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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2] 용산구 한강로-동작구 본동연결하는 한강대교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1-04-13 01:25:17
  • 수정 2024-02-18 10: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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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박광준 기자 [박광준 기자] 한강대교는 1900년에 건설된 한강철교 이후 최초로 한강을 가로지르는 인도교로 건설된 것으로, 개통 초기에는 제1한강교라고 불렸다. 1912년에 교량가설계획을 수립한 후 1917년 10월에 준공됐다. 1925년 7월의 을축년 대홍수로 중지도에서 용산쪽으로 건설됐던 소교가 유실됐다. 1929년 9월에 소교를 재개통했고 폭은 18m로 확장됐다. 너비 36.6m, 길이 841.5m이고 교량 중간에 중지도가 있는 한강상 최초의 도로교이다.


한강대교는 서울에서 남쪽방면의 노량진으로 통하는 가장 중요한 관문위치라 할 수 있다. 서울의 관문인 한강대교 건설에는 당시 총공사비 84만 3,000원이 소요됐다고 한다. 노량진 쪽에는 경간 60m인 3운(運)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양쪽 다리 중간은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했다.



1900년 한강철교가 가설되고 17년 동안 인도교가 가설되지 않은 것은 당시의 도시내 교통수단이 보행위주였고 화물은 철도와 지게로서 운송됐음을 말해주고 있다. 한반도에 민간인의 영업차가 들어온 것이 1912년이었고 이때부터 다리가설 계획을 수립하게 됐다.


이 다리는 한강철교의 낡은 자재를 이용해 가설, 폭이 좁고 중앙차도 4m, 좌우측보도는 각 1m에 불과했으나, 1925년에 있었던 을축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돼 용산측 한강소교가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되자 제1차로 한강소교를 철폐하고 종래의 둑을 쌓았던 곳까지 연장해 459m의 대다리 가설공사를 1927년 5월에 착수, 1929년 9월에 준공하고 9월 18일에 파교식을 거행했다. 당시 120만원의 공사비가 소요됐다.

 


한편, 노량진의 본동쪽 한강교는 종전대로 사용하다가 1934년 3개년 계획으로 공사비 251만 8,000원을 들여서 현재의 타이드아치(tied arch) 형식의 다리로 다시 1937년에 준공했다. 이 때 한 한국 다리 기술자가 감독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후 1950년 6.25동란으로 타이드아치 3경간이 파괴됐던 것이 1957년 1월에 복구공사를 착수해 1958년 5월 15일에 준공돼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가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됐다. 


1981년 원래의 한강인도교 하류 쪽에 전과 동일한 6경간 타이드아치를, 그리고 거더교 구간에서 상류측에 19경간의 판형교를 가설해 교량을 완전히 2배로 확장했다. 이때부터 이름이 한강대교로 바뀌었다.



자료사진

이원등 상사상이원등 상사는 1966년 2월 4일 공수특전단 고공침투 낙하조장으로 강하훈련 중 동료의 낙하산이 기능고장을 일으키자 전우의 낙하산을 개방시켜 주고 자신은 한강에 추락 순직했다.


이원동 상사의 거룩한 전우애와 희생정신을 길이 본받기 위하여 육군에서는 1966년 2월 16일 고 이원동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 전 장병의  정성어린 성금으로 이 곳에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오랜 세월 속에 훼손되어진 동상을 특수전부대 전장병의 뜻을 모아 새롭게 단장하고 죽음의 부하를 구한 하늘의 핀꽃 고 이원동 상사의 숭고한 높은 정신을 받들고 있다.


달빛 노들달은 예로부터 원초적인 기운을 지닌 감흥의 대상이자 흥을 복돋는 유희의 대상이었다. 수면위에 은은히 빛나는 인공의 달은 서울의 건조한 도시 풍경에 작은 비움을 형성하며 새로운 감흥과 낯선 유희의 풍경을 만든다. 한강 위에서 펼쳐지는 생경한 도시경관을 체험하고 공간 내외부의 다층적인 전망을 통해 서울의 노들섬을 다채롭게 감각하는 장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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