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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194] 정탁-정윤목을 배향한 '도정서원(道正書院)'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29 07:5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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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준 기자] 도정서원은 임진왜란 때 많은 공을 세우고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사형집행 전에 구한 인물인 정탁(鄭琢)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1640년(인조 18) 처음 사당을 지었고, 강당을 더해 1700년(숙종 23) 도정서원으로 승격했고 1786년(정조 10)에는 정탁의 셋째 아들인 성리학자 정윤목을 추향했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일부가 손실됐으나, 1997년 국비보조사업으로 동.서재, 전사청, 누각 등 5동의 건물을 복원했다.


# 정탁(鄭琢, 1526~1605)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백곡(栢谷). 예천 출신.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교(僑)이고,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고, 이어 도승지 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됐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됐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지리.상수(象數).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했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해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했고, 이듬해 우의정이 됐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서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시키려고 했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했다. 특히, 이 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李舜臣)을 극력 신구(伸救)해 죽음을 면하게 했고,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했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에 녹훈됐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됐고, 저서로 ≪약포집≫·≪용만문견록 龍灣聞見錄≫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은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노곡(蘆谷).죽창거사(竹窓居士). 아버지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탁(琢)이며, 어머니는 거제반씨(巨濟潘氏)로 충(冲)의 딸이다. 일찍이 가정에서 교육을 받다가 정구(鄭逑).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세 전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많은 서책을 읽었고, 시문에 뛰어나 일가의 체격을 이루었다.



필법이 신묘(神妙)하여 일찍이 이국창(李菊窓)의 당벽(堂壁)에 시 두 구절을 초서로 써붙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그곳에 진(陣)을 치다가 글씨를 보고 경탄하면서 뜰에 내려가 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1589년(선조 22)에는 사은사(謝恩使)로 가는 사행(使行)길을 따라 중국에 다녀왔다. 벼슬에 뜻이 없어 두차례 재랑(齋郎)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다가 1616년(광해군 8)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했고, 161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加資)됐으나,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 산수를 벗삼아 시와 서 (書)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에는 용궁(龍宮)의 장야평(長野坪)에 초려(草廬)를 짓고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1786년(정조 10)부터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청풍자문집≫이 있다.

 

서원은 내성천을 바라보는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건물들의 배치가 지형에 따라 자연스레 앉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서원 문루인 입덕루, 강당, 동서재, 사당, 전사청, 고직사 등이 있다. 또 내성천이 가장 잘 바라다 보이는 곳에 읍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약포 정탁이 말년을 보냈다고 한다.

 

‘상현사(尙賢祠)’라는 현판을 단 사당은 강당의 좌측 후면에 위치함, 내삼문과 담장이 둘려쳐져있다. 내삼문은 사주문에 단청을 했고,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형식으로 되어있다. 지형상으로 산자락을 따라 배치돼 있어, 사당에 오르면 서원 일곽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중앙의 2칸은 마루로 꾸미고 좌우에 방을 들였다. 건물의 전면에는 누각형식으로 난간을 만들고 마루와 방 앞으로 툇마루를 연결했다. 방들은 뒤쪽으로 툇간을 만들고 측면으로는 쪽마루를 달아냈고, 좌측의 방은 측면에 상부 다락을 설치했다.

 

동재와 서재는 강당의 정면에 마주보고 배치되어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맞배기와집이다. 중앙에는 마루를 설치하고 좌우에 방을 들였는데 방은 측면 1칸 반을 다 사용하는 것과 한 칸은 방으로 하고 앞의 반칸에는 툇마루를 만들어 중앙의 마루와 연결되게 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입덕루(入德樓)는 서원 경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누각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기와집 건물이다. 정면 3칸 중 어칸을 협칸보다 크게 만들어 안정감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의 모든 기둥을 두리기둥으로 쓰고 있으며, 측면에 풍혈판을 설치했다.

 


고직사와 전사청은 강당의 좌측에 위치한 고직사는 ‘ㄱ’자집으로 우진각지붕을 하고 있다. 평면은 마루를 중심으로 안방과 건넌방이 이어지고, 안방 아래로는 부엌이 붙는다. 전사청은 고직사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 2칸, 측면 1칸의 맞배기와집이다.

 

읍호루(挹湖樓)는 서원의 영역과는 조금 떨어져 내성천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았다. 1601년(선조 34)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며, 정탁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알려져 있다. 단청과 가구의 짜임, 장식적인 요소들이 매우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다. 우측으로 방을 배치하고 옆으로 마루를 들이고 방의 전면으로도 툇마루를 만들었다. 앞으로는 난간을 돌려 누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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