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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93] 맹암 김영렬을 배향한 '신천서원(新川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29 07:2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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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신천서원은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 139호로 지정됐다. 의성 김씨 문중 소유로 문중에서 관리한다. 조선초기의 공신 맹암 김영렬의 뜻을 받들고 후손을 교육하기 위한 학원으로 1945년에 설립했다. 


김영렬은 1400년(정종 2년) 왕위계승을 둘러 싼 왕자의 난인 방간의 난을 평정하고 익대좌명공신으로 책록됐다. 이 서원은 전라남도 장성군 장성읍 옥천동에 학계서원을 재건할 때 함께 세운 것으로, 경내의 건물로는 경훈사(景勳祠).강당(講堂).남덕문(覽德門).출입문 등이 있다. 


경훈사는 향사(享祀)를 지내는 사우(祠宇)로 정면 3칸.측면 1칸 반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로, 태종의 어필과 김영열의 영정이 봉안돼 있다. 강당은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중정일(中丁日)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김영렬(金英烈 1370년 ~ 1421년)의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맹암(孟巖)이요, 시호는 양소(襄昭)다. 얼굴이 준수했고 재질이 뛰어났다. 천성이 효성스러웠고, 모든 일에 정성을 다했다 한다.


집안의 영향으로 공부에 독실해 일찍이 경전의 묘리에 두루 통달했고, 특히 『소학(小學)』 한 편을 평생 처신의 규범으로 삼아 아주 작은 행동도 그 교훈에서 벗어남이 없었다. 일찍이 눈 내리는 밤에 부친과 함께 앉았다가 설야음(雪夜吟)을 읊어보라 명하니, 즉석에서 지어 올리기를, ‘소슬한 겨울밤은 깊어가는데 눈빛, 달빛이 온누리에 가득하다. 유달리 높은 기개가 있기에 저 뜰 앞 소나무는 의연히 서 있도다’ 했다.


이때 그의 나이 겨우 10여 세였으므로 부친이 그에게 충정의 기풍이 있음을 기특하게 여기었다. 그 후에 야은(冶隱) 길재(吉再)가 방문해 그의 생김이 출중하고, 시의 기특함을 보고 감탄해 칭찬하기를 “참으로 훌륭한 사나이다”고 했다.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도 그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경서를 논란해보고는 아들 이래(李來)를 맹암에게 보내 함께 강학하게 했다. 



20세 전후에 학문이 통달하고 문장이 뛰어나자 부친이 과거 보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소년등과는 사실 좋지 못한 일이고, 공자도 나라에 도가 없으면 숨는다 하였으니, 지금 어찌 진취할 때라 여기겠습니까?” 하면서 문을 걸고는 공부에 열중했고, 문달을 구하지 않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성명을 듣고 누차 사람을 보내어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나, 26세 때 부친의 간곡한 설득으로 문과에 급제해 청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하륜(河崙), 조영무(趙英茂) 등과 협력하면서 국정을 운영했다


조선 전기의 문신 겸 무신으로 고려 전서로 태조 을해에 문과 등제해 수군절제사, 안무사, 병조참판을 지내었고,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됐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해 1397년 파직돼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됐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됐다.

 


1404년 參判承樞府事로 있으면서 왜선 1척을 노획한 공로로 국왕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이후 은퇴해 長湍의 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義城君으로 봉작됐고 우의정에 추증됐다. 전라도 長城의 鶴林書院에 배향됐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철폐됐다. 시호는 良昭이다. 저서로는 맹암집이 있다.

 

이 서원의 재향공간인 사당 경훈사와 강학 공간인 강당을 비롯한 남덕문, 출입문 등 목조 기와 지붕집 4동으로 일원을 이룬다. 건조물의 양식은 영남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집이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집이다. 경외에는 근녀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경훈사에는 어필과 김영렬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으며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낸다

 

이 서원의 건축 배경에 대해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의하면 1643년(인조 21)에 전남 장성면 옥천리에 처음 영당(影堂)을 세우고 봉향하다 1718년(숙종 44) 학림서원(鶴林書院)으로 승격시켰는데, 1868년(고종 5)에 훼철됐다. 이 서원은 맹암의 후손이 왕신리 ‘새터마을’에 기지를 잡아 단서각(丹書閣) 1동을 세운 것으로, 점차 규모를 확대해 서원으로 복원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원은 왕신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송림 가운데 남향해 위치하고 있다. 방형의 토석 담장 내에 강당과 사당, 남덕문(覽德門), 사주문이 있다. 사주문을 들어서면 강당이 가로막듯 서 있고, 뒤쪽 조금 높은 곳에 토석 담장이 둘러쳐진 곳에 내삼문인 남덕문을 지나면 사당인 경훈사가 가운데에 배치돼 있어 전학후묘의 공간 구성을 이뤘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가운데 2칸은 대청을 이룬다. 대청의 뒤쪽으로는 반칸 툇마루를 깔았고, 좌우에는 각각 온돌방을 배치했다. 온돌방은 뒤쪽으로 반칸 물려 1칸 반의 크기를 이룬다. 온돌방 앞쪽으로는 마루를 깔아 전면은 4칸 모두 개방된 누각 모습을 이룬다. 자연석 기단 위에 덤벙주초를 놓았고, 전면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으로, 기둥 사이에는 두짝 살문을 내었다. 앞쪽으로 반칸의 툇간을 두었으며, 자연석 기단과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사용했다.


金英烈의 문집인 '맹암집'은 원래 조선전기에 만들어졌으나 임진왜란 때에 없어졌고 뒤에 후손 百祥과 翊中이 집안에 전해온 몇 편의 글과 朴光一의 집안에서 구한 공신기록 등을 자료로 하여 새로이 간행을 시도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그후 1805년(순조 5)에 후손 世躍이 백상 등이 모은 원고로 문집을 간행했고 1844년(헌종 10)에 후손 載福 등이 重刊했다. 그뒤 1969년에 후손 正模와 應煥 등이 다시 ≪실록≫ 등에서 김영렬과 관계된 기록을 찾는 등 몇개의 글을 더 추가해 새로이 간행했다. 규장각에는 1969년에 간행된 이 책 외에도 1844년에 간행된 ≪孟巖集≫ <古 3428-547>도 소장돼 있다.



공신교서란 공이 있는 신하에게 나라에서 공신으로 명한다는 임명서를 말한다. 이 유물은 태종 1년(1401) 2월에 태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는데 공이 있는 인물 46명을 좌명공신으로 책봉한 후 개인에게 내린 공신교서와 공신을로 책봉한 후 역대의 3공신인 개국, 정사, 좌명의 공신들이 하늘에 맹세한 후 작성한 회맹록이다. 


김영열(1370∼1421)이 좌명공신 3등에 책봉될 때 공신교서와 공신도감에서 발급하는 인정서인 녹권이 함께 발급됐는데 현재 녹권은 남아 있지 않고 교서만 남아있다. 공신교서는 김영열, 이래, 윤목 등에게 내린 교서로 이의 내용은 이들 3인이 박포의 반란시에 공훈이 있는 사적을 간단히 기록한 후 양전 80결, 노비 8명 등을 하사한다고 되어있다. 



이 회맹록은 현재 신천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필사본이다. 좌명공신 1등에 책봉된 하륜(1347∼1416)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회맹록의 원본은 없어진 채 『호정집』에 수록돼 있다. 양식은 동일한 것으로, 『호정집』의 경우 이것과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자료는 1401년(태종) 2월 태종(太宗)의 즉위에 유공한 인물 46명을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한 후, 개인에게 내린 공신교서(功臣敎書) 및 공신 책봉(冊封)이후 조선초 이래의 역대 공신인 개국(開國), 정사(定社), 좌명(佐命) 공신(功臣)들이 회맹(會盟)한 회맹록(會盟錄)이다. 김영열(金英烈)(1370, 공민왕 19∼1421, 세종 3년)이 좌명공신 3 등에 책봉될 때에는 공신교서와 공신도감(功臣都監)에서 발급한 록권(錄券)이 함께 발부됐으나, 현재 녹권은 남아 있지 않고 공신교서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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