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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의 공연산책 351] 추사고택과 김정희 선생 묘역에서의 추사탄일 기념행사
  • 박정기 자문위원
  • 등록 2024-05-05 07:4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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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고택 옆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역에 다녀왔다.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묘는 추사고택 옆에 있다. 묘지에서 주변 산세를 살피면 전체적으로 아늑하고 편안하다. 이곳에 묘가 있으니 음택이다. 만약 집을 지었다면 양택으로도 손색이 없는 자리다. 풍수에서 양택과 음택의 입지가 다르지 않다. 똑같은 땅에 집을 짓고 사람이 살면 양택지다. 땅을 파고 죽은 사람을 묻으면 음택지가 된다. 만약 명당자리에 있던 묘를 이장하고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섰다면, 묘가 있던 자리의 동과 호가 명당 아파트가 되는 것이다.


묘 앞에는 상석과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석 전면에는 ‘완당선생경주김공휘정희묘(阮堂先生慶州金公諱正喜墓)’라고 음각되어 있다. 김정희는 호가 200여 개에 이를 정도로 많다. 그중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이 가장 유명하다. 추사는 젊었을 때부터 말년까지 즐겨 사용하였다. 완당은 추사가 연경에 갔을 때 완원(阮元)을 만나고 나서 그를 존경한다는 의미로 지은 것이다. 김정희의 글씨를 추사체라고 부르는 것은 중국에서 추사라는 호가 더 유명했기 때문이다.


묘에는 추사와 두 부인이 함께 묻혀 있다. 추사는 15세 때 동갑인 한산이씨와 결혼하여 금슬이 좋았지만 20살의 나이로 사별했다. 23세 때 두 살 아래인 외암마을 예안이씨(외암 이간의 증손녀)와 재혼한다. 추사는 예안이씨와도 금슬이 좋았다. 추사가 관직이나 귀양살이로 떠나 있을 때 늘 부인에게 편지를 썼다. 현재 전해지는 것만 40여 통이 넘는다.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 갔을 때다. 입맛이 까다로운 추사는 제주도의 음식이 짜고 비위에 맞지 않았다. 그는 부인에게 민어나 어란 같은 좋은 반찬을 보내달라고 편지를 썼다. 그러자 부인은 철마다 반찬을 손수 챙기고, 의복을 마련하여 늦지 않게 보내주었다. 그러나 유배 2년째 되는 해 부인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추사가 죽은 아내를 그리며 쓴 ‘도망처가(悼亡妻歌)’는 심금을 울린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 고택


이곳 묘는 본래 첫 부인인 한산 이씨만 묻혔다. 추사와 예안이씨는 과천에 묘가 있었는데 1937년 이곳으로 이장하여 세 명을 합장한 것이다. 묘역은 정비사업을 하면서 본래 지형이 많이 변형되어 혈증을 살피기 어렵다. 다만 묘 바로 뒤 볼록한 입수도두(入首倒頭)는 원래 지형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 입수도두는 용맥을 따라 전달된 생기가 혈로 들어가기 앞서 모인 곳이다. 기가 모여 있기 때문에 볼록하다. 이로 보아 추사 묘가 진혈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정희 선생이 돌아가신지 157년, 후학들은 여전히 선생의 생신날에 모여 예를 올리고 정신을 기린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차를 준비하고, 연밥을 찌고, 향을 피우고, 화사한 꽃과 음식을 준비한다. 추사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서예가들은 묘 앞에서 글씨를 쓰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탄신일과 기일을 기려 온 혜민스님이 그 중심에 있다.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 추사 고택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신지 233년, 후학들은 여전히 선생의 생신날에 모여 예를 올리고 정신을 기린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차를 준비하고, 연밥을 찌고, 향을 피우고, 화사한 꽃과 음식을 준비한다.


추사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서예가들은 묘 앞에서 글씨를 쓰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탄신일과 기일을 기려 온 혜민스님이 그 중심에 있다.


추사는 현재진행형이다. 7월 5일, 추사 김정희(1786∼1856) 선생 탄신 기념일(음력 6월 3일)을 맞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선생의 묘 상석에 각종 과일들과 떡이 푸짐하게 올려졌다. 보기드문 연꽃 장식이 묘역을 환히 비춘다. 정성들여 지은 연잎밥과 정갈하게 우려낸 차 준비가 끝나자 다례가 시작된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와 묘비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아침 일찍부터 천막을 치고, 향불을 피우고, 음식을 준비하느라 구슬땀을 흘린 이들이 묘 앞으로 모여 든다. 예산지역 사람들보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더 많다. 말 그대로 팔도에서 모였다.


이들은 매년 이맘때 열리는 탄신기념다례와 음력 10월 10일 선생의 기일마다 이곳을 찾아 너나없이 정성을 보탠다. 예산군 주요 기관장과 단체장, 정치인들도 어느새 도착해 두 손을 모으고 예를 다한다.


올해도 주관은 혜민스님(예산군 신암면 청화재 주지)이 맡았다. 추사를 세계적 인물이라고 칭하면서도 정작 선생이 태어나신 날과 돌아가신 날을 챙기지 않았던 30여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짐없이 다례를 올린 당사자다.


추사 김정희 선생의 묘와 묘비


준비한 시간에 비해서 예는 간단히 끝났다. 담백하나, 마음과 격식을 다한 모양새다. 추사선생 앞에 내빈들의 서열이나 소개는 어울리지 않는 법, 모두가 추사의 후예로서 같은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이어 기념휘호와 가무가 더해진다. 선생의 탄신을 기뻐하며 후예들이 드리는 선물이다.


혜민스님은 "여기 12분의 위패를 모시고, 어디에도 없는 예를 올리는 이유가 있다. 선생이 청나라에서 공부를 하며 만난 스승과 벗들과 헤어지면서 매년 관련절(연꽃을 감상하는 중국의 기념일. 음력 6월 5일)마다 만나기로 했지만, 한 번도 지키지 못했다고 한다. 후학의 입장에서 애틋한 마음으로 지금이라도 그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선생의 묘를 연꽃으로 장식하고 차를 올리는 것이다. 마침 선생의 탄신일이 음력 6월 3일이어서 이날을 우리나라의 관련절(觀蓮節)로 삼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라고 설명한 뒤 "추사체는 영감에 의해 쓰는 글씨로 형태가 없다. 추사선생은 인류의 스승이다. 모두가 추사를 안다고 하지만, 아무도 추사를 모른다. 선생의 정신과 예술세계가 제대로 조명돼 현재와 미래에 살아 숨쉬어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김정희 선생이 태어나신지 233년, 후학들은 여전히 선생의 생신날에 모여 예를 올리고 정신을 기린다. 더운 여름날임에도 차를 준비하고, 연밥을 찌고, 향을 피우고, 화사한 꽃과 음식을 준비한다. 추사의 뒤를 따르고자 하는 서예가들은 묘 앞에서 글씨를 쓰고 소리를 하고 춤을 춘다. 언제부터인지 모를 정도로 오랫동안 탄신일과 기일을 기려 온 청화재의 혜민스님이 그 중심에 있다.


필자(박정기)와 함께 참석한 연출가 전세권 선생과 캐나다 뱅쿠버에서 귀국한 사업가 김희원 회장 그리고 복싱 웰터급 챔피언이었던 김영팔 사범은 추사고택과 추사 기념관을 둘러본 후 추사선생 묘역에서 진행된 추사탄일 기념행사를 참관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필자가 추사 김정희 선생이 제주도 대정현에서 8년간 유배생활을 하면서 탄생시킨 추사체와 관련한 희곡 ‘불이선란, 고통이 없이 어찌 아름다움이 피어나리’가 1991년 삼성문예상 작막희곡 공모에 선정되었고, 추사 김정희 선생 관련 자료를 당시 간송미술관에 근무하던 최완수 선생과 아산 인취사 주지 혜민스님에게 제공을 받아 집필 완성했기에 현재까지 기념행사에 가끔 참석하고 있다.


청화재 혜민스님


전세권 연출가는 추사 김정희 선생을 다룬 내 희곡 고통이 없이 어찌 아름다움이 피어나리를 극단 신협에서의 공연을 준비하다가 지난 4월에 돌아가셨다. 추사 선생께서도 애석해 하실 듯싶다.


* 주요경력


황해도 금천생, 서울고 서울대미대, 서울대학교 총동문회 이사, 극작가/연출가/평론가, 한국희곡뮤지컬창작워크숍 대표, 한국문인협회 희곡분과 위원, 전 서초연극협회 회장, 본지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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