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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유공지를 찾아서 69] 중국 산서성 부곡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한 '이원대'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13 22:2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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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이원대, 1911 ~1943, 독립장 (1977),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 조선의 젊은이 행진하네/발마춰 나가자 다 앞으로 지리한 어둔 밤 지나가고/빛나는 새날이 닥쳐오네 우렁찬 혁명의 함성 속에/의용대 깃발이 휘날린다 나가자 피 끓는 동무야/뚫어라 원수의 철조망 양자와 황하를 뛰어 넘고/피묻은 만주벌 결전에 원수를 동해로 내어 몰자/전진 전진 광명한 저 앞길로 - 선생이 참여 활동한 ‘조선의용대’ 군가 중에서 -


# 독립투쟁 위해 스물 세 살 때 부산에서 우편선 타고 중국으로 망명


이원대(李元大, 1911.12.29 ~ 1943.6.17) 선생은 우리나라가 일제에게 주권을 강점 당한 다음해인 1911년 12월 29일 경북 신령군 지곡면 오산동(현재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에서 부친 이중호(李重鎬), 모친 정오동(鄭梧桐) 사이의 5남 1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는 덕산(德山)·마덕산(馬德山)을 사용하였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강직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도량이 넓고 총명하여 선생의 주위에는 항상 많은 친구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부친과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선생은 12세가 되던 해인 1922년 5월 인근에 자천보통학교가 설립되자 여기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1928년 초 이 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당시 영천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영천농업보습학교에 입학하여 1년 과정을 마쳤다.


이후 선생은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일제의 압제와 수탈에 신음하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면서 식민지 상황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고, 또 그 속에서 조국광복을 모색하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온 이웃 동네의 안병철(安炳喆)의 권유로 1933년 8월 부산에서 우편선 경안환(慶安丸)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안병철은 1931년 이육사(李陸史)·조재만(曹再萬)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이 중국 국민당 정부와 제휴하여 1932년 10월 남경 교외에 설립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제1기로 졸업한 인물이었다. 의열단 혁명간부학교로도 약칭된 이 학교의 설립 목적은 ‘한국의 절대 독립’과 ‘만주국의 탈환’이었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①일만(日滿) 요인(要人)의 암살, ②재만 항일단체와 제휴, ③국내·만주지역의 노동자·농민층에 대한 혁명적 준비 공작, ④위조 지폐 발행을 통한 만주국의 경제 교란, ⑤특무활동에 의한 물자 획득 등을 졸업생의 활동 방침으로 하고 있는 문자 그대로 민족혁명자 양성소였다. 바로 이 같은 혁명간부학교를 안병철은 1933년 4월 졸업한 뒤, 제2기 학생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한 의열단 공작원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는 평소 의협심이 유난히 강한 의혈 남아였던 선생을 포섭하였고, 선생 또한 그의 권유로 독립투쟁에 투신하기로 결심함으로써 중국으로 망명하게 된 것이었다.


# 의열단 혁명간부학교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서 군사학 공부


자천보통학교 졸업 당시의 이원대 선생(1928)중국 도착 후인 1933년 9월 선생은 제1기생 배출 후 강소성(江蘇省) 강녕진(江寧鎭)으로 이전한 의열단 혁명간부학교에 제2기생으로 입학하였다. 선생은 6개월 과정의 이 학교에서 군사학을 비롯하여 철학·정치학·경제학·사회학, 그리고 각국의 혁명사 등 혁명간부로서 갖추어야 할 기본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졸업을 앞둔 이듬해 2월 김구의 요청으로 선생은 김승곤(金勝坤)·김일곤(金逸坤) 등 14명의 동기생들과 함께 혁명간부학교를 떠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 한인특별반에 입교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尹奉吉) 의사의 홍구공원(虹口公園) 의거를 계기로 설립된 것이 바로 이 한인특별반이었다. 윤봉길의거는 중국인들의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일신시켰고, 그에 따라 국민당 정부 또한 지금까지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특히 1933년 봄 김구와 장개석(蔣介石)의 회담에 의해 한국 청년들을 선발하여 독립군 장교로 훈련, 배출한다는 계획이 결정되었다. 그리하여 진과부(陳果夫) 등 중국측 실무요원들과 협의를 거쳐 1934년 2월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된 것이었다.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발전할 때 일본 본토와 동아 대륙의 교량 역할을 하는 한국 및 남만주 지방의 일본군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침략 원흉을 제거하며, 노동자·농민대중의 지휘 및 중국군과의 연합을 통해 한국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한인특별반 입교생들의 사명이었다. 이러한 한인특별반의 운영은 김구가 고문 자격으로 총괄하였으며, 입교생들에 대한 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李靑天)을 중심으로 이범석(李範奭)·오광선(吳光鮮)·조경한(趙擎韓)·윤경천(尹敬天)·한헌(韓憲) 등의 교관이 담당하였다. 선생은 여기에 입학하여 소정의 교육을 받고 1935년 4월 졸업하였는데, 동기생으로는 김승곤·김일곤·신화균(申化均)·박재혁(朴在爀) 등 62명이었다.


# 민족혁명당의 특파공작원으로 일제 시설 파괴 공작


그 후 같은 해 7월 남경 금릉(金陵)대학에서 민족통일전선의 원칙 아래 의열단을 중심으로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대한독립당 등 5당 통합으로 민족혁명당의 창당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의열단 동료들과 함께 이에 가입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특파공작원으로 중국 경찰과 협조 아래 남경·상해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정탐활동, 일본인 관리 암살, 그리고 일제 시설 파괴공작 등을 전개하며 항일투쟁을 벌여 갔다.


이즈음 일제는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기화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도발한 뒤,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독립운동단체들은 이 같은 상황의 전개에 따라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김구)·한국독립당(조소앙)·조선혁명당(이청천) 등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光復陣線) 결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김원봉)·조선민족해방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 등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民族戰線) 결성이었다. 특히 민족혁명당과 민족전선을 이끌고 있던 김원봉은 중국 정부 수뇌부와 한·중 합작에 의한 항일 연합전선의 구상을 협의하였고, 그 결과 재차 한국 청년들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훈련시켜 실전에 배치하기로 하는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같은 해 12월 선생 등 83명의 민족혁명당 청년당원들은 김원봉에 의해 소집되어 대일항전에서 활용할 특별 공작훈련을 받기 위해 강서성 성자현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省子分校)의 특별훈련반에 입학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 5월 소정의 교육을 마친 선생 등 청년당원들은 김홍일金弘壹의 인솔 아래 무한(武漢)으로 이동하여 거기에 있던 민족전선 본부 요원들과 다시 합류하였다.


# 조선의용대원으로 중국 호남성 장사 전선에서 전투


이렇게 되자 김원봉은 선생을 비롯한 성자분교 졸업생들과 민족전선의 청년 맹원들로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여 중국 각 전구(戰區)에 배속시켜 대일항전에 활용할 것을 중국정부에 정식 제안하여 승인 받았다. 이로써 1938년 10월 10일 호북성 양자강 연안의 한구(漢口)에서 조선의용대가 창설되었고, 그에 따라 한·중 연합작전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결성 당시 조선의용대는 대본부(隊本部)와 2개 구대(區隊), 그리고 각 구대는 3개 분대로 조직되었으며, 대장은 김원봉, 제1구대장은 박효삼(朴孝三), 제2구대장은 이익성(李益星) 등이 선임되었다. 이 때 선생은 43명의 민족혁명당원들로 구성된 제1구대에 편성되었는데, 이들 전원은 중국군 제9전구 사령부 예하에 배속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10월 23일 선생이 속한 제1구대는 한구를 떠나 제9전구 사령부가 있는 호남성 장사로 향하였다. 중국군 제9전구는 곡창지대인 호남성을 중심으로 호북성의 양자강 이남지역과 강서성 서북부를 관할하는 가장 중요한 전구로서 여기에는 중국군 최정예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이곳에서 선생을 비롯한 제1구대 병력은 그 해 12월 초 일본군이 장사 침공을 개시하자 제9전구 사령부 정치부를 도와 전투 중 화재로 피해를 당한 이재민들의 구호사업 및 도시 복구사업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약 1개월 간의 복구사업이 완료되자 선생이 속한 제1구대는 1939년 1월 제9전구 예하의 여러 부대에 배속되어 전선에 배치되었다. 이 때 선생은 호남성 막부산맥 방어선의 오동산(梧桐山) 진지에 배치되어 활동하였다. 막부산맥 방어선은 호남 곡창지대를 지키는 곳으로 중국군과 일본군이 가장 치열하게 격돌하였던 전선이기도 하였다.


# 선무공작 유격전 정보수집 등 작전 수행


여기에 배치된 선생과 제1구대 대원들은 1939년 3월부터 5월까지 상봉(翔鳳)·석산(錫山)·질계항(秩桂巷)·새공교(賽公橋) 공격전 등 여러 차례 전투에 직접 참가하였고, 홍산(紅山)·하가(何家)·옥령가(屋領家)·왕가(汪家)·만가반(萬家伴) 습격, 그리고 하동항(下東港)·대사평(大沙坪)·십리시(十里市)·북항(北港) 매복전 등 수시로 안개와 야간을 이용하여 유격전을 구사하였다. 또 파괴공작에도 참여하여 일본군의 통신시설과 교량, 자동차와 전차까지 폭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일본군의 투항을 유도하는 선무공작(宣撫工作), 일본군 포로에 대한 심문, 적정 탐지 및 정보수집활동을 펴기도 하였다. 동시에 조선의용대는 각처에서 한국인 청년들을 모집하여 조직 확대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조선의용대는 1939년 10월 대본부를 총대(總隊)로, 구대를 지대(支隊)로 변경하는 조직 개편을 단행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기존의 제1구대 병력 일부와 그동안 모집한 신입 대원들로 새로이 제3지대를 편성하였는데, 이 때 선생은 신설된 제3지대에 편입되어 활동하였다.


청년시절의 이원대 선생이즈음 조선의용대는 그간의 활동에 대한 자체 점검을 통해 종래의 활동 노선과 방식에 일대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1939년 10월 조선의용대 창립 1주년 행사에서 제기된 이후 지속적으로 논의, 추진되어 온 무장투쟁의 강화와 그를 위한 화북·만주 진출의 결정이었다. 이는 그동안 조선의용대의 활동지역이 중국 국민당 정부군의 작전지역으로 한정되어 실제 전투는 물론 적후방(敵後方)공작이 기대에 못 미쳤고, 또 한인 동포들이 거의 살지 않는 지역이라 대원 모집활동에도 어려움이 많았던 탓이었다. 때문에 적후방공작을 본격화하여 일본군 점령지역내에서 항일 근거지를 구축하고, 나아가 조선의용대의 무장투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독립전투부대로서의 조직 확대를 꾀하기 위해서는 한인 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화북·만주지역으로의 진출이 필수적이었다.


이 같은 조선의용대의 북상 계획에 따라 선생을 비롯한 제3지대 대원들은 1939년 12월 호남성 형양(衡陽)을 출발하여 10일 만에 강서성 북쪽에 위치한 제9전구 19집단군 사령부 소재지인 분의(分宜)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이들은 19집단군 사령관 나탁영(羅卓英)과 의용대원들의 스승이자 민족혁명당 중앙위원이기도 한 참모장 김홍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어 선생을 비롯한 제3지대 대원들은 최전선 지구인 봉신방면으로 이동하여 전방공작에 뛰어 들었다. 즉 선생을 비롯한 제3지대 대원들은 그 해 12월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본군을 야습하였고, 또 철수하면서는 길가 촌락의 벽에 분필과 목탄을 사용하여 일어로 선무 표어를 써놓고 전단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여러 차례 일본군에 대한 선무활동을 전개하면서 1940년 10월에는 조선의용대 본부가 있던 중경(重慶)에 도착하여 체제 정비와 대원 훈련에 힘썼다.


이후 1941년 1월 초 박효삼 지대장의 지휘 아래 선생을 비롯한 제3지대 병력은 화북·만주로 들어가기 위해 중경을 출발하여 호북성 노하구(老河口)를 거쳐 3월 상순에 하남성 낙양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이미 와 있던 제1·2지대에 더하여 선생의 제3지대가 도착함에 따라 같은 해 봄에는 조선의용대의 대부분의 대원들이 낙양에 집결하였다. 여기에서 이들 각 지대는 제3지대장인 박효삼과 정치위원인 윤세주(尹世胄)를 중심으로 집결하였다. 그것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던 당시에 팔로군이 화북지역을 석권하고 있었으므로 황하를 도강하기 어려웠던 때문이었다. 따라서 황하를 건너기 위해서 중국 국민당 정부와 가까운 민족혁명당 계열의 제3지대를 중심으로 단결하게 된 것이었다.


조선의용대 성립기념 사진# 태항산맥 내 마전 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해 역포위 작전 성공시켜 큰 전과 올려


결국 조선의용대 병력은 박효삼의 활약과 김원봉의 지원으로 중국 군사위원회의 승인을 얻어 그 해 3월 하순 황하를 건넜는데, 이 때 선생도 제3지대의 일원으로 화북으로 들어갔다. 이후 선생은 제1·3지대 대원들과 함께 북진하면서 하남성 북부의 임현(林縣) 일대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군 방병훈(龐炳勳) 부대와 합동으로 2개월 동안 적후(敵後)공작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뒤 이어 도착한 제2지대에 합류하여 태항산 팔로군지역으로 이동하였고, 여기에서 제1·2·3지대는 그 해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되었다. 이 때 선생도 화북지대에 편성되어 산서성과 하북성지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대해 항일 선전활동을 전개하며 이후 1년간 40여 차례 직접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그 가운데 가장 치열했던 것이 1942년 5월 초순의 반소탕전(反掃蕩戰)이었다. 즉 일본군은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대대적인 팔로군 소탕작전을 감행하고 있었는데, 이 날은 그 근거지인 태항산맥 내의 마전(馬田)에 포위망을 구축하고 압박해 왔다. 이에 선생을 비롯한 화북지대 병사들은 야간 기습작전을 감행하여 탈출로를 마련한 뒤 팔로군과 함께 역포위작전을 펼쳐 일본군에게 다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 중국 산서성 부곡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체포되어 고문으로 순국


그 뒤 같은 해 7월 화북 조선독립동맹이 결성되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그 산하의 무력인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확대 개편되었다. 이때 선생도 여기에 참여하여 지속적인 대일 무력투쟁을 전개하여 갔다. 그러던 중 선생은 1943년 3월 산서성 부곡에서 조선의용군 중대장으로 소속 부대원들을 진두 지휘하면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북경 소재의 일본군 석문헌병대(石文憲兵隊)로 압송되었고, 여기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본군의 악랄한 고문으로 말미암아 1943년 6월 17일 32살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다. 1933년 8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투쟁에 나선지 10년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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