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윤여금의 여행이야기 20] 홍성군, 8경의 하나인 ‘홍성 홍주읍성’
  • 윤여금 기자
  • 등록 2023-05-28 04:34:10
  • 수정 2023-06-10 20:46:16

기사수정


[윤여금 기자] 충남 홍성 홍주읍성은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이 남아있고,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져,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내포의 중심인 홍주의 정치와 행정이 이루어지던 곳을 둘러쌓여 남아있어서 가치가 있다. 성안에 홍주역사관, 토성유적, 홍주읍성 비석군, 사찰부재, 병오항일의병기념비, 홍주읍성 수성비(충남 문화재자료), 송림과 송정, 보호수, 성벽과 수구 등이 자리해있다.



    ▲ 홍성 홍주읍성 (洪城 洪州邑城) (사적 제231호)


충남 홍성군에 있는 성으로, 면적 109,542m2,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현재 남아있다. 백제시대의 주류성(周留城)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처음 지어진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고,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 홍주성의 둘레가 533보 2척이며, 여름과 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샘이 하나 있다는 기록만 있을 뿐이다.


조선 초기에는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새로운 규식(規式)에 맞추어 각 지방의 읍성을 고쳐 쌓았다. 이 읍성도 조선 세종 때에 처음 쌓기 시작하여 1451년(문종 1)에 새로 고쳐 쌓았다. 당시 성벽은 둘레가 4,856척(약 1.5㎞)이고,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 4개가 있었으며, 높이 2척의 여장(女墻)이 608개 있었다. 적대(敵臺) 24곳 중 6곳에 설치됐으며, 성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한다. 


그 뒤 현종 때 한계수(韓桂洙)가 다시 수리하였고, 1824년(순조 24)에는 진장(鎭將) 김계묵(金啓默)과 홍주목사 이헌규(李憲圭)가 수리하였다. 1870년(고종 7)에는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조양문·경의문(景義門)·망화문(望華門) 등 3곳의 성문과 함께 관영(官營)을 지었다. 


조양문은 팔작지붕을 올린 정면 3칸의 다포계 문루로, 흥선대원군이 조양문의 편액을 친필로 하사하였다. 동문인 조양문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에 완전 해체하여 복원한 것이다. 


        

    ▲ 홍주아문


아문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고 ‘홍주아문’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된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민종식(閔宗植, 1861∼1917)·이세영(李世永, 1869~1938)·채광묵(蔡光默, 1850∼1906)·안병찬(安炳瓚, 1854~1921) 등은 의병을 일으켰고,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다. 


     ▲ 토성


홍성 홍주읍성은 백제시대의 성으로 당시는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 와서 석성으로서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곽은 1978년 10월 7일에 강도 5°의 지진으로 인해  여러 곳이 붕괴됐고, 일부는 옛날에 유실돼 흔적이 없었던 것을 현장을 발굴하고 주민의 협조로 흩어져있는 석성을 찾아 1979년부터 복원 작업을 시작해 1982년에 부분 보수를 완공했고, 남문인 홍화문을 복원하였다.


    ▲ 홍화문


이 곳은 197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1호 홍주성(조양문, 아문, 산성)으로 지정됐다가 2011년 7월 28일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변경됐다.


홍성 홍주읍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고,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홍주역사관


홍주성역사관은 홍주천년역사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2011년 개관한 홍주성역사관은 천혜의 명당이라하는 의미인 ‘천고낙지의 땅’ 홍주를 주제로 홍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찾아보는 역사의 공간이다. 또한 홍성이 배출한 역사 인물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그들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알려주고 홍주와 보부상을 주제로 보수상의 유품과 활동상, 천주교 박해와 홍주의병, 홍성의 독립운동 등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역사적인 사건들을 소개하고 있다.  




      ▲ 홍주읍성 토성유적

 

홍주읍성 역사관의 남쪽 구릉진 언덕은 2006년 의병공원부지 발굴결과 토성으로 밝혀졌다. 이 토성은 둘레가 약 500m로 추정된다. 홍성(당시 운주)을 역사 책에 처음 알려지게 한 홍규(긍준)가 터를 잡고 살았던 곳으로 보인다. 


      ▲ 홍주읍성 비석군


홍주읍성 비석군은 본래 홍주읍성의 동문인 조양문 앞에 있던 것이 과거 홍성의 입구였던 금마총 앞으로 이전됐다. 이 후 금마총 주변이 개발되면서 다시 홍주읍성 안에 있는 홍주성 역사관 옆으로 옮겼다. 


이 비석들은 조선 중&후기에 홍주목사를 지낸 5명의 선정비로 북쪽부터 경섬(1562~1620), 김희산(1761~?), 윤동원(1685~1741), 유의(1734~?), 변시익(1598~1653)이다. 경성은 1607년 임진왜란 이후 첫 번째 사절로 일본으로 넘어가 포로 1,340명을 데리고 왔고, 후에 홍주목사로 임명됐다. 김희신은 1825년 홍주목사로 근무했다. 윤동원은 1735년 홍주목사로 임명됐는데, 나라에서 79세인 어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유의는 1782년까지 홍주목사로 부임했는데, 검소함과 청렴결백함에 감탄해 정약용이 청백리의 표상으로 ‘목민심서’에 기록했다. 변사익은 17세기 중반 홍주목사로 임명돼 근무했다.


      


      ▲ 사찰부재 


조선초기 억불숭유정책을 시행하면서 많은 사찰이 소유의 토지와 노비가 몰수됐다. 또한 사찰건물과 탑을 부수고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관아 건물과 유교시설을 짓는데 사용했다. 홍주성 주변의 사찰부재들도 홍주성 관아와 성벽을 쌓을 때 사용됐다. 이러한 사실은 홍주성벽 곳곳에 사용된 탑의 몸돌과 여러 가지 사찰관련 부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병오항일의병기념비


1906년 병오항일의병이 일어났을 당시 홍주성을 탈환해 지키고 있던 의병을 공격하다 관군과 일분군 일부가 죽었다. 이 때 죽은 일본군을 위해 1907년 김윤식이 시를 짓고, 이완용이 글씨를 써서 애도한다는 의미에서 애도지비를 세웠었으나, 해방이 되자 애도지비를 철거해 땅에 묻고 그 자리에 다시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웠다. 홍성군은 이 주변을 홍주의병공원으로 지정해 항일의병을 추모하고 있다. 1978년 홍성에 5.0의 지진이 일어났는데, 그 지진의 진앙지가 홍주의병공원이었다. 그 영향으로 홍주성의 성벽이 일부 무너지고, 기념비도 기울어졌었으나 보수 완공했다.  


   

      ▲ 순교터 (홍주감옥)


       ▲ 소나무


#송림과 송정


홍주성 남쪽 의병공원은 소나무가 많이 있어 ‘송림’이라 했다. 이 송림은 풍수지리상으로 홍주성의 남쪽으로부터 나쁜 기운이 들어오기 때문에 이것을 막고자 소나무 숲을 조성한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서 소나무가 울창해지고 주변의 경치가 아름다워지자 홍주성과 송림의 가장 높은 곳에 정자를 세워 ‘송정’이라 했다. 


1922년 일제는 정자를 없애고 신명신사를 세워 홍성군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1945년 행방이 되자 홍성군민들은 신명신사를 헐어버리고 여기에 백야김좌진장군추념비를 세웠다. 이후 추념비는 홍주의병공원사업으로 인해 갈산면 행산리 김좌진장군생가지 뒤편 백야공원으로 이전했다.

 

        ▲ 홍주읍성 수성비(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6호)


이 비는 1824년(순조24) 황폐된 홍주읍성 보수 완공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본래 홍주읍성 조양문 앞에 있었다. 비문에는 성의 축조과정을 기록했다. 홍주 지역은 바닷가에 있어서 서울의 서남쪽의 방비를 위한 중요한 지역이다. 성벽이 허물어진 것을 1823년(순조23) 봄에 부임한 진당 김계묵과 목사 이헌규가 수리하기로 하고, 8월부터 공사를 시작해 11월에 마쳤다. 완성된 성의 규모는 7리이고 일을 한 날이 100일 였다. 


비의 뒷면에는 성 쌓기 작업을 주도하고,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파악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




 


#십자가가 보이는 교회들은 이 곳 성안에 있는 순교터(홍주감옥)을 향해서 자리하고있다.





  

     ▲ 홍화문 (남문)


홍화문은 홍주성의 남문이다. 본래 홍주성은 4개의 문이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개의 문으로 바뀌었다. 1980년 고지도에는 남문의 존재가 확인된다. 2007년~2009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은 성문으로 확인됐고, 옹성은 발견되지 않았다. 홍성군은 2013년 12월 복원한 후 세로운 변화를 추구하는 홍성의 앞날을 상징하는 ‘홍화문’으로 이름을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홍주성 전투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안병찬을 중심한 홍주지역 인사들은 의병봉기를 결의하고 민종식을 의병장에 추대하여 1906년 3월부터 대대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했다. 그해 5월 19일에는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고 13일간 항전했으나, 일분군의 계속되는 중파병력에 의해 31일 결국 많은 희생을 치르고 실패하고 말았다. 


       ▲ 조양문(사적제431호)


조양문은 홍주읍성의 동문으로 조선 1870년 (고종7)에 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수리할 때 세운 문루이다. 홍주읍성의 문은 동문은 ‘조양문’, 서문은 ‘경의문’, 북문은 ‘망화문’이라 하는데,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현판을 하사했다. 북문은 역대 목사나 영장들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기도 했는데, 1894년 동학운동 때는 동학군이 여기서 처형됐다. 


일본인들에 의해서 서문과 북문은 파괴돼 없어지고, 조양문 또한 파괴하려 했으나 읍민들의 강경한 반대로 보존됐고, 1975년 문루를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됐다. 



       ▲ 성벽

 

홍주읍성 서쪽 성벽을 따라 돌다보면 ‘대흥(大興)’이라고 선명하게 새겨진 돌을 볼 수 있다. 대흥은 현재 예산군 대흥면을 가리키며 이 돌에서 다음의 표시된 돌까지 대흥사람들이 쌓았다는 표시이다. 당시 성을 쌓는 공사는 철저하게 구간별 책임제로 진행됐다. 




      ▲ (보호수)느티나무, 수령 650년, 수고20m, 둘레62m

 

이 나무는 1358년(고려 공민왕7년) 경에 식재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백월산에 있던 해풍연 관아가 이 곳으로 옮겼다. 


전설에 의하면 고을에 액운이 감돌 때면 이 나무가 울어주는 영험이 있어 역대 목민관들이 백성의 무고 안락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제를 올려왔다. 그 때에 사용한 제, 기대가 두나무 사이에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 홍주읍성 수구


홍주읍성은 성를 쌓을 때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만든 도랑인 해자를 만들지 않았다. 대신 홍주읍성의 남쪽에 있는 홍성천과 북쪽에 있는 월계천을 해자로 삼아 홍주읍성을 쌓았으나, 월계천의 흐름이 홍주읍성의 서쪽 성벽에 피해를 주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수구와 수로를 만들어 물이 홍주읍성 안으로 흐르도록 했다.


홍주읍성 수구는 성 안쪽에서 성 바깥쪽으로 물을 배수시킬 목적으로 성벽을 관통해 축조된 시설로, 홍주읍성 수로(물길)는 월계천 물을 끌어들여 동서로 관통시키면서 조성됐다. 동벽과 서벽(현위치)에 각 1개씩의 수문이 있었다. 15세기 중반 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수문의 규모는 660cm*440cm이다. 덮개들은 한쪽에 11매씩 총22매로 구성됐으며, 물길의 위는 평평한 돌로 얹었고, 바닥은 판판한 돌과 깬돌로 깔았다. 축조방식은 약 40cm~100cm 크기의 중&대형 돌을 이용해 불규칙하게 쌓았다. 


수문의 입구에 물의 흐름을 조절하고 외부와의 출입을 차단하기 위한 문시설 또는 쇠창살이 설치돼 있었고, 전국의 지방 읍성 중 처음으로 확인 된 수문이라는 특징이 있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한국의 전통사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조선왕릉 이어보기더보기
 한국의 서원더보기
 전시더보기
 한국의 향교더보기
 궁궐이야기더보기
 문화재단소식더보기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