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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전시6] 선사.고대관/부여.삼한
  • 우성훈
  • 등록 2024-05-09 08:48:42
  • 수정 2024-05-11 11: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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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고조선 멸망 전후, 중국 동북 지역에는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 한반도 동북 지역에는 옥저(沃沮)와 동예(東濊), 중남부 지역에는 마한(馬韓).진한(辰韓).변한(弁韓)의 삼한(三韓)이 있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주변 세력과의 갈등과 긴장 속에서 문화 역량을 강화해 일찍이 고대국가로 성장했다. 옥저와 동예는 고구려의 영향 아래 있었고, 마한.진한.변한은 이후 백제(百濟), 신라(新羅), 가야(伽耶)로 발전했다. 


한반도 서북한 지역에 설치된 낙랑(樂浪)은 동북아시아 교역 및 교류의 창구였으며, 주변 국가들이 고대 국가로 전환하는 과정에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의 특징은 철기의 생산과사용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쇠로 만든 농기구와 무기가 널리 쓰이면서 일어난 다양한 문화 변동은 고대국가로 전환의 토대가 되었다. 


# 부여


김포 운양동 유적/주구묘에서 금귀걸이와 쇠칼, 투검창, 화살촉 등의 철제 무기류가 다수 출토되었다. 특히 부여의 대표적인 유적인 유수노하심에서 출토된 것과 같은 금귀걸이와 부여의 특징으로 아려진 제비꼬리 모양의 쇠 투겁창 등이 출토되어 부여가 남부지방에 끼쳤던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부여는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5세기까지 존속하였던 고대국가이다. 영역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일대로 추정되는데 중심지는 주변 나라와의 전쟁을 겪으면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왕은 중앙을 지배하고 지방은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등의 관리들이 통치했다. 




농업과 목축으로 생업을 삼았고 말과 구슬, 모피 등의 특산물이 있었다. 부여 왕실의 후손이 고구려와 백제를 건국한 지배계층이 되었으므로 부여는 우리나라 고대 국가 형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 옥저.동예


삼한 사람들의 음식 문화/다호리 유적에서는 원형두, 방형두, 원통형 철기, 뚜껑 달린 원통형 철기, 사각합, 컵행칠기 등이 출토되어 철기가 당시 최고 상층 집단의 식기 또는 제기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제사 지낼 때 상 위에 올리는 삼색 과일인 밤과 감도 출토되어, 한 대의 거울 명문에 등장하는 대추와 함께 이 때 이미 제사의 기본 상차림DL 마련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옥저.동예의 토기 옥저는 러시아 연해주와 함경도 일대에 존재했다. 읍락의 군장들이 독자적인 세ㄹㄱ을 형성해 통일된 정치체를 이루지 못하고 고구려의 견제와 지배를 받으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하였다. 옥저의 문화는 두만강 일대의 단결(團結)-크로놉카 문화로 추정 된다. 



# 철기 문화의 발전


우리나라에 철기가 처음 들어온 것은 기원전 4세기 무렵이지만 전국적으로 철기가 제ㅈㄱ.사용된 것은 기원전 1세기 무렵이다. 철기 사용으로 향상된 생산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고대국가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초기의 철기는 주조(鑄造)로 만든농기구가 대부분이었으나 점차 중국 한(韓)의 철기 제작 기술이 보급되어 무기가 다양하게 제작되고 말갖춤이 등장하기도 했다. 


삼한의 농기구/삼한에서는 철제 농기구의 제작.보급으로 농경지가 확대되고 본격적인 수리(水利) 시설이 만들어지는 등 농업 생산 기술이 향상되었다. 철제 농기구는 경지를 가는 작업에서 곡물 수확에 이르는 모든 농사 과정에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제 농기구를 통한 경지의 확장과 생산력 증대는 인구 증가와 더불어 권력의 집중화를 가져와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삼한의 무기/삼한에서는 철기가 널리 사용되면서 무기를 만드는 재료가 청동에서 철로 바뀐다. 이 시기의 무기는 예리한 날과 살상력이 높은 꺾창, 투겁창, 화살촉, 칼 등이 있었다. 이러한 철제 무기는 전투에서 강력한 효과를 낼 수 있어 삼한의 소국들이 통합해 고대 국가로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동예는 한반도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에 존재했다. 옥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회로, 각 음락들은 산과 물을 경계로 영역을 엄격하게 지켰으며이를 어길 때에는 노예나 동물로 변상(責禍)하는 제도가 있었다. 

삼한의 말갖춤/말갖춤은 말을 부리기 위한 도구로, 고조선 말기부터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말갖춤은 수레 부속구와 함께 출토되어 주로 말이 수레를 끄는 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부 지역에서  출토되는 말갖춤은 말의 입에 물리느 재갈이 대표적이다. 모두 재갈멈추개가 결합되어 있는 것으로 초기의 것은 단순한 프로펠러 모양이지만, 후기가 되면 S자 모양으로 변하고 고사리무늬 장식 등이 더해지기도 한다. 

# 낙랑의 대표 무덤, 석암리 9호


석암리 9호 무덤은 구덩이 속에 큰 나무곽을 만들고 그 속에 다시 나무곽과 나무널을 넣는 형식의 귀틀무덤이다. 껴묻거리 중에는 칠기, 청동거울, 장신구 등 중국에서 수입된 문물드이 많이 포함 되어 있다. 무덤의 규모와 껴묻거리로 볼 떄 낙랑의 최고급 무덤 으로 판단되고, 기원 8년의 명문이 새겨진 칠기가 출토되었다. 



낙랑의 대표 무덤, 석암리 9호에서 발굴한 토기고조선은 한과의 전쟁에서 1년여에 걸쳐 맞설 만큼 강성한 국가였다. 그러나 내부 분열로 인해 기원전 108년 멸망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했다. 낙랑군 초기에는 고조선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었으며, 북방 문화의 영향도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조선 문화와 북방문화, 그리고 중국 문화가 결합해 독특한 낭랑 문화를 형성했다. 고구려가 남쪽으로 진출하면서 낙랑군(313년), 대방군(314년)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1. 무력과 권위


청동 무기는 철제 무기의 등장으로 점차 쇠퇴하게 된다. 철제 장검 등 철제 무기는 나무 집과 함께 칼코등이 허리띠 걸이 등 부속구가 수반되고, 원격용 무기인 청동제 노기도 발견되었다. 석암리 9호 무덤에서는 무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농공구가 드물게 출토되었다. 한편, 기원 전후 낙랑고분에는 실용 마구가 부장되지만 중원의 한 대무덤에서는 명기가 부장되는 차이를 보인다. 


허리띠 고리(평양 석암리 9호 무덤)/금관 위에 수천 개의 금 알갱이들을 붙여 만들었다. 큰 용 1마리가 중앙에서 꿈틀거리고, 그 주이에 6마리의 작은 용이 있다. 53.9g(14.3돈)의 순금으로 만든 허리띠 고리이다. 2. 청동 그릇


석암리 9호 무덤은 가장 풍부한 청동 그릇의 조합상을 보이는데, 술을 담거나 데우는 그릇인 동준(銅鐏), 동종(銅鐘), 동형(銅鋞) 등의 기형이 출토 되었다. 청동 그릇의 부장은 기원 1세기대 일부 무덤에서 확인되며, 이후 벽돌무덤 단계에 이르면 흙으로 만든 명기가 부장된다. 


낙랑토기/낙랑토기는 재지의 토기 제작 기술과 전국 연(戰國 燕)의 토기 제작 기술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고조선의 토기 제작 전통에 낙랑군 설치 이후에 본격적으로 유입된 한(韓)의 토기 제작 기술이 더해져 형성되었다. 낙랑무덤에 부장되는 토기는 시기에 따라 종류나 조합, 제작 기술이 변화하나. 이 중에서도 활석이 혼입된 태도로 안쪽에 포를 대고 틀로 찍어낸 화분형토기와 승문타날을 하여 형태를 만든 둥근바닥 항아리, 강한 회전력과 정선된 태도를 사용하여 제작한 납작바닥 항아리 사립이 많이 섞인 백색 태도를 사용한 둥근 옹 등은 조금씩의 변화는 있지만 비교적 오래 지속된 낙랑토기의 대표적인 기종으로 꼽힐 수 있다. 이른 시기의 덧널무덤에서는 화분형토기와 둥근바닥 항아리가, 이후의 귀틀무덤에서는 화분형토기와 납작바닥 항아리, 옹이 함께 획인되는 예가 많다. 2세기 경 벽돌무덤 이 등장한 이후에는 부뚜막모양과 같은 토제 명기나 청동기, 칠기를 모방한 토기 등을 부장하는 변화가 확인된다. 


# 칠기와 장신구


낙랑고분에는 식기류를 비롯해 무구류 등 다수의 칠제품이 부장되어 있었다. 이 중 연대가 적혀있는 (紀年銘) 칠기에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 등이 새겨 있어 당시의 제작상황을 파악 할 수 있다. 또한 팔찌와 반지는 출토 상황으로 보아 남녀의 구별 없이 착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화장 도구/낙랑고분에서 출토되는 화장 도구 중 머리를 묶거나 관과 머리를 결합하는 기능을 한 비녀는 남녀 모두 사용했다. 또한 촘촘한 빗살 사이에 낀 때를 청소하는 청동제의 빗솔 장식도 출토되었다. 

허리띠 고리/전국시대부터 한 대에 걸쳐 유행하던 대구는 앞쪽의 꺾어진 갈고리 형태가 짐승의 머리를 형상화한 이른바 곡봉형 대구다 


# 마한


청당동 유적은 모덤 도랑을 지닌 묘제, 허리띠 고리의 성행 등이 특징적이다. 짧은 목항아리와 경질무문의 깊은 바라가 부장품으로 많이 나오고 고리자루 칼을 비롯한 각종 철제 무기와 공구, 구슬 등이 확인되었다. 호남 지역의 마한 토기/호남 지역의 마한은 집터와 조개더미, 무덤 등이 조사되었는데, 집터의 경우 출입구가 없이 네모난 형태이며 화덕만 설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호남지역에서는 경질무문토기의 비중이 높은 편이고 타날문토기도 회청색보다는 적갈색으로 구워진 것들이 많다. 조개더미에서는 제사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작은 토기들이 발견되었다. 중부 지역의 마한 토기/중부 지역의 마한은 독특한 출입 시설을 갖춘 주거지와 새로운 토기, 초기 형식의 온돌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그 중에서 토기는 기존의 제작 전통에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어 만들어졌는데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로 구분된다. 경질무문토기는 예전보다 높은 온도로 굽는 신기술이 적용된 것으로 한뎃가마와 굴가마에서 구워졌다. 타날문토기는 기벽을 단단하게 하는 두드림기법을 적용해 표면에 삿무늬와 문살무늬가 남아 있다./사진-우성훈 기자  마한(馬韓)은 중부 일대, 호서 지방과 호남 지방에 기원전 3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 중반에 존재한 소국 연맹체였다. 목지국(目支國)을 중심으로 54개 소국 연맹체로 구성된 마한은 

중부 지방에서는 중도 유형 문화, 호서 지방에서는 방형 집자리와 주구토광묘, 호남 지방 에서는 주구묘와 독널무덤을 남기며 토착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 


# 진한 




진한(辰韓)은 기원 전후부터 경주와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사로국(斯盧國)에 의해 통합되어 삼국의 하나인 신라로 발전했다. 고고학적으로는 널무덤과 덧널무덤을 만들어 쓰고 주머니호와 쇠뿔 손잡이 항아리, 다양한 철기를 부장하는 특징이 파악된다. 


탐동 유적:경주시 탑동의 목관묘 유적이다. ‘ㅍ’자 형태의 나무널이 확인되고, 묘장 중앙에는 부장 구덩이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무널 내부에서는 무기류와 장신구류가 출토되었고, 충전묘에서 토기와 쇠솔, 투겁창 및 다수의 철기혼 등이 확인되었다. 주로 경주 외곽에서 확인되던 수장급의 무덤이 경주 시내에서 처음으로 조사되었다. 

# 변한


다호리 유적/삼한 시대의 변한의 대표적인 무덤 유적이다. 수장의 무덤을 만들면서 뽕나무를 속을 파서 만든 관 안에 사신을 안치하고 관 아래에 부장 구덩이를 파고 바구니에 여러 보물들을 넣어 매장하는 풍속이 있었다. 그 안에 철제 도기, 낫, 괭이, 따비 등의 농기구와 창, 칼, 화살과 같은 무기들, 제사에 사용했던 각종 철기 그릇들과 제사했던 음식물을 함께 묻었다. 영남지역의 진.변한 토기삼한(三韓)의 하나로 마한(馬韓)의 동쪽 진한(辰韓)의 서쪽에 위치하며, 지금의 김해 지방에 있던 구야국(狗倻國) 등 12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다. 변진(弁辰)으로도 불리며, 이들 중 대부분이 뒤에 가야 연맹체를 구성했다. 중국 군현(郡縣)과 왜(倭)에 철을 수출한 철 산지로 유명하다. 


# 대외 교류



삼한은 한반도를 벗어나 중원, 오르도스, 왜 등과도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낙동강 하류 지역에서는 철을 낙랑과 왜로 수출하였고, 실제로 남부 지방의 여러 유적에서 중궁 및 일본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청동 세발솥.거울.동전 등은 중국과의 교류 흔적이며, 야요이 토기.청동 투겁창 등은 알본과의 교류를 보여 주는 유물이다. 철기의 등장과 함께 활발해진 교류는 사회 변화를 촉진하고 고대 국가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의례


마한의 제천 의식/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떼를 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기며 술을 마시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춤을 출 때에는 수십명이 한꺼번에 일어나서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가 치켜들었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풍류가락이 마치 방울춤과 비슷하다.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나서도 이렇게 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마한조  


삼한의 조개더미에서는 뼈와 뿔로 만든 생활 도구들과 함께점치는 뼈가 출토된다. 점치는 뼈는 사슴이나 멧돼지의 어깨뼈에 미리 줄을 맞추어 둥근 홈을 판 후 불로 지질 때 나타나는 금이 간 모양을 보고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친 것이다. 부여에서는 전쟁을 앞두거나 나라의 큰일을 할 때 언제나 점을 보았다. 점복이나 의례는 공동체를 유지하고,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진행되었다.


# 문자의 수용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널 아래의 대바구니에서 붓과 손칼이 출토되었다. 중국 고대의 자료와 비교해 볼 때, 붓과 손칼은 대나무쪽이나 나무판에 글을 쓰고 지우는 문방용구(文房用具)로 추정된다. 즉, 붓은 오늘날의 연필, 손칼은 지우개, 대나무쪽은 공책인 셈이다. 붓, 손칼롸 함께 출토된 4점의 청동 고리도 중국 한 대의 천칭(天秤) 저울추의 일종인 겁마(砝碼)로 파악되고 있으므로 문자와 함께 도량형도 당시 지배층을 중심으로 사용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통나무널에 묻힌 변한의 지배자 


차원 다호리 유적(사적 327호)은 경상남도 창원시 동읍 다호리 일대의 낮은 구릉에 자리잡은 변한의 대표적인 공동 묘지로 70여기의 무덤이 조사됐다. 이 가운데 1호 무덤에는 통나무널과 그 아래 구덩이에 유물이 가득 담긴 대바구니가 있었다. 무덤의 형태와 출토되는 유물로 보아 기원전 1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된다./사진-우성훈 기자


경남 창원 다호리 유적-1호묘 목관 노출 모습


사진-오리모형 토기

새장식 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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