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서울시 구석 구석 321] 미래도시 용산, ‘용산역사박물관(1)’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5-04 00:11:33
  • 수정 2024-05-12 22:18:53

기사수정

사진/용산역사박물관 전경[우성훈 기자] 용산역사박물관은 1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근대건축물인 옛 용산철도병원 건물을 최대한 훼손하지 않고, 용산 도시역사와 문화적 다양성을 담아 재탄생시킨 지역사 전문 박물관이다. 



용산구는 100년 가까이 된 근대문화유산의 가치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1928년 최초 건립 및 2008년 등록문화재 지정 당시 모습을 참고해 붉은색 외부 벽돌 성능 회복과 철도병원 내부 흔적 보존, 창호 및 타일 등 복원.보수작업을 진행했고, 다양한 시대별 전시공간과 체험코너를 마련하고, 용산의 현재를 한 눈에 감상하면서 휴식할 수 있는 옥상공원 등을 함께 조성했다. 


# 프롤로그-천의 얼굴 용산


프롤로그-천의 얼굴 용산/작가 권민호 한국의 근, 현대사는 지금 우리 앞에 독특하고 역동적인 도시 풍경을 펼쳐놨다. 서로 다른 시간과 결을 가진 것들이 한 공간에 압축적으로 뒤섞여 빚어낸 풍경은 바쁘고 복잡하고 또 아름답다. 거울 용산은 이 이질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 훌륭한 재료다. 적산가옥과 주상복합이 함께 있고 이태원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삭은 담벼락이 같이 있다. 지금까지 이어온 쓰린 전쟁의 유산과 과자와 껌을 만들어 우리에게 달콤함을 선사한 업체들의 시작이 한 곳에 있다. 


나(작가 권민호)는 구한말 지어진 철도병원의 외관과 구조 안에 상업, 군산/냉전, 다민족/다양성, 거점/연결/철도라는 키워드로 용산의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풍경을 그려 중첩시켰다. 도면을 연상시키기는 흑백 드로잉을 먼저 했고 이에 기반한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애니메이션으로 흑백 드로잉에 움직임을 주고 이미지의 맥락을 확장해, 용산의 역사를 경험하고 상상하는데 더 풍부한 관점을 제시하려 했다.  


# 한양의 길목 용산


조선시대 용산은 도성 서쪽의 무악산, 오늘날의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어나간 산줄기와 한강으로 둘러싸인 지역을 아울렀다. 그 구불구불한 능선이 한강에 이르러 봉우리를 형성하는데 전체적인 형세가 용을 연상시킨다 하여 용산이라 이름 붙였다. 



건국 초기 용산은 명확히 한양 땅은 아니었다. 당시 한양의 경계는 도성이었다. 다만 수도 한양을 관할했던 관청 한성부는 도성과 함께 도성으로부터 10리(약 4km)에 이르는 성저십리까지 관할했다. 용산은 이 성저십리에 해당했다. 


도성 밖 한적한 강변 마을이었던 용산에 물길 따라 포구가 발달하면서 삼남을 오가는 대로가 용산에서 갈라졌고, 각 지역의 세곡이 용산에서 집결되어 도성 안으로 운반됐다. 자연히 많은 물자와 사람이 용산으로 모여들었다. 한양의 길목이라는 입지는 용산을 교통과 물류의 거점으로 거듭나게 한 바탕이었다.


# 조선의 물류는 용산으로 통한다. 


19세기 초반 도성의 지세와 주요건축물, 조성 안팎을 연결하는 도로를 상세히 그려낸 ‘조선성시도(朝鮮城市圖)’(1830)에서 용산방, 둔지방, 한강방이라 표시된 일대가 오늘날 용산에 해당한다. 군수품 출납을 맡았던 군자감(軍資監), 얼음을 채취하고 관리한 서빙고(西氷庫), 왕실에서 사용하는 기와나 벽돌을 제조한 와서(瓦署),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한 귀후서(歸厚署), 제사에 쓸 가축 사육을 관장한 전생서(典牲署) 등 일찍이 물류와 관련된 주요 관청들이 용산에 집중적으로 설치됐다. 


# 한양과 삼남 사이를 오가는 시작이자 끝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편찬한 역사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가 편찬한 역사지리서 ‘대동지지(大東地志)’ 가운데 ‘정리고(程里考)에는 도성의 성문에서 전국으로 갈라지는 길이 자세히 표시되어 있다. 이를 성문분로(城門分路)라 하는데, 총 10개의 갈래 중에 동래 방향에 4대로, 수원 방향의 7대로 해남 방향의 8대로가 용산을 통과하여 오늘날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통칭하는 ’삼남‘지방으로 이어졌다. 4대로는 조선통신사행로, 7대로는 화성능행로로 사용됐고, 8대로는 ’춘향전(春香傳)에서 이몽룡의 암행로로 그려진 바로 그 길이다. 


# 물길 따라, 뭍길 따라



물에 잠긴 거리 모습/사진-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길고 긴 한강 물줄기 가운데 광나루에서 양화진에 이르는 물길을 가르켜 경강(京江)이라 했다. 한양으로 모이는 물자의 운송과 거래가 이곳 경강을 통해 이루어지면서 용산은 조선 내륙 수운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만초천(蔓草川)을 따라 한강변으로 이어지는 용산은 저지대가 많아 홍수에 취양했다. 때문에 물자를 보관하는 창고는 주로 산자락에 지었다. 경강 포구에 집결된 세곡 또한 상당수 용산 산자락의 창고에 보관했고, 육로로 당현(堂峴)-청파(靑坡)-숭례문(崇禮門)을 거쳐 도성 안으로 운반했다. 


# 여러 갈래의 물길이 만들어 낸 용산 풍경


용산 한강변 선박발착장 전경/용산역사박물관

1890년대 용산 나루터 풍경/사진-용산역사박물관

1890년대 한강황포돛배/사진-용산역사박물관

1930년대 위에서 촬영한 한강의 모습/사진-용산역사박물관

용산한강변 선박발착장 전경/사진-용산역사발물관

1890년대 용산 나루터 풍경/사진-용산역사박물관


조선시대 한강은 나루터별로 이름을 달리 불렀다. 노량진에서 마포에 이르는 오늘날 용산 일대의 물길은 용산강이라 했다. 물이 맑고 잔잔해 정치가 아름다웠던 용산강 유역은 아름다운 호수를 닮았다 하여 용호(龍湖) 또는 남호(南湖)라고도 했다. 조정 문신들을 위한 독서 기구인 독서당(讀書堂) 가운데 남호독서당이 호젓한 용산강 유역에 설치됐다. 한편 무악재에서 발원해 서대문거리, 서울역을 지난 물줄기가 용산에 이르러 한강으로 합류했다. 이 만초천을 따라 용산 취락이 발달했는데, 1967년 만초천 복개가 시작되면서 그 물줄기는 찾아볼 수 없게 됐다. 


# 절로 시를 읊게 했던 용산 일대 한강변


'한국풍속사진첩' 읍청루 일대 , 1910년/사진-용산역사박물관

김석신 '담담장락도', 18세기/현재 용산구 청암동일대와 그 동쪽을 그린 것으로 멀리 남산 아래 용산의 많은 집들이 보그림 속 왼쪽 상단에 위치한 담담정에는 풍악을 올리며 노는 선비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오른쪽 절벽 위에 음청루가 보인다./사진-용산역사발물관한강변의 수려한 풍경을 감상하는 데 최적의 입지였던 용산강 유역에는 조선의 문인들이 여가 활동을 즐기기 위해 마련한 누정과 별서가 많았다. 그 가운데 읍청루(挹淸樓)는 훈련도감 별영청에 딸린 누정으로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임금이 그 경치가 제일이라고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만큼 경강 최고의 누정으로 손꼽혔다. 읍청루와 같은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담담정(淡淡亭)은 안평대군 (安平大君, (1418-1453)의 별서였다. 안평대군은 이곳에 서적 1만권을 저장하고 선비들을 불러 모아 시회를 즐겼다고 한다. 현재는 터만 남았다.<다음회에 계속-조선을 움직인 거상, 경강상인 편이 이어진다.>/사진-우성훈 기자(자료사진은 재촬영 한 것임)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천년 역사향기더보기
 박정기의 공연산책더보기
리스트페이지_R002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