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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궐이야기 58] 구중궁궐의 삶, 그 희로애락을 기억하다(2)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4-25 08: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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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실 여성의 친숙한 공간-내전(2)/경춘전-환경전-영춘헌.집복헌

[박광준 기자] 창경궁에 대해 다시 한번 살펴보자. 창경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에 있는 조선의 궁궐이다. 창덕궁의 동쪽에 위치한 궁궐로, 원래는 왕실의 작은 별궁이었던 수강궁(壽康宮)이 있었던 곳이었으나 1483년(성종 14) 성종이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건립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동물원과 식물원이 들어서게 되면서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됐고, 1980년대부터 창경궁 복원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궁궐의 명칭인 '창경(昌: 창성할 창, 慶: 경사 경)'은 '창성하고 경사스럽다'는 뜻이다.


창경궁의 자리는 원래 수강궁이라는 조선 왕실의 별궁이 있었던 자리이다. 수강궁은 1418년(세종 1)에 세워진 별궁으로,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등극하면서 머물렀던 곳이다. 태종이 사망한 이후에도 단종과 세조는 수강궁을 사용했고, 세조는 수강궁에서 별세했다. 또한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의 중문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창경궁은 1483년(성종 14) 성종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 한씨, 덕종의 비이자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수강궁을 확장해 창경궁을 건립했다. 이때 지어진 전각은 명정전.문정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등이며 전각의 이름은 조선 전기의 문신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이 지었다. 정희왕후 윤씨, 안순왕후 한씨, 소혜왕후 한씨를 모시기 위해 지어진 궁궐이었으나, 정희왕후 윤씨는 창경궁이 완공되기 전에 사망해 창경궁에 모시지 못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창경궁, 경복궁, 창덕궁 등 한양 안에 있던 모든 궁궐과 종묘가 소실됐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경궁은 1616년(광해군 8)에 재건됐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으로 인해 통명전.환경전.양화당 등 많은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1633년(인조 11)에 중건되었고, 1830년(순조 30) 대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건물이 또다시 소실되어 1834년(순조 34)에 중수하였다.



순종 즉위 후 창경궁은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되었다. 1909년(순종 3) 일제는 궁 안의 전각들을 헐어버리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했고,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이 채결된 이후인 1911년에는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다. 또한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을 절단해 도로를 설치했고, 창격궁 안에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었다.


광복 이후에도 오랫동안 관광시설로 이용되다가 1980년대에 정부에서 '창경궁 복원 계획'을 세워 1983년부터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12월 원래의 명칭인 창경궁으로 환원됐다. 1984년부터 1986년까지 동물원과 식물원 시설 및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일부 전각을 복원했고, 벚나무도 소나무.느티나무.단풍나무 등으로 교체하고 한국 전통의 원림(園林)을 조성하는 등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철거된 동물원과 식물원에 있었던 동식물은 서울대공원으로 이전됐고, 창경궁에 있던 벚나무는 여의도 윤중로에 옮겨 심었다. 2022년에는 일제에 의해 끊겼던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산맥이 복원돼 일반에 공개되었다.


# 경춘전



경춘전은 성종 14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광해군 8년에 재건했다. 다시 순조 30년에 불에 타서 순조 34년에 재건된 건물로 현판은 순조의 어필이다.



이 건물은 같은 해 건립된 환경전과 구조, 세부 기법 등이 비슷하다. 내전의 일반적인 수법대로 각초석에 각주를 세운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 규모에 2익공 양식이며 팔각지붕으로 되었다. 내부는 모두 널마루로 깔려있으나 '동궐도형'의 평면 내용을 보면,원래는 좌우의 각 2칸이 방으로 되어 있고 중앙부는 우물마루로 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 곳에서는 제22대 정조와 제24대 헌종이 태어났고, 소혜왕후, 인현왕후, 헌경혜빈 홍씨 등이 돌아가신 곳으로 경춘전은 여러 왕후들이 거처하였던 내전의 중요 전각이었음을 알 수 있다.


# 환경전



환경전은 성종 15년에 창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공해군 8년에 중건했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 때 다시 소실되어 꼳 중건했으나 순조 30년 다시 화재를 당해 순조 34년에중건했다.



이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2익공계 양식이며 팔작지붕으로 일반적인 건축 수법은 경춘전과 유사하다.



이 곳에서는 제11대 중종이 승화했고 그 뒤 순조의 왕세자인 익종(등극 전에 승하해 추존됨)이 승하했을 때에는 빈궁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경춘전과 같이 내전의 중요 전각 가운데 하나이다.


# 영춘헌과 집복헌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고,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행각으로 초창 연대는 알 수 없다. 



집복헌에서는 영조 11년(1735)에 사도세자가 태어났고 정조 14년(1790) 6월에는 순조가 태어났으며 정조는 영춘헌에서 거처하다가 재위 24년(1800) 6월 승하했다. 


순조 30년(1830) 8월 1일 화재가 발생해 환경전, 경춘전 등과 함께 소실돼 순조 34년 장남궁을 헐어다 그 재목으로 재건했다. 1983년 동물사 본관에 있던 창경원 관리 사무소가 동물사의 철거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 임시 관리 사무소로 사용하다가 1986년 중건 공사 때 창경궁 관리 사무소를 신축하고 이 건물은 변형된 부분을 보수했다. 



영춘헌은 본래 5칸이 남향해 ㅡ자형을 이루고 본채의 좌우와 뒷면으로는 행각이 둘러져 있어 ㅁ자형을 이루었고 서쪽으로 ㅁ자형의 행각이 이어져 맞붙어 있다. 


현재 이들 건물은 ‘동궐지’의 내용이나 ‘동궐도’의 그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1985년 발굴 조사 때 기단의 변동 등을 확인하기 위해 발굴 조사했는데, 영춘헌은 지표 아래 15센티미터에서 기단 밑뿌리가 확인되어 높이의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보였으나, 전면 쪽으로는 구 지표가 70센티미터 이상 낮아져서 노출돼 원래는 현 영춘헌 앞쪽으로 ‘동궐도’에 표시된 것과 같이 몇 단의 기단이 있던 것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남, 서행각의 모서리 부분 남쪽을 조사한 결과 기단에서 약 1미터 거리를 두고 동서로 뻗었던 구들의 일부가 노출돼 ‘동궐도’에서와 같이 행각이 연결되었고 현 기단도 변형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집복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일부만 전해오는 것으로 여겨진다.<다음 회에 계속>/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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