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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사찰 145] 최고급 요정 대원각을 불교 사찰로 바꾼 '길상사'
  • 박광준 기자
  • 등록 2024-05-24 14:01:29
  • 수정 2024-05-27 03: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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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

[박광준 기자] # 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통과하는 문이다. 최소한 네 개의 기둥이 서야 일정한 면적을 가지는 건물이 이루어지지만 안팎이  없는 두 개의 기둥만으로 세워진 문이어서 일주문(一柱門)이라 불린다. 자타(自他), 안팎, 옳고 그름이 둘이 아니며 모든 세계가 한마음에서 벌어진 일삼법계에서 피안인 의미가 담겨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사바 세계에서 피인인 열반의 세계로 또,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뜻이다.  


지장사에서 바라본 일주문

# 길상시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1997년에 세워져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으나, 최고급 요정(요릿집)인 대원각(大苑閣)이 불교 사찰로 탈바꿈한 특이한 이력으로 유명한 곳이다.



극락전

# 극락전은 아미타부처를 봉안한 길상사의 본법당으로, 다른 절에서는 아미타전, 미타전, 무량수전으로 불리기도 한다. 아미타불은 특히 정토신앙에서 가장 중요하게 모시는 주불로 무량수전불 혹은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1997년 길상사 창건 당시, 아미타불을 주존(主尊)으로 모신 것은 도심가운데 생긴 이 도량이 보다 많은 불자들을 이고득락(離苦得樂)의 길로 이끄는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였다. 


주존이신 아미타부처의 좌우에 관세음보살과 지장보살이 협시보살로 모셔져있다. 불단의 탱화는 불모(佛母) 김의식이 그렸다. 탱화안에는 아미타불이 주존이고, 왼쪽으로는 대세지보살, 보현보살, 지장보살, 그리고 사천왕 가운데 지국, 중창천왕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미륵보살 그리고 사천왕 가운데 다문, 광목천왕이 그려져 있다.  



# 대원각 소유주 김영한은 16살 때 조선권번에서 궁중아악과 가무를 가르친 금하 하규일의 문하에 들어가 진향이라는 이름의 기생이 됐다. 그가 지금의 길상사 자리를 구입해 청암장이라는 한식당을 운영했고, 군사정권 시절 대형 요정인 대원각이 됐다. 


범종각

# 범종은 법고, 목어, 운판과 함께 사물가운데 하나다. 범종은 땅 위와 하늘의 세계를 울려 인간과 천신을 제도하고,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법고는 땅위의 축생을 제도하며, 물고기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목어는 수중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을 각각 담고 있다. 2009냔 8월 단청불사가 이루어졌다. 원래의 범종은 개산 당시 공덕주 길상화가 단독 시주해 봉안됐으나 2009년 9월 4일 여러 불자들의 동참으로 다시 조성됐다.  



# 1970~80년대 군사정권 시절은 '요정 정치'라고 불릴 만큼 요정이 큰 영향력을 가진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3대 요정으로 불린 대원각은 박정희 시절 고위급 인사들과 재벌들의 비밀회동 장소로 자주 이용됐다. 제3공화국, 제5공화국과 관련된 드라마와 영화들을 보면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가야금 소리가 들리고 기생들이 있는 술집이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 배경이 대원각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처럼 요정 문화를 대표하는 대원각을 통해 김영한은 엄청난 부를 이뤘다.


적묵당/신행단체 법회장소 및 초파일 연등작업과 소식지 발송작업이 이루어 지는 곳이다. 


1970~80년대, 대한민국은 외화를 벌어들이기 위해 대원각과 같은 요정을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기생관광의 무대로 활용했다. 1973년에는 정부기관인 국제관광공사 산하에 요정과라는 부서를 설치하고, 관련 업무를 관리하도록 했다. 대원각을 외국인 관광객 유치를 위한 관광유흥음식점으로 지정해 지방세 감면 등의 특별한 세금 혜택을 주었다. 


공덕주 길상화 보살(본명 김영한/1916-1999)

# 김영한은 1916년 민족사의 암흑기에 태어나 16세의 나이로 뜻한 바 있어 금하(琴下) 하규일의 문하에서 진향(眞香)이란 이름을 받아 기생으로 입문했다. 19276년 천재시인 백석으로부터 자야(子夜)란 아명으로 불리었던 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생전에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등의 저서를 남겼다. 


1955년 바이 사이 골짜기 맑은 물이 흐르는 성북동 배밭골을 사들여 대원각이란 한식당을 운영하던 그녀는 1987년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받아, 생애의 가장 아름다운 회향을 생각하고 7천여 평의 대원각 터와 40여 동의 건물을 절로 만들어주기를 청했다. 


1997년 12월 14일 대원각이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창건되는 아름다운 법석에서 김영한은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라는 불명을 받았다. 길상화 보살이 된 그녀는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 뜰에 뿌려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었다. 다비 후 그녀의 유골은 49재를 지내고 첫눈이 온 도량을 순맥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으며, 무주상보시의 귀한 뜻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2001년 11월 21일 이 자리에 공덕비를 세웠다. 


나와 나타샤와 한당나귀

                      

                                                                          백석(본명 백기행/1912-1996)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날인다.


나타샤를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한당나귀 타고 

산곬로 가쟈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곬로가 마가리에 살쟈


눈은 푹푹 날이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리 없다. 

언제벌서 내속에 고조곤히와 이야기한다. 

산곬로 가는 것은 세상 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건 덜어워 벌이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날이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한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 응앙울을 것이다. 


-1937년 겨울에 쓴 최초의 원문-

- 마가리:오두막집의 방언 –출출이:뱁새의 방언 –고조곤히:소리없이, 고요히 


진영각/법정스님 진영을 모시고 스님 저서 및 유품을 전시한 전각이다. 





# 또한 일본인의 입국 제한도 풀어주었고 통금 제한도 예외적으로 무시할 수 있도록 했고, 성매매 단속법에도 적용을 받지 않도록 해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다. 접객 여성들에게는 관광종사원 등록증을 발급해주었는데, 이들 또한 통금 제한을 무시할 수 있는 특혜가 있었다.


지장전

#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석가모니부처가 열반 후 미륵부처가 출세할 때까지 육도의 일체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대원력을 세운 지장보살이다. 지장보살상은 삭발한 머리에 두건을 두른 모습으로 묘사된다. 



길상사 지장전의 지상보살은 왼손에 보두를 두루고 오른손을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으며 손에 석장을 지닌 모습이다. 선운사 도솔암의 지장보살상이 모델이 됐다. 주존인 지장보살상의 협시로는 왼쪽의 도명존자 오른쪽의 무독귀왕이 서있다. 



본존 뒤로 돌아가면 벽에는 아미타불 탱화가 모셔져 있고 벽면전체의 신도들의 천혼(遷魂)을 발원하는 마음을 담아 영구위패가 모셔져 있다. 주위에는 하루 스물 네 시간 내내 아미타불 염불이 흐른다. 


설법전

# 설법전은 대규모 설법이 이루어지는 전각으로석가모니 부처가 주불로 모셔져 있다. 불상 뒤쪽으로는 탱화 대신 천불을 봉안했다. 아래쪽에는 연태상으로 일천부처가 연꽃에서 화현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우주가 생겨났다 공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겁(劫)이라 하는데 현재의 겁은 현겁(現劫)이라 한다. 이 현겁 중에는 천 분의 부처가 화현하면서 그 가운데 석석가모니 부처는 일곱 번째 부처이다.

 


# 김영한은 자신이 백석의 연인이었다고 주장했으나 백석 측은 부인, 문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백석 연구가 송준은 "생전의 김영한을 인터뷰했는데, 의구심이 든다. 백석이 유명해지니 관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닐까?"라고 추측했고, 백석 전문가 이동순 역시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은 실제가 아니며, 조작되고 윤색된 이야기"라고 기고했다.


길상보탑

# 이 석탑은 길상사를 무주상보시한 길상화와 법정 스님의 고귀한 뜻을 기리고 길상사와 성북성당, 덕수교회가 함께 한 종교간 교류의 의미를 전하기 위해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이 무상으로 기증해 2012년 11월 11일 복장봉안품을 봉안했고, 2013년 8월 25일 미얀마국에서 1600여 년전 고탑 해체과정에서 출토한 부처님 오색정골사리, 옹혈사리, 아라한 사리 등을 새롭게 봉안했다.

 

관음보살상/2000년 4월 천주교신자인 조각가 최종태가 만들어 봉안한 석상, 종교간 화해의 염원이 담긴 관음상이다.




# 김영한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아, 1987년 법정 스님에게 요정 터 7,000여 평과 40여 채의 건물을 시주하고 절을 세워달라며 간청했다. 법정 스님은 처음에 사양했으나, 결국 1995년 이를 받아들여 대한불교조계종 송광사의 말사로 등록해 길상사를 세웠고, 이전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받았다.






# 길상사가 백석의 거주지로 알려졌으나, 이는 백석 연구가 송준이 백석의 일본 아오야마가쿠인 유학 시절 3학년 시기의 주소를 도쿄 길상사 1875번지에서 살았던 것으로 잘못 추정했기 때문이고, 아오야마가쿠인대학 학적부와 동창회부를 통해 정확한 주소가 다시 알려졌다. 김영한이 길상사라고 절 이름을 지은 것은, 자신과 백석과의 관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가로도 1,000억 원이 넘는 액수라고 하는데, 무소유를 설하던 법정 스님이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시주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불교 내부에서도 논란이 있었다. 하지금 법정이 신나서 덥석 받은 것도 아니고, 10년 가까운 실랑이 끝에 김영한의 마지막 원을 이루어준 것이라 어느 정도 참작할 만한 근거는 된다.





# 1999년에 김영한이 사망하자 화장해 절터에 뿌려졌다. 절터에 골고루 산골했기 때문에 따로 무덤은 없으나, 그녀를 기리는 공덕비가 절 안에 있다. 2010년에는 법정 스님도 여기서 사망했다. 극락전에는 김영한의 영정이 있고, 진영각에는 법정 스님의 영정과 유품 등을 전시한다. 사망 이후, 딸 서모 씨가 조계종에 50억 원을 달라고 소송해 승소했다./사진-박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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