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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행행궁의 위치를 찾아
  • 우성훈 기자
  • 등록 2024-06-18 13: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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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행[行幸)의 중심, 금천구 '시흥행궁 전시관(2)'

# 시흥행궁의 위치를 찾아


환어행렬도에는 행궁의 홍살문 뒤에 남-북으로 흐르는 물길이 지나가고 그 너머에 행궁이 있다. 1911년에 제작된 ‘지적원도’와 ‘토지조사부’에는 옛 하천과 국유지가 표시되어 있다. 이것을 현재의 지적도, 옛 항공사진 등과 겹쳐보면 현재 형졔약국 부근에 시흥행궁의 입구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환어행렬도에 그려진 시흥행궁시흥행궁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환어행렬도’이다. 그림 속의 시흥행궁은 서남쪽을 향하고 있다. 홍살문 뒤로는 동-서로 수로가 있고 다리가 표시되어 있다. 행궁에서 뻗어 나오는 도로 좌우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좌측마을에는 기와집 두 채가 확인된다. 두 채 모두 기와를 사용한 점, 특히 오른쪽 건물은 삼문과 붉은 기둥을 사용한 점을 볼 때 국가시설로 추측된다. 



‘시흥형지도’를 보면 행궁 좌측 객사와 사창에 작은 사각 표시를 했는데 이 표시가 그림 속 객사와 사창으로 추정된다. 추정 객사 안에는 수로 주변의 버드나무와는 다른 나무가 확인된다. 이 지점은 현재 지적도와 1912년도 지적원도를 겹쳐놓은 지도에서 찾아보면 287호 대지다. 따라서 그림 속 나무는 현재 보호수로 지정된 은행나무로 추측된다. 


# 지도로 찾아보는 시흥행궁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시흥행궁은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시흥행궁의 위치는 그동안 여러 곳으로 지적되어 왔다. 흥성대원군 별장터나 장택상 별장터에 시흥행궁이 있었을 것이라 막연하게 추정만 해왔다. 서울역사박물관은 학술조사를 통해 2009년처음으로 은행나무사거리 주변에 시흥행궁이 위치했을 것으로 제시했다. 


2020년 항공사진2017년 금천구가 실시한 ‘시흥행궁복원 및 활용을 위한 학술조사’에서는 금천구 최초의 지적 관련 자료와 채제공의 시문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 은행나무사거리 일대와 동쪽 주택가가 시흥행궁터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지목되었다. 아울러 발굴조사를 통해서 시흥행궁의 흔적을 일부나마 되찾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했다. 


# 새롭게 시작된 행행


화성측정 200주년이 되는 1996년 수원시의 주도로 최초의 ‘정조대왕능행차 재현 행사’가 열렸다. 2015년에는 수원시와 서울시가 공동으로 개최하자는 계획이 협의되었고 화성축성 220년을 맞이한 2016년에는 비로소 창덕궁에서 시흥행궁을 거쳐 수원화성에 이르는 공동행사가 처음 열렸다. 서울시 주관 행렬은 윤 2월 9일 시흥 행궁으로 나아가는 일정을 재현했다. 


:‘원행정리의 궤도’,조선 19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가로 47.3cm 세로 62.2cm, 회화, 신수 201,/1795년(정조19)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을 맞이해 정조가 그의 생부 사도세자의 무덤(현륭원)이 있는 수원으로 행차해 열었던 행사의 주요 장면을 그린 화첩이다. 이 의궤도의 그림은 '을묘원행정리의궤'의 반차도와 구성이 같으며 채색화로 정성껏 그렸다. 그림의 제목이나 행렬도의 주요 인물이 한자와 한글로 함께 표기된 것을 보아 이 의궤도는 행사 후 혜경궁을 위해 별도로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차의 내용과 동원되는 인력과 말들의 규모는 해마다 조금씩 바뀌지만 정조대왕 능행차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행사가 이어져오고 있다. 행차의 중간 중간에 출궁의식, 배다리에 오르는 의식, 상언과 격쟁 재현, 전통공연 등 시민들이 보고 즐길거리를 함께 제공하고 있다. 







정조대왕 능행차 재현행사는 서울과 경기도가 협력해 만들어가는 유일한 축제로 두 지역의 유대감을 높이는 행사로 매년 계속되어 오고 있다. 


# 시흥에 행궁이 들어서다 


전시관에 소개된 모형은 시흥으로 돌아오는 임금의 행렬도인 환어행렬도에 나오는 시흥행궁을 조선시대 일반적인 관아 모습과 비교해 재현한 것이다. 



시흥행궁은 1795년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떠난 현륭원 행차 길을 위해 지어진 임시궁궐이다. 창덕궁을 출발해 화성행궁에 이르는 먼 길에 고생할 어머니를 배려하여 지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현륭원으로 출발하는 날과 서울로 돌아오는 날, 이들을 시흥행궁에서 묵었다. 


시흥행궁은 행차 1년 전인 1794년에 지어졌다. 건물의 규모는 114칸이라고 전해지는데 환어행렬도에 그려진 시흥행궁을 근거로 복원한 행궁의 실제 규모도 110-114칸 이어서 두 기록이 일치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흥행궁은 원행을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에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침전 건물이 중시되었다. 국왕의 국정을 보살피는 정당 건물이 중심에 있고 식사와 잠자리는 정당의 뒤쪽에 있는 시흥당에서 이루어졌다. 혜경궁 홍씨는 시흥당의 측면에 자리 잡은 내별당에 거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의 외곽에는 국왕의 호위를 주관하는 군영 건물을 배치했고 정조를 수행 하는 관원들은 행랑을 사무공간이자 숙소로 시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행궁 밖 금천교 너머에는 홍살문을 세워 경건한 공간임을 알렸다.<끝>/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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