엇으로 나라라 할 수 있겠는가. 군대를 해산하라는 명령에 복종할 수 없다”고 하면서 무장 봉기를 선언하였다. 그리고 봉기에 동조한 대대장 대리인 김덕제, 정위와 함께 무기고를 열어 병사들을 물론 봉기에 호응한 일반 민중들에게 총기와 탄약을 분배하여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이들은 선생의 지휘 아래 우선 우편취급소, 군아, 경찰분견소 등을 습격하여 원주읍을 완전히 장악한 뒤, 미처 도망하지 못한 일본인들을 처단하면서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나아가 선생의 의병부대는 원주 남산으로 도망간 일본 경찰대를 추격하여 패주시키고, 이곳에서 원주읍을 점령하기 위해 급파된 일본군 충주수비대 부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여 십여 명의 적군을 사살함으로써 그들을 격퇴하였다. 이 같은 원주진위대의 봉기 사실을 보고받은 일본군 사령부는 서울 주재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 대대장을 지휘관으로 하여, 보병 2개 중대와 기관총 4정, 공병 1개 소대로 편성된 진압 부대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8월 10일 원주에 도착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를 추적하였으나 조금도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형을 잘 아는 주민들이 선생의 의병부대를 은밀히 후원하고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선생의 기념상# 유격전을 통해 전과를 올림


이후 선생은 전략 전술적 차원에서 투쟁역량을 보존 강화하고, 일본군에 대한 효과적인 타격을 가하기 위하여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편성한 뒤, 이를 여러 의병장들에게 맡겨 지휘하게 하면서 일본군과의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총지휘 아래 여러 소부대 의병장들은 과거 원주진위대와 그 분견대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수시로 이합집산하면서 신출귀몰하게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올렸다. 특히 선생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이 중심이 된 부대로 화력과 전투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활동지역이 과거 이들의 관할 지역이었기 때문에 지형지물에 익숙하여 일본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시기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허준, 이경삼, 김만군, 고석이, 김군필, 이한창, 한기석, 한갑복, 윤기영, 이강년, 변학기, 조인환 등의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이강년 의병부대와 밀접한 연락 및 협력 관계를 맺고 일본군과의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70여 차례의 일본군과의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 원주, 여주, 이천, 홍천 일대에서 백여 회 전투


선생은 의병부대를 우선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김덕제가 지휘하여 동해안의 산악지역으로 진출하게 하였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몸소 지휘하여 내륙 산악지역으로 들어갔다. 이는 일본군의 진압작전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나아가 산악지역을 근거지로 유격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한 조치였다. 분리 활동 직후인 8월 12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여주를 기습하여 경무분견소를 포위 공격한 후 이곳 일본 경찰과 그 가족들을 처단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때 많은 주민들이 선생의 의병부대에 자원 입대하였으므로 음죽(陰竹)에서 장호원(長湖院)에 이르렀을 때에는 부대원의 수가 수천 명이나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 여주, 이천, 양근 일대에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사령부는 크게 당황하여 대전, 수원 주둔 일본군 수비대를 이천, 장호원, 여주 방면으로 이동시키고 서울 주둔 일본군을 양근, 이천 방면으로 증파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의 의병부대는 그 해 8월 중순 이강년 의병부대와 더불어 충주 공략작전 계획을 수립한 뒤, 8월 22일 행동을 개시하였다.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강년 의병부대와 함께 8월 23일 충주를 양방향에서 협공하여 적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충주를 점령하지는 못하고 장호원으로 후퇴하였다. 그러나 후퇴하면서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이천에서 전신, 전화선 수리 보호를 위해 출동한 일본군 1개 소대를 공격하여 패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7일 선생의 의병부대는 6백여 명의 병력을 2개 부대로 나누어 홍천읍을 습격하여 일본군 수비대에게 대타격을 가하였다. 특히 9월 10일에는 한 부대는 재차 홍천읍을 습격하고, 다른 부대는 낭천읍을 공격하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홍천읍에서는 일본군 창고 등 군용 시설물들을 소각시키고, 낭천읍에서는 군아를 기습 점령하여 그곳 무기고에서 다수의 총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9월 19일에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음성 사정리에서 일본군 중추수비대와 조우하여 격전을 벌였고, 9월 23일에는 횡성 갑천에 있는 봉복사 부근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큰 전과를 올렸다.


민긍호 전적비# 전투력과 화력이 뛰어난 부대로 정평


그 후 선생의 의병부대는 같은 해 10월 26일 횡성 둔촌에서, 11월 27일에는 홍천 서남쪽 양덕원에서, 12월 8일에는 원주 동남쪽 작곡에서 지속적으로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그 해 12월 이인영, 허위, 이강년 등이 중심이 되어 경기도 양주에서 전국 의병의 연합부대로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자 선생은 여기에 참여하여 관동창의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참여한 의병부대들 중에서도 선생의 의병부대는 해산 군인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전투력과 화력이 가장 탁월한 부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다음해인 1908년 1월 13도 창의군이 곧바로 서울 진공작전을 수행하자 선생의 의병부대는 경기도 가평을 거쳐 서울 근교까지 진출하여 이를 지원하여 갔다. 이 과정에서 선생의 의병부대는 1907년 12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강원도 회양군 호현동 전투, 경기도 가평군 죽둔리 전투, 지평군 삼산리 전투 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여러 번의 전투를 벌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의병부대는 일본군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을 후원하였다. 그리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친상으로 귀향함에 따라 1908년 1월 28일 서울 진공작전이 중지되자 선생의 의병부대는 본래의 활동 지역인 강원도로 귀환하여 유격전을 계속하였다.


# 치악산 강림 전투에서 순국


그러던 중 1908년 2월 27일 선생이 직접 지휘하는 의병부대는 원주의 강림 박달치 부근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이를 격퇴한 뒤, 우회하여 등자치 아래 궐덕리에서 숙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일본군 충주수비대와 경찰대에게 탐지되었다. 그리하여 2월 28일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대는 사자산과 구룡산을 우회한 뒤, 다음날 선생이 주둔하고 있던 궐덕리를 동·남 양방면에서 포위 공격하여 왔다. 이에 선생의 의병부대 일부는 궐덕리의 서방고지에 올라가 반격하고, 나머지는 촌락 주위의 벽을 은폐 엄폐물로 삼아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하지만 상호 교전이 길어지자 의병부대는 탄환이 고갈되어 결국 일본군에게 촌락을 점령 당하고, 선생 또한 적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병사들은 일단 후퇴하였다가 그날 밤 선생을 구출하기 위하여 다시 일본군 숙영지를 공격하였다.


이 때 의병부대 병사들은 “우리 대장 민씨는 있는 곳에서 소리 지르라”고 외쳐대면서 사생결단의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군은 악랄하게 선생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제의 군대해산 조치에 반대하여 1907년 8월 5일 봉기한 선생은 항일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회복의 길을 개척하다가 1908년 2월 29일 일본군에 의해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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