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준 기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으로,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다.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 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과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경계 없이 사용했고,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영향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창덕궁 탄생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면,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간됐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에 대해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제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 같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을 죽이고 왕 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法宮)-이궁(離宮)의 양궐 체제가 된다./사진-이승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