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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구석 구석 310] 연세대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시인의 흔적 '윤동주기념관'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05 23:44:53
  • 수정 2024-04-10 23:4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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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준 기자] 윤동주. 대한민국 시인.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다. 항일운동 혐의로 인한 투옥과 이른 죽음은 그를 영원한 저항시인, 청년시인으로 남게 했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4년간 다녔던 연희전문(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정과 주변에서 지금도 시인이 남긴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연세대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백양로를 지나면 왼쪽 벤치 옆에 자그마한 시비(詩碑)가 보인다. 거기에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짧은 시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 /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시인의 '서시'. 시비 뒤로 보이는 핀슨홀(Pinson Hall)은 연희전문 시절 학생 기숙사로 쓰였던 건물이다. 이곳은 학생 윤동주가 1938년에 입학해 2년 동안 머문 공간이기도 하다. 1922년 준공되었다는 아담한 건물 안에는 시인의 그 시절 흔적을 모아놓은 윤동주기념실이 있다. 기념실 입구에서 낡은 사진 몇 장이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사진 속에는 젊은 시인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선한 눈매. 그가 남긴 시를 닮은 모습이다.


기념실 내부는 건물만큼이나 아담하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증언을 통해 재현해놓은 시인의 책상이다. 낡은 책상 위에는 당시 시인이 즐겨 읽었다는 책 몇 권, 펜과 잉크, 그리고 시가 담긴 육필 원고가 있다. 그는 소학교(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친구들과 문예지 '새명동'을 만들 만큼 일찍부터 문학에 소질을 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의과 진학을 고집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연희전문 문과에 입학했다. 이곳에서 당시 최고의 국어학자였던 최현배와 역사학자 손진태의 강의를 들으면서 민족에 눈을 떴다고 한다.


윤동주 시비



전시실 중앙에는 시인이 태어난 명동촌의 막새기와가 있고, 그 옆에는 최현배의 '우리말본'이 놓여 있다. 연희전문 기숙사에 머물던 시인은 고향과 민족을 생각하면서 시를 써나갔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윤동주는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으로,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는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고,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아버지는 윤영석(尹永錫), 어머니는 김룡(金龍)이다. 1931년(14세)에 명동(明東)소학교를 졸업하고, 한 때 중국인 관립학교인 대랍자(大拉子) 학교를 다니다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하면서 윤동주는 용정에 있는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했다.


1935년에 평양의 숭실(崇實)중학교로 전학했으나, 학교에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해 폐쇄당하고 말았다. 다시 용정에 있는 광명(光明)학원의 중학부로 편입해 거기서 졸업했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 있는 릿쿄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가(1942), 다시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로 옮겼다(1942).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그러나 복역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생을 마치고 말았다. 유해는 그의 고향 용정(龍井)에 묻혔다. 한편,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고,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8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동생 윤일주(尹一柱)와 당숙인 윤영춘(尹永春)도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됐다. 그의 초간 시집은 하숙집 친구로 함께 지냈던 정병욱(鄭炳昱)이 자필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발간하였고, 초간 시집에는 그의 친구 시인인 유령(柳玲)이 추모시를 선사했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해 첫 작품으로 '삶과 죽음' '초한대'를 썼다. 발표 작품으로는 만주의 연길(延吉)에서 발간된 '가톨릭 소년(少年)'지에 실린 동시 '병아리'(1936. 11), '빗자루'(1936. 12), '오줌싸개 지도'(1937. 1), '무얼 먹구사나'(1937. 3), '거짓부리'(1937. 10) 등이 있다.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에는 '조선일보'에 발표한 산문 '달을 쏘다', 교지 '문우(文友)'지에 게재된 '자화상' '새로운 길'이 있다. 그리고 그의 유작(遺作)인 '쉽게 씌어진 시'가 사후에 '경향신문'에 게재되기도 했다(1946). 



그의 절정기에 쓰여진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됐다(1948).


그의 짧은 생애에 쓰인 시는 어린 청소년기의 시와 성년이 된 후의 후기 시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청소년기에 쓴 시는 암울한 분위기를 담고 있으면서 대체로 유년기적 평화를 지향하는 현실 분위기의 시가 많다. 그의 시비가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다(1968)./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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