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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 출간
  • 민병훈 기자
  • 등록 2019-09-27 01:22:36
  • 수정 2020-10-23 15:2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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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훈 기자]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도형)은 최근 연구총서 ‘새롭게 본 발해 유민사’를 출간했다. 


이 책은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건국된 발해국의 멸망과 그 이후 200 여 년 동안이나 부흥운동을 전개한 불굴의 사람들, 발해 유민에 대한 기록을 새롭게 검토한 것이다.


‘해동성국’으로 불리면서 발전했던 발해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많은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거란(요)의 공격을 받아 하루아침에 멸망한 사건도 예외가 아니다. 발해 마지막 왕 대인선은 926년 1월 수도인 홀한성(忽汗城)이 포위되자 흰 옷에 새끼줄로 양을 끌고 신하 3백 여 명과 성을 나와 거란 태조 앞에 항복하고, 거란 수도로 끌려갔다. 거란 태조는 대인선에게 오로고(烏魯古), 처에게는 아리지(阿裡只)라는 이름을 하사했는데, 이는 태조와 그 왕후가 대인선의 항복을 받을 때 탔던 말의 이름이었다.


나라가 망한 후 발해 주민은 거란으로 끌려오거나 고려 등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망국민으로서의 수난의 역사가 시작됐다. 그러나 ‘발해인’들의 부흥 운동은 2백년 이상이나 이어졌다. 이 책은 발해 유민의 역사를 6개의 주제로 나누어 관련 분야 전문가가 알기 쉽게 서술했다. 


제1장 “발해 유민 연구 동향” (김은국)
제2장 “동단국(東丹國)의 운영과 발해 유민” (임상선)
제3장 “고려시대 ‘발해 유민’과 ‘발해계(渤海系) 고려인’ 연구 (허인욱)
제4장 “요대(遼代) 발해인의 성격과 존재 양태 (나영남)
제5장 “금대(金代) 발해인들의 세거양상과 현달한 발해인들의 역할”(박순우)
제6장 “발해 유민의 불교와 사원” (황인규)


이 책은 몇 가지 부분에서 주목된다.
 
첫째,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세운 동단국(東丹國)에 대한 내용이다. 동단국은 유민들의 저항으로 몇 년 후 요양(遼陽) 지역으로 옮겨졌다. 요양은 옛 고구려의 땅이었고, 또한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평양성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옮겨 간 곳이기도 했다.


둘째, 발해 유민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에는 많은 핍박을 받았으나, 말갈족이 세운 금나라에서는 정치, 문화적으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장호(張浩, ? - 1162) 일가이다. 금나라 정사인 ‘금사(金史)’에는 장호의 본래 성이 고(高) 씨이고 동명왕의 후손이며, 증조가 요나라에서 벼슬하고 장씨가 되었다 한다. 4대조 고락부의 처는 대씨, 부친 장행원의 처는 고씨였고, 장호 본인의 처도 고씨였다. 그는 금 태조 이래 세종까지 다섯 명의 왕을 섬긴 당대 최고로 현달(顯達)한 발해인 관료였고, 그의 아들도 이름이 높았다.


셋째, 책 서두에 다른 책에서 찾아보기 힘든 발해 유민 관련 내용을 표시한 지도가 있다. ‘발해 유민의 저항과 부흥운동’, ‘요와 고려의 발해 유민 거주지’, ‘금과 고려의 발해인 거주지도’세 종의 지도를 제작하여 책의 서두에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넷째, 현재까지 문헌에 나오는 발해 유민 관련 사찰 소재지를 본서 책머리에 수록돼 있는 지도에 포함했다. 발해 유민은 불교에서도 많은 족적을 남겼고, 현재까지도 발해 관련 사찰이 중국과 북한에 남아 있다. 최근까지 발해와 관련된 지역에서 40여 개 이상의 절터가 발굴 보고됐는데, 발해 유민들도 이 사찰들에서 불교 신앙 활동을 전개했을 것이다. 중국 요녕성 의무려산(醫巫閭山)에는 발해 승려 정소(貞素, ?-828)가 중건했다는 청암사(青岩寺)가 있고, 북한 함경북도 명천군 칠보산에 있는 개심사는 발해 선왕 9년(826) 대원화상이 창건했다고 한다. 개심사는 창건자와 연대가 분명한 발해 유일의 사찰로서, 북한의 초급중학교 교과서인 ‘조선력사’2에도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발해 유민의 역사에 대한 집중 탐구를 통해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한다. 중국학계는 발해국이 말갈족을 주축으로 한 나라라면서 중국사의 일부였음을 강조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족(漢族)이 절대적 다수인 중국과 말갈족 간의 혈연이나 역사 계승적 연관은 희박하다. 중국에서 발해를 자신의 역사로 간주한 것은 20세기 전반, 이른바 오늘날 ‘국민’의 개념에 가까운 ‘중화민족’을 주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말갈족은 정치․군사적으로 고구려의 주민으로서 운명을 같이 하였다는 것이 역사의 진실이다. 바로 이들이 발해를 건국하였고, 멸망 이후에도 ‘발해인’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발해에 대해 호의를 가지고 친연 관계를 표시한 나라도 거란이나 송나라가 아니라 고려였다. 태조 왕건은 초기부터 발해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혼인도 했다. 멸망 후 수 만 명의 유민은 남쪽의 고려에 귀화했다.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행위를 “도의(道義)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거란은 금수의 나라이므로 풍속과 말이 다르니 의관제도를 본받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였다. 또한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왕건이 ‘발해는 나와 혼인(婚姻)한 사이’ 혹은 “발해는 본래 나의 친척(親戚)의 나라”라고 했다는 기록도 보인다는 점에서 발해 유민의 역사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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