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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자를 찾아서 67] 불교의 대중화 위해 대각사 창건한 '백용성'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07 10:3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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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백용성, 1864 ~1940, 대통령장 (1962)


“아! 사랑은 끊어졌다. 인도(人道)는 멸망되었다. 온 인류는 지금 거짓의 탈을 쓰고 약탈의 창을 들었도다(…)약육강식을 유일의 진리로 표방하고 ‘강권 즉 도덕’임을 공공연히 부르짖는 현세이다. 야욕의 불길은 우리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살벌의 흉기는 우리 눈살에서 쇠칠뿐. 사랑이 그 무엇이며 인도가 그 어디 있으랴?” - 선생이 1924년 발행한 잡지 [불일(佛日)]의 창간사 중에서 -


#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불법에 귀의


백용성(白龍城, 1864. 5. 8∼1940. 2. 24) 선생은 1864년 5월 8일 전라북도 남원군 하번암면 죽림리(현 장수군 번암면 죽림리)에서 아버지 백남현과 어머니 밀양 손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수원(水原), 속명(俗名)은 상규(相奎), 법명(法名)은 진종(震鍾), 법호(法號)는 용성(龍城)이다. 선생은 불제자로서의 천품을 타고난 듯 어릴 때부터 자비스런 성품을 보여 주었다고 한다. 또한 7세 때인 1870년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는데, 9세에 이르러서는 한시를 지을 정도였다고 하니 선생의 영특한 문재(文才)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선생은 14세 때 꿈속에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느낀 바 있어 남원 교룡산성에 있던 덕밀암(德密庵)으로 찾아가 출가하려 하였으나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16세 때인 1879년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극락암으로 출가하여 화월화상(華月和尙)을 은사로, 혜조율사(慧造律師)를 계사로 불법 수도의 길에 들어섰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해인사는 고려시대 불력(佛力)으로 몽고의 침입을 막아보려 조판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유수한 호국사찰 가운데 하나였다.


따라서 선생이 이곳에서 불도에 입문했다고 하는 것은 우리나라 호국불교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킬 인물로서 조건을 예비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선생의 전 생애를 추적해 보면 이 같은 우리의 기대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실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인사에서 불법에 귀의한 선생은 이후 40세 남짓까지 전국의 명승 대찰(大刹)을 두루 찾아 다니며 수행 정진하면서 불법을 깨우치고, 44세 때인 1907년 9월 중국으로 건너가 약 2년 동안 중국의 5대 명산과 북경 관음사, 통주 화엄사, 숭산 소림사, 조계산 남하사 등의 불교 성지를 순례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선생은 국제 정세와 시대의 변천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는데, 그 같은 경험은 이후 대각교(大覺敎)운동의 한 계기가 되었다.


#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대각사 창건


선생의 생애에 있어서 47세가 되는 1910년은 매우 중요한 전환기였다. 지금까지는 개인적 수행과 산중에서의 참선을 통하여 득도에 힘써 왔으나, 이 때부터는 속세에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통한 중생구제에 나서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마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기자 우리 민족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하는 것이 곧 중생구제이고, 또 그를 위한 불교의 대중화가 무엇보다도 절실하다고 인식한 까닭으로 보인다. 따라서 선생은 1911년 상경하여 우선 신도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여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 해 4월 선생은 종로구 복익동 1번지에 대각사를 개창하여 본격적으로 대각교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선생이 평생의 업으로 생각한 대각교운동이란, “내가 깨닫고 남을 깨닫게 하자(自覺覺他)”는 것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지향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말미암아 중생의 삶의 문제와 괴리된 채 산중(山中) 불교화되고, 또 개항 이후 일본 불교의 침투로 말미암아 왜색화되고 있던 기존 불교를 개혁하여 대중불교와 호국불교로서의 한국 불교의 전통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대각교운동의 본산인 대각사는 대중불교의 호국불교의 전통을 전파하는 포교소이자 수행장이었고, 한용운 등 많은 불교계 민족운동가들이 조국과 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선생과 상의 논의하는 독립운동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대한승려연합회 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불교대표로 참여


이 같은 연계선상에서 선생은 한용운의 권유로 민족 독립의 제단에 헌신할 것을 각오하고, 1919년 3.1독립선언의 민족대표로 불교계를 대표하여 참여하였다. 당시 천도교의 최린, 기독교의 이승훈 등과 함께 3.1운동을 앞장서 추진하던 한용운은 2월 25일경 선생을 대각사로 찾아왔다. 그는 선생에게 지금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각 종교계가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려고 하니 참여하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평소 조국 광복과 민족 독립을 중생구제의 일환으로 여겨오던 선생은 흔쾌히 승낙하고는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날인할 인장을 거리낌없이 내주었다. 그리고 선생은 3월 1일 오후 2시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천도교, 기독교 등 다른 종교계 민족대표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대한독립만세를 3창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이로 인해 선생을 비롯해 민족대표들은 출동한 일경에 피체되어 경무총감부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이 때에도 선생은 일본인 판사가 독립선언서를 보이며 이 취지에 찬성하는가 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떳떳하게 대답하였다. 또 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는가 하고 물으면, 선생은 “조선이 독립하는 것이 마음으로 좋아서 찬성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경무총감부에서건 법정에서건 조금도 조국 독립의 의지를 굽히지 않음으로써 호국불교의 신념을 표출하였다.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 불경의 한글화 작업을 위해 ‘삼장역회’ 조직


수감 중에도 선생은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불교의 대중화를 실현하며, 그를 통해 어떻게 중생구제와 민족 독립의 역량을 쌓아갈까 고심하였다. 그에 대한 해답으로 선생이 얻은 결론은 불경의 한글화 작업이었다.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가 가을 됨을 아는 것이니, 세계 인류는 생존 경쟁을 하고, 경제의 파탄은 극도로 되어 가는 시대에 누가 한문에 뇌를 썩이어 수십 년의 세월을 허송하며 공부하리오. 비롯 수 십 년을 공부할지라도 한문을 다 알고 죽는 자는 없을 것이며, 다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장래에는 무용의 학문이 될 것이니 무엇에 쓰리오. 오늘날 철학, 과학, 천문학, 정치학, 경제학 등 배울 것이 많은 시대에 한문만을 가지고 수십 년의 세월을 허비하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문명발달의 장애만 될 것이며, 설사 수십 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여서 큰 문장이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 종교의 진리를 알지 못할 것이다. 또 중국 사람들은 중국글을 좋아하나 우리 조선 사람들은 조선글이 적당할 것이니 내가 만일 출옥하면 즉시 동지를 모아서 경전 번역하는 사업에 전력하여 이것으로 진리 연구의 한 나침반을 지으리라”


선생의 간찰(왼쪽), 선생과 홍병기의 친필 유묵(오른쪽)즉 선생은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경을 쉬운 한글로 번역하여 많은 사람들이 읽게 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를 확대하고, 나아가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우수성과 호국불교의 전통을 발견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독립역량을 증대할 수 있을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1년 3월 출옥 후 삼장역회(三藏譯會)를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불경의 한글화 작업과 불교 대중화를 위한 각종 포교서의 저술에 착수하였다.


# 독립자금 조성을 위해 선농일치운동 전개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이 시기 사원경제가 안고 있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인식하였다.


"우리들이 안일에 취하고 게으름에 빠져 도덕을 닦지 아니하고 개인의 이익만 얻고자 하여 시주(施主)에게 아부하니 막중한 성전이 무도장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것을 보면 경솔하고 거만한 마음이 일어나 불교는 흡혈적, 사기적 종교이며, 기생적 종교라 아편독과 다름없다 하니 우리 불교가 과연 이러한 것인가. 나는 조석으로 생각함에 수치스러운 마음을 이기지 못하는 바이다. 오늘날 불공이나 시식을 하여 먹고 생활하고자 하나 천하대세가 달라졌다. 이것은 몇 년이 못되어 끊어질 것이니 하루 빨리 깨달을 지어다.”


때문에 선생은 이 같은 사원경제의 난맥상을 청산하고, 나아가 일제하 우리 민족과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주기 위해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불교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갔다. 우선 선생은 1922년 중국 만주의 간도성 연길현 명월촌과 봉녕촌에 각각 70정보의 농지를 마련하여 대각사 선농당(禪農堂)을 설립하였다. 여기에 선생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여 이주하거나, 혹은 가혹한 식민지 수탈에 시달리다가 남부여대(南負女戴)하여 이주한 우리 동포들을 불러 모아 농사짓게 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만주에서 유랑 걸식하던 우리 동포들의 생활의 기초를 세워주고, 이들에게 불교의 포교를 통해 민족의식을 일깨워 주면서 조국 광복의 초석을 놓아 갔다.


국내에서도 선생은 경남 함양군 백운산에 임야 300여 정보를 확보하고, 그 주변의 전답을 구입하여 화과원(華果圓)을 개설하였다. 여기에 선생은 수 만주의 과수를 심게 하여 일하면서 참선하고, 참선하면서 일하는 선농일치의 불교운동을 벌여 갔다. 그리하여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힘겨운 사원경제의 자립 기반을 마련하고, 나아가 민족경제의 회복과 독립운동 자금의 조성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는 민족에 있어서나 종교에 있어서나 경제적 자립 없이 진정한 독립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선생의 혜안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용성 판결문그리고 선생은 1924년부터 박한영 등과 함께 <불일(佛日)>이라는 불교 잡지를 발행하고, 여러 도시에 포교당과 선원을 개설하고 수시로 선회를 열어 불교 대중화 운동을 통한 민족 계몽운동에 박차를 가해 갔다. 특히 선생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일요 불교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들에 대한 포교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는 당시 범람하고 있던 외래 종교와 진종, 일련종, 조동종 등 일본 불교로부터 어린이들을 보호하여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게 하고, 또 한국 불교의 전통을 전파함으로써 민족의 밝은 미래를 열어 가려는 선생의 원대한 포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선생은 이 때 모든 불교 의식과 염불을 우리말로 하고, 모두 함께 쉽게 부를 수 있는 찬불가(讚佛歌)도 직접 작사, 작곡하여 손수 풍금을 연주하면서 포교함으로써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포교 방식의 현대화에도 힘썼다.


# 왜색불교 타파를 위한 건백서 제출


이 시기 일제는 일선(日鮮) 동화 정책과 민족문화말살책의 일환으로 한국 불교에 대한 왜색화 작업을 가속화시켜 갔다. 즉 일제는 승려들의 대처식육(帶妻食肉)과 음주솔가(飮酒率家)를 암암리에 조장하고, 나아가 주지 자격에 비구계(比丘戒)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파괴하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뜻을 같이 하는 비구승들과 함께 1926년 5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건백서(建白書)를 제출하여 조선총독부의 불교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불교계의 정화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전통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이 선생은 일제 강점기 민족의 문제를 종교의 문제로 일치시켜 인식하였다. 때문에 선생은 조국과 민족에서 동떨어진 산중(山中) 불교가 아니라, 그와 아픔을 같이 하는 현실 불교를 추구하였다. 결국 선생은 그 실마리를 대중불교와 호국불교의 전통을 지닌 한국 불교에서 찾았다. 따라서 선생은 대각교를 개창하여 한국 전통불교의 맥을 계승 고수하고, 나아가 그를 통해 민족 문제의 해결을 모색한 민족 문화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로 일생을 시종하였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0년 2월 24일 목욕제계 한 뒤, 제자들을 불러 놓고 “그동안 수고했다. 나는 간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이 때 선생의 나이는 77세요 법랍은 61세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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