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독립유공자를 찾아서 73] 러시아로 망명해 독립운동 전개...고구려 발해사 살리는 '국사(國史)' 발간한 '장도빈'
  • 이승준 기자
  • 등록 2023-05-29 09:30:17

기사수정

[이승준 기자] 장도빈, 1888 ~1963, 독립장 (1990)


'국가라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을 모아 이룬 것이오. 국정이란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일 <국정>을 자치(自治)하는 것이오. 애국이란 무엇을 말함인가 국민이 그 몸<국가>을 스스로 사랑하는 것이라. 고로 민권이 흥(興)하면 국권이 세워지고 민권이 멸(滅)하면 국권이 쓰러지니 윗사람이 압민(壓民)하는 권리를 힘쓰면 그 나라는 스스로 멸망하는 것이오, 국민된 자가 그 권리의 신장에 힘쓰지 아니하면 그 몸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다.' - 장도빈 선생이 ≪대한매일신보(1908. 7. 18)≫에 쓰신 논설 중에서 -


# 5세 때 한시 지은 천부적 문장력...평양전투에서 일군에 격파 당하는 청군 보고 신문물 공부 결심


장도빈(張道斌, 1888. 10. 22∼1963. 9. 12) 선생은 1888년 10월 22일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에서 장봉구(張鳳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산운(汕耘)이다. 선생의 가계는 사대부 집안이었으나 조부 장제국(張濟國) 때에 이르러서는 출사하지 않고 재야 유림으로 향리에 묻혀 살았다. 그것은 조선 말기의 파행적 정치형태인 세도정치로 말미암아 매관매직이 자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앙 관직에 진출하기보다는 차라리 재야에서 학문에 정진하는 것이 사대부로서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선생은 어릴 때부터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우면서 엄격한 유교적 가정교육을 받았다. 특히 선생은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출중하여 이미 5세 때에 한시를 지어 주위에서 신동(神童)으로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기 조국의 운명은 문호개방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거친 파도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외세에 대항해 민족 자주성을 사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 근대화를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역사적 과제 속에서 우리 민족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더구나 1894년에 들어와 발생한 동학농민혁명운동과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개혁 등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 민족에게 다시 한 번 민족 자주성의 확보와 근대화의 추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동학농민혁명운동을 통해 분출하는 민중들의 사회개혁 욕구를 읽을 수 있었고, 또 힘이 없어 청·일 양국의 전쟁터가 된 나라의 현실을 목격하면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던 선생의 고향에서도 이즈음 조국과 민족의 수호와 발전을 위한 근대화 추진 방안이 강구되기 시작했다. 그 같은 변화에 이르기까지는 청일전쟁 당시의 최대 격전으로 선생의 고향 가까이에서 벌어진 평양전투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조그만 섬나라의 일본군이 대국인 청나라 군대를 격파한 평양전투는 우리 민족에게는 하나의 큰 충격이었다. 더구나 승전의 요인이 근대식 교육 훈련과 신식 무기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 민족은 신학문과 신지식의 수용을 통한 조국 근대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장도빈 선생이 안창호 선생에게 보낸 편지.# 한성사범학교에서 신학문 수학하고 귀향하여 소학교 교사 생활


선생 집안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하여 선생은 1900년 12세의 나이로 평안감사의 추천을 받아 갑오개혁 직후 설립된 근대식 교육기관인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수학했다. 이로써 전통 유학의 토대 위에서 신학문을 수용함에 따라 신구학문을 겸전한 개화 지식인이 된 선생은 1906년 이 학교를 졸업한 뒤, 곧 귀향하여 소학교에 근무하면서 후학양성에 정성을 다해 갔다.


이러는 동안 1905년 11월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해 우리나라의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한 일제는 이듬해 2월 통감부를 설치해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식민지화 정책을 더욱 강화해 갔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그 해 7월 19일 광무황제를 강박하여, “군국(軍國)의 대사를 황태자로 하여금 대리하게 한다”는 양위 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런 다음날 일제는 경운궁 중화전에서 신·구 황제가 참석하지도 않은 채 양위식을 거행케 하여 당시 반일 구국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식민지화 정책의 최대 걸림돌로 인식하였던 광무황제를 강제 퇴위시켰다. 


이어 일제는 이완용(李完用) 매국 내각으로 하여금 같은 해 7월 24일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체결케 한 뒤, 대한제국 정부의 각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이들로 하여금 국정을 운영하는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자행했다. 나아가 7월 31일에는 일제가 작성한 군대해산 조칙을 새 황제 순종(純宗)으로부터 재가 받는 형식을 취한 뒤,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했다. 결국 일제는 이 같은 일련의 침략 책동으로 한국 정부의 통치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국가 보위의 국방력을 말살함으로써 대한제국을 형해화하여 갔다.


# 나이 스물 한 살 때 대한매일신보 논설주필로 구국계몽 운동에 나서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1908년 봄 위대한 정치가가 되어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심으로 상경하였다. 우선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해 정치가가 되기 위해 학업을 닦는 한편, 황성신문사 주필인 박은식(朴殷植)의 소개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논설을 담당했다. 특히 이 때 대한매일신보의 주필인 신채호(申采浩)가 와병 중이었기 때문에 선생이 주로 논설을 작성했고, 1909년부터는 신채호와 일주일씩 교대로 논설을 썼다고 한다. 1904년 광무황제의 후원으로 창간된 대한매일신보는 치외법권을 갖고 있던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각종의 애국적 논설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일제 침략의 실상을 고발함으로써 당시 각계각층에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되고 있던 구국계몽운동을 확대 지원하여 갔다. 아울러 선생은 이 시기 이미 역사학자로 명망 있던 신채호와 동고동락하면서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필요성을 체득하여 향후 국사연구의 토대를 마련했다.


장도빈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저술한 ≪동명왕≫(1925)과 ≪문무대왕전≫(1928) 표지# ‘국권 회복을 위해선 국사 교육이 우선해야 된다.’ 국사 연구하면서 오성학교, 오산학교 교단에


특히 선생은 이 때 대한매일신보사 총무로 있던 양기탁(梁起鐸)의 소개로 신민회에 가입하여 비밀리에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1907년 봄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양기탁 등의 주도로 400여 명의 애국지사들이 국권회복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조직한 한말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이 단체는 본부를 대한매일신보사에 두고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각도와 군에 지부를 설치한 전국적인 비밀결사로,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은 물론 언론·교육·산업진흥 등 거의 전분야에서 항일 운동을 주도하고 있었다. 


선생은 이 단체의 비밀장부를 보관하는 임무를 맡아 활동하면서 당시 대한매일신보사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국채보상운동에도 동참했다. 하지만 경술국치가 가까워지자 일제의 탄압으로 대한매일신보사를 중심으로 하는 국권회복운동은 불가능하게 되어 갔고, 항일 언론 투쟁에 앞장섰던 선생 또한 신문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선생은 국권회복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 국민대중의 애국심을 함양해야 하고, 또 그를 위해서는 국사 연구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고취가 첩경임을 인식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국사 연구에 몰두하는 한편, 경술국치 직후에는 동지들의 권유로 오성학교(五星學校)의 학감에 취임해 민족교육에 심혈을 쏟았다. 이 학교는 원래 서북학회에서 설립한 협성학교(協成學校)의 후신으로 민족 독립운동의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때문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이 학교 역시 2년 만에 폐교됨에 따라 선생은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로 옮겨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 러시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 전개…고구려 발해사 살리는 ≪국사(國史)≫ 발간


이즈음 일제는 데라우찌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날조하여 1911년 9월부터 600여 명의 신민회 인사들을 대거 검거한 뒤, 그 가운데 105인을 기소함으로써 국내의 민족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다. 신민회에 가담하고 있던 선생 또한 이 때 일경의 감시와 조사를 받게 됨에 따라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국외로 망명을 결심한 뒤, 1912년 1월 일경의 감시를 피해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의 연길현 국자가에 도착하였다.


북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국자가 인근의 소개자(小豈子)라는 마을에 있던 한인중학교에서 국사를 가르치며 잠시 머물러 있다가 다시 노령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으로 옮겨갔다. 여기에서 선생은 대한매일신보사에서 동고동락하였던 신채호를 만나 그와 숙식을 같이 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선생은 경험을 살려 신채호와 함께 이종호(李鍾浩)가 발행하던 ≪권업신문(勸業新聞)≫에 항일 논설을 기고하여 한인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일제 침략의 실상을 국외에 전파하여 갔다. 


민중일보 1면그리고 선생은 이상설(李相卨).이갑(李甲).이회영(李會榮) 등 만주.노령지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만나 조국 광복의 방략을 논의 모색하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선생은 국사 교재를 편찬하여 민족교육에 이용하게 하고, 연해주의 고구려와 발해의 유물·유적을 답사하면서 국사 연구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그러던 중 1913년 겨울 미국에 있던 안창호가 선생을 초청하면서 여비까지 보내 왔다. 그리하여 선생은 도미를 결심하고 이듬해 봄에 만주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순방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이 무렵 신경쇠약 증세가 악화되어 중국 안동(安東)에서 한동안 치료를 받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선생은 그동안의 국사 연구를 정리하여 1916년 ≪국사(國史)≫라는 단행본 저서를 발간하였다. 이 책에서 보이는 선생의 역사인식의 특징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유득공의 ≪발해고(渤海考)≫ 이후 최초로 남북국 시대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남국으로서 통일신라와 함께 북국으로서 발해를 기술한 것이고, 아울러 삼국 가운데 고구려를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선생은 고구려.발해 중심 사관은 이후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이는 신채호의 영향과 만주·노령에서 고구려.발해의 유물.유적을 조사한 경험이 크게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생이 당시 우리의 현실에서 대륙을 포효하던 고구려와 발해의 기상, 그리고 수·당 등 대국의 침략을 이겨낸 국난극복의 의지가 필요함을 은연중 드러내 조국 광복의 희망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한 의도로 생각된다.


3.1운동 이후 선생은 국내에서 교육·언론·국사 연구 등 민족문화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민족운동의 활로를 찾고, 나아가 민족의 독립 역량을 증대시켜 조국 광복을 이룰 결심을 하였다. 이는 이 시기 일제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내세우며 식민지 교육의 강화와 한국사의 왜곡 선전을 통해 민족문화를 말살하고, 나아가 우리 민족 자체를 말살하려고 기도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우리 민족 주체의 민족문화운동은 단순히 문화 수호와 보존운동의 차원이 아니라 민족 보존운동이며 더 나아가서는 독립운동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이 같은 인식 아래 선생은 일제가 민족지의 발행을 허가해준 기회를 이용하여 동아일보의 발행을 결심하고, 그 내락을 얻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양도하라는 교섭을 받자 선생은 “목적이 같으니 누가 경영해도 상관없다”고 하면서 서슴지 않고 양보하였다고 한다. 이와 함께 선생은 한성도서주식회사를 설립해 1926년에 이르기까지 국사서적을 위주로 하는 많은 책을 간행하여 출판 문화운동에 힘쓰는 한편, ≪서울≫·≪학생계≫·≪조선지광(朝鮮之光)≫ 등 잡지를 발행하여 민중 및 청소년에 대한 계몽운동에 진력하였다. 특히 선생은 이 시기 고적답사, 국사 연구 및 저술에 심혈을 쏟아 ≪조선역사요령(朝鮮歷史要領, 1923)≫·≪조선역사대전(朝鮮歷史, 1928)≫.≪조선사(朝鮮史, 1932)≫ 등 역작을 펴냈다.


단국대학교 전경# 산간벽지로 피해 다니며 일제와 타협 피해. 해방 이후 <민중일보> 창간하여 민족 운동


1930년대에 들어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침략,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을 도발하면서 이른바 총후(銃後)의 안정과 전시 인력 및 물자 동원을 목적으로 본격적인 ‘황민화’정책을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기 위해 순차적으로 일본어 상용(1937. 3), 신사참배(1937. 7), 황국신민 서사(1937. 10), 창씨 개명(1939. 11) 등을 강요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민족지도자들을 갖은 방법으로 변절시켜 침략전쟁에 협력케 하는 한편, 이들을 황민화정책의 앞잡이로 삼아 한국 청장년들을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 때에도 선생은 끝까지 일제와의 타협을 거부하고 산간벽지로 피해 다니며 국사를 연구하면서 조국 광복의 날을 기다렸다.


8·15해방이 되자 선생은 조국을 위해 가장 먼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심사숙고한 끝에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이 우선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는 선생이 해방 공간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국민계몽을 통한 민주국가 건설에 있음을 인식한 결과였고, 또 한말이래 민족의 실력양성을 위해 줄기차게 실천해온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중일보(民衆日報)≫를 창간하여 사장으로 재임하면서 언론을 통한 국민계몽활동으로 민족의 진로를 밝히며 민주국가 건설에 앞장섰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에는 선생은 교육계에 투신하였다. 그것은 선생이 시종일관 주장해온 민족교육을 통해 민주국가의 동량을 육성하고, 나아가 그들의 애국심을 함양함으로써 민족·민주 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한국대학·단국대학 등을 설립하였고, 이들 대학의 초대 학장으로서 학사행정을 주재하면서도 국사를 강의하며 일선에서 민족교육을 실천해 갔다. 그리고 1949년부터 선생은 육군사관학교에도 출강하며 건국 초기 국군의 민족의식 함양에도 정성을 쏟았다. 이후에도 선생은 국사 연구를 계속하면서 1955년 서울시사편찬위원, 1959년 고등고시위원 등으로 위촉되어 활동하였다. 특히 선생은 1961년에는 중앙상훈심의의원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63년 9월 12일, 선생은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성공의 길을 찾아서더보기
 황준호의 융합건축더보기
 칼럼더보기
 심종대의 실천하는 행동 더보기
 건강칼럼더보기
 독자기고더보기
 기획연재더보기
 인터뷰더보기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