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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전시7] 선사.고대관/고구려
  • 우성훈
  • 등록 2024-05-11 11:2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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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훈 기자]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일어나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삼국 중 가장 먼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313년 평양 지역의 낙랑군을 몰아내고, 북으로는 중국 랴오허 강에서 지린성(吉林省)쑹화 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넓혀 동아시아의 강자가 되었다.


고구려는 고유문화를 유지하면서도 중국의 서역, 북방의 외래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역동적이고 실용적인 문화를 만들어냈다. 고구려 문화의 국제성과 선진성은 천문, 지리, 문화, 음악, 무용, 공예 등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이런 고구려 문화의 특징은 만주의 환런, 지안, 일대와 평양 등 고구려 옛 도읍지를 중심으로 남이 있는 성(城), 무덤, 궁궐터, 절터, 그리고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 철기, 꾸미개 등의 유물에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 문화는 백제, 신라, 가야와 바다 건너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고, 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졌다. 


# 고구려인의 일상 


부뚜막/철, 삼국시대(고구려)5-6세기, 평북 운산 용호동 무덤고구려의 성 내부에는 여러 건물과 정비된 도로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다. 귀족의 집은 사랑채와 안채로 이루어지며, 마굿간, 차고, 부엌, 다락창고, 방앗간, 고깃간 등의 부속 시설과 잘 꾸며진 정원을 가지고 있었다. 주요 건물은 기와로 지붕을 덮었고 난방시설로는 부분 온돌을 설치했고, 일상생활에서 평상이나 좌상을 사용했는데, 방안에서 신발을 벗는 습관이 있었다. 


항아리/삼국시대(고구려)5-6세게, 서울 구의동 보루디딜방아로 곡식을 찧었고, 가루로 내어 시루에 쪄 먹었고 아래쪽에 기둥만 있고 본체가 위에 있는 고상식(高床式) 구조의 다락창고에 곡식을 보관했다. 부엌에서 조리한 음식을 소반에 받쳐 들고 안채나 사랑채로 가서 상차림을 하였는데, 주인과 손님의 상을 따로 차렸다.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를 탔다. 일반적으로 마차는 남자용, 우차는 부인용이나, 귀족 남자들도 외출할 때 우차를 많이 이용했다. 바퀴살이 있는 개량된 수레바퀴를 만들어 사용했고 질 좋은 철기를 생산했다. 


# 고구려의 불교


‘영강 7년’이 새겨진 광배/불교의 신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불상의 뒤에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표현한 광배다. 연꽃과 넝쿨무늬로 장식하였고, 전면에 꽃무늬를 새겼다. 광배 뒷면에 ‘영강 7년’으로 시작되는 7행 58자의 명문이 새겨져있는데, ‘영강’은 고구려 양원왕 때의 연호로 551년에 해당한다. 명문 내용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미륵 법회에 참석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미륵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이 광배의 본존이 미륵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소수림왕(재위 371-384) 2년(372) 중국 전진(351-394)의 승려 순도가 불상과 경전을 가져오면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됐다. 불교는 일찍부터 왕실이 적극 후원해 고구려 사회 운동 운영의 중요한 축이 되었다. 중국 지안의 장천 1호 무덤에 그려진 예불도는 당시의 불교 의례를 잘 보여준다. 


고구려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시대 (420-589) 불상의 영향을 받아 얼굴을 길고 옷자락의 몸 양옆으로 힘차게 뻗쳐 있다. <‘연가 칠년’>을 새긴 부처는 제작 시기(539)를 확인 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고구려 불상이다. 또한 평양 원오리 절터에서 나온 소조 불상과 보살상 300여 점은 출토지가 분명한 6세기 중엽의 불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처럼 대량으로 제작한 불상은 휴대하기 쉬워 불교신앙을 널리 전하는 데에 유용했을 것이다. 


# 흙으로 만든 부처와 보살



1937년 평안남도 원오리 옛 절터에서 흙으로 만든 많은 소조불이 출토되었다. 이 불상들은 가부좌로 앉아 배 부분에 손을 까지 낀 선정인 자세의 부처와 시무의 여원인의 손모양을 한 보살입상들이다. 6세기 중엽 이후에 만들어지는 출토지가 고구려 불상이다. 


# 못신


고구려의 금동신발은 바닥에 박힌 못의 개수가 많고, 바닥판만 금속으로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지안 삼실총과 통구 12호분의 벽화에 이러한 신발을 신고 있는 고구려 무사가 묘사되어 있다. 이 신발은 바닥판만이 남아 있는데, 사각추 형태에 금동못 40여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 바닥판 가장자락에 작은 구멍이 짝을 이루어 뚫려 있는 점으로 보아, 신발의 위쪽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들어 연결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신발을 실제 사용된 것이라기 보다는 의례용이나껴묻거리로 보인다.


네 귀 달린 항아리/삼국시대(고구려) 5세기, 경북 경주 금관총개마총 벽화에 등장하는 인물이 쓰고 있는 관 꾸미개의 형태가 이와 비슷하다. 이런 고구려의 관과 꾸미개는 금.은제 귀걸이와 허리띠 장식, 금동 신발 등과 함께 고대 국가 지배 계층의 신분과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물이었다. 



고구려의 금동관/고구려 사람들은 신분에 따라 다른 모양의 관을 착용했다. 고구려의 관인(官人)은 절풍(折風)이나 소골(蘇骨)이라 불리는 고깔 모양의 관에 새깃 2개를 꽂고 금테나 은테를 섞어 둘렀다. 지안 일대에서 출토된 고구려의 금동관 꾸미개는 두껍게 도금된 상태로 대개 세움 장식 가장자리를 촘촘히 오려낸 다음 하나씩 다음 하나씩 꼬아 새의 깃털처럼 표현하고 세잎무늬 등을 맞새김해 장식했다.

# 글자가 새겨진 평양성 성돌


평양성은 고구려의 마지막 도성이 장이다. 양원왕8년(552)에 성의 축조가 시작되어 평원왕 28년(586) 이곳으로 도성을 옮기게 된다. 이 성은 대동강과 보통강을 자연 해자(垓子)로 삼아 평양 시가지를 둘러싸고 있고, 이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이 각기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기록이 없으나, 글자가 새겨진 성돌이 내성과 외성에서 발견돼 공사 시기, 공사 책임자 등에 대한 여러 가지정보를 전해 주고 있다. 



이런점에서 평양성 성돌은 현재 6점이 알려져 있는, 이 가운데에서 3점은 실물로 남아 있고, 나머지 3점은 조선시대 고문헌을 통해서만 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이 성돌은 내성 남벽에 박혀 있던 것으로 현재 북한의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5행 18자로 소형(小兄)가군(加群)이 공사구간 4리를 맡았다는 내용이다. 


# 고구려의 성


고구려는 도성과 주요 교통로에 수백개의 성을 축조했다. 고구려인은 절벽과 가파른 산등성이 등 험준한 지세를 이용해 산성을 쌓아 비교적 적은 힘으로 방어력을 최대로 증대시켰다. 산성과 대비되는 평지성은 주로 도성 지역에 축조되었다. 군사적, 방어적 성격이 강한 산성에 비해 평지성은 거주 기능이 뛰어나 다양한 정치적, 행정적, 기능을 수행하기에 유리하였다. 고구려의 도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짝을 이루도록 설계되어 평시에는 평지성에서 거주하다가 전쟁이나 위급 시에는 산성으로 옮겨가 대항에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 고구려의 무덤


반원 막새: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 광양지역고구려 무덤은 돌무지무덤과 흙무지무덤으로 크게 분류할 수 있다. 돌무지무덤은 압록강 유역에 집중되어 있는 고구려 전기 무덤 형식이다. 지상에 돌을 깔고 그 위에 주검을 안치한 후 다시 돌을 덮어 만들었으며, 무기단식에서 기단식, 계단식으로 변천했다. 


연꽃무늬 수막새/삼국시대(고구려) 5-6세기지안의 장군총, 태왕릉, 천주총 등은 고구려 돌무지 무덤의 가장 발전된단계를 보여주는 예이다. 흙무지무덤은 지하, 반지하, 지상에널길이 있는 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형식으로 돌방의 수, 천장의 짜임, 널길의 위치 등에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짐승얼굴무늬 수막새/삼국시대(고구려)5-6세기또한 고구려에서는 벽화를 그린 돌방 무덤이 발전했다. 벽화 무덤은 고구려의 옛 도읍 일대에 집중되어 있으며, 생활풍속, 장식무늬, 사신도(四神圖) 등 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다. 


# 글자가 새겨진 벽돌



지린성, 지안의 태왕릉과 천추총에서 출토된 벽돌이다. 이 무덤들은 대현 계단식 돌무지무덤으로, 무덤 위쪽에 기와를 이은 건물을 세웠거나, 무덤을 지키는 사람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돌은 무너진 돌무지 속에 기와와 함께 섞여 있었고, 한쪽 면에는 무덤이 오래도록 보존되기를 기원하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광개토대왕릉비 원석탁본


2023년 국립중앙박물관은 공개토대왕비릉비 원석탁본첩을 소장하게 되었다. 한학자였던 청명 임창순 선생이 소장했었기 때문에 ‘청명본’이라고 불리었던 이 판본은 1889년 리윈충이 탁본한 것으로 세 글자씩 잘라서 만들어졌고, 3면과 4면의 일부가 결락되어 앆어 완전한 판본은 아니다. 



원석탁본이란 무엇일까? 19세기 말 비석에 대한 탁본 작업이 시작되었다. 비의 표면에는 이끼와 넝쿨들이 가득했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비에 불을 질렀고 이때 많은 부분이 훼손됐다. 이후 석회와 진흙을 발라 면을 면을 고르게 한 후 탁본을 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부 글자가 왜곡되기도 했다. 석회와 진흙이 발라지기 이전의 탁본을 원석탁본, 이후의 것을 석회탁본이라 구분했는데, 원석탁본은 석회를 바르기 이전의 탁본으로 비문 연구의 기준이 되고 있다. 


# 강서대묘


강서대묘는 남포시 강서구역 삼묘리에 있다. 삼묘리에는 3개의 흙무지 돌방무덤이 사각형을 이루면서 자리하고 있는데, 제일 남쪽의 가장 큰 무덤이 강서대묘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벽화 무덤이라는 사실이 세간에 알려져 외부인들의 무덤 안 출입이 계속되었으나, 1912년에야 본격적인 내부 조사가 이루어졌다. 무덤의 방향은 남향이며 무덤칸은 지상에 축조되었다. 널길과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등진 대형 화강암으로 무덤칸의 벽과 천장고임을 축조했다. 대형 화강암 판석을 수직으로 쌓아 만든 널방벽체가 서로 만나는 곳의 상부는 끝부분을 각이 지게 깎아 내어 처음부터 약간 좁혀진 상태로 천장을 고일 수 있게 했다. 널방의 천장구조는 평형삼각고임이다. 



무덤 안의 돌 벽돌에 직접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중심주제는 사신이다. 아무런 특히 기운생동하는 사신도와 유려하고 다채롭게 표현된 천장 그림들은 고구려 무덤 벽화의 절정기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북벽의 현무가 연출하는 긴장감 있는 화면 구성과 회화적 완성도는 조사 보고 당시부터 국내외의 이목을 끌었다. 그 뿐 아니라 천장고임에는 연꽃, 비천,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 기린 봉황을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서로운 존재들, 넝쿨무늬, 산악 등을 그려 넣어 신선 사상과 불교적 내세를 표현했다. 또한 천장석 중앙에는 왕의 표지로도 이해되는 황룡을 그려 넣었다. 이러한 벽화들에 대한 모사 작업이 1912년과 1930년 무렵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외방무덤 구조, 사신을 중심 주제로 삼은 벽화 구성, 최고조에 이른 사신 묘사 기법 등으로 보아 무덤의 축조와 벽화 제작 시점은 6세기 말일 가능성이 높다.


# 청룡

 

청룡은 사신 중 동쪽의 수호자이며 백호와 함께 벽사(辟邪)의 기운을 가진 존재로 여겨졌다. 중국 신석기시대 무덤에서는 시신 좌우에 용과 호랑이 모습으로 쌓은 조개껍질더미가 발견되었다. 이는 죽은 이를 지키는 존재로 청룡과 백호가 약 6,000년 전에 등장했음을 말해준다. 



널방 동벽에 그려진 청룡은 널방 입구인 남쪽을 향해 왼쪽 앞발을 크게 내밀며 하강하는 모습이다. 커다란 S자 모양의 가느다란 목과 굵은 몸통, 계단꼴을 이루면서도 유연하게 뻗어나간 꼬리, 적절하게 내딛고 뒤로 뻗은 네 다리가 어우러진 자태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힘이 있다. 화려하면서도 치밀한 몸체의 묘사와 채색이 돋보인다. 청룡의 머리 뒤쪽에 대형 철못 흔적으로 보이는 검은색 방형 점이 그려져 있고, 그 아래에 철녹을 표현한 듯한 붉은 선이 있다. 이러한 검은 점이 널방 네 벽의 비슷한 위치에서 확인된다. 


# 현무



널방 북벽 현무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현무는 뱀이 거북을 감은 형상으로 거북이와 뱀이 마주 보면서 서쪽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다. 마주 보는 위치에서 비스듬히 허공을 쳐다 보는 거북과 뱀의 크게 벌리 아가리에서는 불꽃같은 가운이 뿜어나온다. 거북이 자아낸 운동감과 뱀이 이루어낸 탄력성이 잘 어우러져 역동적인 현무를 만들고 있다. 


북방의 수호자인 현무는 주작과 함께 음양의 기운을 순조롭개 조절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현무의 개념은 중국 한나라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보이며 뱀과 거북이 한 몸을 이룬 전형적 모습은 한나라 때에 처음 등장하지만 이후에도 거북만으로 표현된 경우가 적지않다. 


# 백호


널방 서역 백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쪽을 관장하는 백호는 청룡과 짝을 이루어 나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의 수호신으로 인식되어 왔다. 동벽의 청룡과 마찬가지로 남쪽 널방 입구를 향해 포효하며 내딛는 모습의 백호는 매우 환상적으로 표현되었다. 기본 자세와 태도는 맞은편 청룡과 거의 같다. 



다만 역 S자꼴로 이루며 목에서  몸통으로 이어지는 선이 보다 가파르고 치밀한 세부묘사를 생략한 몸통 표현, 상대적으로 가늘어 보이는 네 다리의 묘사  등이 백호 나름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점이 다르다. 넓은 혀를 내민 백호에는줄무늬의 호피무늬를 부분적으로 그려 넣었을 뿐, 붉은색으로 엷게 채색한 몸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았다. 앞발을 크게 내민 대각선 구도가 속도감과 운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 


# 고구려의 사신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이루어진 사신은 대표적인 상상 속 신수(神獸)이다. 사산은 동서남북의 내 방향, 몸.여름.가을.겨울의 네 계절, 하늘 사 방의 28별 자리와 관련있는 존재이며 벽사와 음양조화를 뜻하는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본격적으로 사신이 표현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한(韓)대부터인데 시기별, 지역별로 인식과 표현기법에서 변화와 발전을 계속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무덤 벽화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고구려 무덤 벽화에서 사신은 해와 달, 별자리, 상서로운 동물, 연꽃 등과 함께 내세를 이루는 한 요소로 무덤칸 천장에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5세기까지는 표현과 배치가 정형화되지 않아 기이하고 어색한 모습을 띠는 경우가 많고 쌍을 이뤄 나타나거나 일부가 생략되기도 했다. 이러한 특성은 점차 사신에 대한 인식이 체계화되면서 신령스러운 동물 특유의 신비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게 된다. 그리하여 6세기 이후에는 벽화에서 그 비중이 점차 높아져 무덤칸 벽면 전체를 차지하는 사실상 유일한 주제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이로부터 단지 내세를 구성하는 하나의 일원으로서 가 아니라 독자적 존재이면서 무덤의 수호자로 격상된 사신의 위상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무기



뛰어난 기마전술을 바탕으로 한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은 국가 성장의 중요한 동력이었다. 고구려의 무기는 활, 창, 칼, 도끼, 쇠뇌 등의 공격형과 갑옷, 투구, 방패 등의 방어용이 있다. 기병은 주로 긴창과 활을 사용했는데, ‘맥궁(貊弓)’이라 불린 고구려의 활과 길이가 짧은 각궁(角弓)으로 말을 타고 달리면서 사용하기에 적합하였을 것이다. 이 밖에 안악 3호 무덤의 행렬도에는 창과 도끼를 들거나 칼을 맨 보병들이 등장한다. 


# 고구려의 말갖춤



말갖춤은 말을 부리기 위한 재갈과 고삐, 말 위에서 몸의 안정을 인정을 돕는 안정과 발걸이, 말을 장식하기 위한 말방울, 말띠드리개, 말띠꾸미개 등이 있다. 금속제 재갈과 견고한 재질의 안장, 발걸이는 기병을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고구려는 고대 동아시아에서 기승용(騎乘用) 말갖춤의 확립과 확산에는 큰 역할을 했다. 


# 고구려의 철갑기병



고구려는 국가 체재를 정비하는 동시에 중국의 혼란기를 이용한 대외 정복 활동으로 넓은 영토를 개최하고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고구려의 군대는 수군으로 구성되고, 육군은 기병과 보병으로 이루어졌다. 기병은 중장기병과 경기병(輕騎兵)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을 적절히 배치해 효과적으로 전투를 수행했다. 



기병 중 사람과 말 모두가 철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중장기병은 고구려 군사력의 가장 핵심전의 가장 핵심적 존재였다. 동천왕(재위 227-248)떼에 이미 “철기 5천”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록 기마전술에 의한 전투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개마무사(鎧馬武士)로도 불리는 이들은 안악 3호분과 덕흥리 무덤의 변화 등에 서 잘 표현되고 있다. 


# 고구려의 남진



고구려는 475년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했다. 임진강 유역과 양주 분지 일원, 한강 하류역, 금강 유역에서는 고구려의 남진을 보여주는 유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이들 대부분 은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고려군의 축조한 소규모 성곽으로 군사적 성격이 강하다. 


특히 아차산과 용마산 일대 보루들에서는 온돌 시설이 있는 건물지와 저수시설, 간이 대장간, 방앗간 시설 등의 다양한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다. 이들을 통해 고구려의 군사조직과 생활상, 한강유역 지배방식 등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1979년에 발경된 중원 고구려비 역시 5세기 고구려의 남진을 이해하는 데에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자료이다./사진-우성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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